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대동고아원 (신한민보,1911년 7월5일)
김찬일은 1879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순안’에서 거주하던 그가 하와이 노동 이민선 시베리아 선박을 타고 24세가 되던 1903년에 단신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로마자 알파벳으로 자신의 이름을 Chan Il Kim 또는 Chan Eil Kim으로 썼다.
그런데 하와이에 내리지 않고 하와이를 거쳐 김찬일은 그 해 샌프란시스코(상항)에 도착하였다. 그해 9월에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이대위, 박성겸, 김성무, 박영순, 장 경, 김병모, 전동삼, 박승지와 함께 김찬일이 환란 상부를 목적으로 미주 최초의 한인 단체인 친목회를 조직하였고, 친목회를 중심으로 호텔 로비에서 예배를 드렸다.
위의 친목회 예배가 미국 북감리교 감리사 H.B. 존스 목사에 의해 50여 명이 모여 1905년 7월에 상항 한인 감리교회로 조직되었다. 문경호와 방화중이 차례로 전도사로 부임하였을 때 김찬일도 이 교회에 출석했다. 미국 북감리교회가 선교 정책을 조정하면서 잠깐 중단되었다가 미국 남감리교회가 전 내한 선교사였던 C.F. 리드 목사를 파송하여 양주삼을 중심으로 30여 명이 모여 1906년 12월에 상항 한인감리교회를 다시 설립하였다. 그때도 김찬일은 이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4월에 친목회를 확장하여 환란 상부에 더하여 동족 상애와 항일 운동을 목적으로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공립협회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김찬일이 1904년 2월에 친목회를 떠났다가 1905년 12월에 공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이듬해 3월에 공립협회 상항 지방회 응접위원 강영설이 사면함에 따라 김찬일이 응접위원으로 피선되었다가 그해 10월에 유성숙과 함께 구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김찬일은 1908년 5월에 상항에서 북동쪽으로 90마일 떨어진 삭도 공립병원에서 별세한 정한소의 장례비 얼마를 기부하였고, 그해 8월에 상항에서 남쪽으로 약 190마일 떨어진 중가주 프레스노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입원비가 부족하여 그 지방 김원택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돌아간 조명열을 위하여 병원비 1원을 후원하였다. 그해 11월에 대동 고아원에 5원 이상 후원하기로 하였다. 평북 선천에 설립된 대동 고아원의 주무원은 미주에서는 이병준, 김밀니사, 장성산이었고, 한국에서는 양전백과 최관흘 선교사였다.
삭도 한인 감리교회 예배 인도자
김찬일은 1910년에 상항에서 세크라멘토(삭도)로 이주했다. 그는 삭도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본 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 교회는 1907년 6월에 양주삼 순회 전도사가 삭도 공립관의 한 방에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면서 조직되었다. 그래서 구역 순회 전도사가 방문하지 않았을 때 김찬일이 예배를 인도하고 교인을 심방하였을 것이다.
1912년 2월에 김찬일은 북가주 아일론에서 한인 노동자 약 70명을 채용하여 아스파라가스 농장을 주선하였고, 그해 8월에 김윤택과 함께 삭도 인근에서 홉 농장을 주선했다. 그해 9월에 김찬일은 신한민보에 기부하였고, 그해 10월에 대한인 국