121. 김광재 (1875-1962)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광재는 1875년 6월 5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28세가 되던 1903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선에 올랐다. 그가 하와이 노동 이민선에 오를 때 다른 이름을 사용한 듯하다. 그 후 김광재는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Kwang Chai Kim으로 표기했다. 

김광재는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정 기간 노동을 하였을 것이고, 그가 노동하던 곳에 있던 한인 감리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 국민회 연합중앙회가 성립된 이후 이를 반대하는 자들이 1918년 4월경에 하와이 총회 임원 선거를 하였다. 그때 김광재는 총무로 선임되었다. 총회장은 안현경, 부회장은 윤계상, 서기와 재무는 이승만, 학무원은 손덕인, 법무원은 양흥렵, 구제원은 정윤필, 군무부원은 손창희 그리고 농상부원은 서상호였다.

하와이에 있던 교민단체가 통합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였고, 한인합성협회가 1907년 10월에 기관지로서 한인합성신보를 창간하였다. 위의 한인합성협회가 1909년 2월에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대한인 국민회를 구성하면서 한인합성신보를 개제하여 신한국보를 발행하였다. 1913년 8월에 대한인 국민회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신한국보를 개제하여 국민보를 창간했다. 김광재는 1918년에 국민보의 재정 담당으로 재직하였다. 

김광재는 1918년 10월에 제1차 세계 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했다. 위의 징집서류에 따르면 김광재는 키가 크고, 체중이 많았으며, 갈색 눈에 머리카락은 검었다.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그는 자기 어머니 김순O을 적었고, 그의 어머니는 한국 개성 성학동에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그래서 그가 개성 성학동에서 태어났거나 거기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12월에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 명년도 총회장과 총부회장 후보자에 피선된 자가 알려졌다. 김광재는 손창희와 함께 총부회장 후보였고, 총회장 후보자에 이종관과 윤계상이었다. 그런데 선거에서 김광재는 부회장이 되지 못했다. 공선된 총회장 이종관과 부총회장 손창희가 대의원회를 거쳐 총회 임원을 조직하였는데 김광재는 총무로 선정되었다. 그 외 서기와 재무 김영우, 학무원 이승만, 법무원 서상홍, 구제원 정윤필, 군무원 손덕인, 농상부원 신성일 그리고 중앙총회 대표원 안현경, 윤계상, 유상기가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2년 뒤인 1920년 12월에 김광재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의 명년도 총부회장 후보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많은 표를 얻었으나 그가 사면하여 총부회장 후보로 김성기와 안원규가 후보자로 선정되었다.

수재로 참상을 당한 내지 동포를 구조하기 위하여 하와이 동포가 1923년 9월에 대대적으로 운동하여 한인기독교회 중앙부, 교민단 총단 그리고 부인 구제회가 연합하여 내지 동포 구조를 위한 취지서를 각 지방에 발송하였다. 이때 김광재가 위의 연합회의 임시 재무로 활동하였다. 그는 400여 달러를 그간에 받아 그달 17일경에 일화로 바꾸어 1,000원을 전보로 동아일보사 구제회로 보냈다. 이와는 별도로 하와이 부인 적십자회와 하와이 한인감리교회는 내지 수재 동포를 위하여 벌써 150달러를 모금하였고, 각 방면으로 크게 선전하여 더 모으려고 하였다.

그해 11월에 금주와 금연을 목적으로 하와이 한인 사회와 종교 단체 대표 10여 명이 발기하여 민단 사무실에서 100여 명 남녀 동포가 모여 한인 교풍회를 조직하였다. 김광재는 한인기독교회 대표로 참여하였다. 회장에 안현경, 총무에 박세환, 서기에 이재현이었고, 김광재 외의 단체 대표로는 호항 교민지방단 조석진, 한인감리교회 현공춘, 부인구제회 지방회 김해나, 부인 보조회 손마리아, 한인상조회 전익주, 기독학원 서기근, 청년회 이태성, 신흥학교 곽내홍, 그리고 의사 찬성원 양유찬이었다.

한인교풍회 제2회 통상회가 그해 12월에 호놀룰루에서 있었다. 회장이 과거에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호놀룰루 안에 술을 파는 집이 18호며, 술을 만들어 먹는 집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교인 중에도 술이 있는 집이 없지 않았고, 어떤 가정에는 술을 제조하여 팔지는 않고 친구를 청하여 대접한다 하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술친구들이 남의 술을 거져 마실 수 없다는 뜻으로 술안주로 육포와 백미와 사탕을 가지고 오는데 실상 일일이 드러내 놓고 안주하는 것보다 더 많다고 하였다.

1923년에 호놀룰루에서 한인들이 한인상조회를 조직하였다. 회원들의 장례를 위하여 한인상조회 회원들이 매달 25센트씩 내고, 한인상조회 회원이 사망하면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해 12월에 한인상조회 이사부장 민찬호 목사의 사회하에 통상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명년도 회장 후보자로 박세환 외에 김광재가 선정되었으나 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외 재정 조사 위원으로 전익주, 박세환 그리고 김이제가 피선되었고, 위생국의 허가를 받아 매장지를 구매하기로 하였다. 이 한인상조회는 오늘날 하와이 한인양로원으로 개칭하여 이민 1세들의 복지시설이 되고 있다. 

하와이 교민 총단 민국 8년도 총간부가 1926년 1월에 조직되었다. 김광재는 서기와 재무로 선정되었다. 총단장은 최창덕, 부단장은 김성기, 총무는 이은구, 법무는 전경준, 상무는 민능호, 구제원은 김상의, 학무는 양유찬이 선임되었다. 

김광재는 1930년에 호놀룰루에서 세 살 많은 부인 김덕은과 하와이에서 태어난 네 살 6개월 된 입양한 딸 화순과 함께 거주하였다. 그해 그는 태평양주보사 매니저로 재직했다. 태평양주보는 이승만에 의해서 1913년 9월에 창간된 월간 태평양잡지가 전신이었고, 1930년 12월부터 대한인 동지회 기관지가 되어 1970년 2월에 폐간되었다.

1930년 7월에 이승만이 대한인 동지회를 미주 한인 사회 독립운동의 중심단체로 확장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6일간 호놀룰루에서 동지미포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중요 의결로서 동지회의 목적을 조국광복에 두었고, 비폭력의 희생적 행동과 조직적 행정과 자치 자급을 동지회의 3대 정강으로 삼았으며, 그 외에도 태평양잡지를 확장하여 영문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고, 이사장을 포함한 9인 중앙 이사부와 행정 집행을 위한 5부로 구성하였다. 이때 이사장 이용직, 재무 겸 상무원 김원용, 그리고 이사원으로 김광재를 비롯해 김현구, 김경준, 손덕인, 차신호, 박상하, 김윤배가 선임되었다. 

그런데 신한민보는 1931년 1월에 ‘동지회에서 교민단 총단관을 점령한 후 하와이 호항의 인심은 자못 흉흉하여’라는 제하로 동지회와 교민단 사이에 일어난 분쟁의 심각성에 관한 기사를 냈다. 끝내 이 다툼은 재판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그해 삼일절을 맞아 동지회와 교민단은 각각 삼일절 기념식을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동지회는 3월 1일 오전 10시에 호놀룰루 알나 극장에서 800명이 모였는데 김광재가 사회를 맡아 삼일절 기념식을 열었다. 이승만 박사가 시국에 관하여 연설하였고, 김유실 부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김윤배와 이상호가 연설하였고, 그들의 부인과 구제회원과 신흥국어학교 학생이 각각 창가를 불렀다. 이와는 달리 그날 오후 1시에는 700명이 모여 교민단 주최로 와이키키 공원에서 삼일절 행사를 했다. 유명옥의 사회로 천도교 총리원을 호놀룰루에 세운 승용환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미국 감리교 학생들이 창가를 불렀으며, 홍한식 목사가 연설하였다. 

그런데 와히아와에서도 삼일절 기념행사가 있었다. 와히아와 지방에서는 호놀룰루와는 다르게 감리교회와 김광재가 소속한 기독교회가 연합하여 기독교회 예배당에서 공동회 회장 오 운의 사회로 삼일절 행사를 개최되었다. 강영각이 영어로 취지를 설명하였고, 안창호 목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박동환 목사와 안창호 목사가 연설하였고, 최창덕 목사가 기도하였으며, 두 교회 여학생이 함께 창가를 불렀다.

만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충돌은 오래된 일이었다. 1931년 7월에 중국 지린성 창춘현 완바오산 싼싱바오에 있는 만보산 지역에서 중국인 농민과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사이에서 수로 문제가 발단되어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그해 11월에 동지회 중앙부 이사회는 선전 사무 집행위원으로 김광재 외에 안현경과 이원순과 양유찬을 선정하였다. 그들이 그달 18일 오후 2시에 와이키키 공원에서 공동회를 소집하였다. 305명이 모인 가운데 김광재의 사회로 김이제 목사가 기도한 후 송필만이 ‘왜놈의 만몽 정책’이란 제목으로 연설하였고, 박상하가 ‘왜놈의 400년 대륙 정책’이라는 제하로 연설하였으며, 총재 이승만이 중일 관계에 대하여 우리의 태도는 국제 연맹이나 열국과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높이 주장하였다. 이 만보산 사건에 관한 진행 방법과 선전 사무와 그 외에 재정책까지 집행위원 네 명이 맡았다. 유혈 사태로 이어진 만보산 사건은 918사변으로도 불리는 만주 사변을 촉발하였고, 일제는 만주를 병참기지로 만들고 이듬해 만주국을 수립했다. 

100달러를 내걸고 현상 논문 모집이 1934년 2월에 있었다. 논문 제목은 ’전운이 임박하여지는 동양의 시국을 당면하여 재미, 포, 묵, 큐 한인 통일의 필요와 그 방책을 논함‘이었다. 5천 자 이상 국한문 또는 순 국문으로 쓸 수 있었고, 제목 발표 후 4개월간 모집하였다. 1등과 2등과 3등은 각각 한 명이었고, 4등은 5명이었다. 상금은 1등 35달러, 2등 25달러, 3등 15달러 그리고 4등 5달러였다. 심사위원이 5명이었는데 태평양주보사의 김광재 외에도 신한민보사 백일규, 국민보사 김현구, 미시간대학 김광운 등이었다. 문체와 조리를 보되 언론이 실제와 이론에 합하여 실행할 가능성이 있어야 했다. 광고 기사에는 ’현상자가 누구신고? 아시지 못해서 궁금하실 분이 있을 듯합니다. 그이는 숨어있는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어떠하든지 논문만 잘 지으시오‘라고 쓰기를 부추겼다.

1940년에 김광재는 한인기독교회 이사원이었다. 그는 선교부 서기로 재직했고, 선교부 재무는 이원순이었다. 

한인기독교회보는 오랫동안 중단되었다가 그해 7월에 복간되었고, 김광재는 한인기독교회보 발행인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장 붕 목사가 주필 겸 편집인이었다. 총 27쪽이었는데 표지 1쪽, 목차 1쪽, 본문 24쪽, 사고 1쪽 등으로 나눴다. 한인기독교회보는 월간으로 구독료가 1권에 10전(센트)이었고, 6개월 선금이 55센트였으며, 1년 선금은 1원(달러)이었다. 본사에 관한 일절 통신은 선교부 서기 김광재가 맡았고, 교부 대금은 선교부 재무 이원순에게로 하였다. 태평양주보사에서 인쇄하였고, 발행소는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에 있는 한인기독교 교보사였다. 위의 주소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가 위치한 곳이었다.

그해 8월 20일에 발간한 한인기독교회보에 ‘특별사고’라는 제하에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가 적혀있었다. 1. 본 교보를 발간한 후에 구람하실 만한 형매(형제자매)께 허락 없이 먼저 보냈습니다. 2. 만일에 교보를 구람하실 마음이 없으면 1센트 우표를 붙여 도로 보내주시오. 3. 구람하기 원하시는 형매께서는 교보 대금을 곧 보내주시면 승낙하신 줄로 알겠습니다. 4. 또 누구시던지 구람하시기를 원하시면 기별하여 주시옵소서. 5. 7월호는 다 팔려서 절호가 되므로 청구하셔도 못 보내겠습니다. 

그달에 발간한 한인기독교회보 대금영수란에는 아래의 구람 지역과 구람자가 적혀있다. 가파호 지역에 양의성 55센트, 박춘엽 55센트, 호항 지역에 최성대 1달러, 차신호 1달러, 박복광 1달러, 민찬호 1달러, 염득순 1달러, 이계선 1달러, 장왈형 60센트, 마위 지역 김완신 1달러. 위에서 지적한 대로 6개월 선대금은 55센트였고, 1년 선대금은 1달러였다. 주필 겸 편집인이었던 장 붕 목사가 교인 100명이 10부씩 구매해서 1천 부를 판매하자고 하였는데 거기에 거의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1940년 7월호와 8월호가 간행되었을 뿐 이후에는 간행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광재는 1962년 9월 5일에 향년 87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누아누 기념 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damien.sohn@gmail.com

 

10.19.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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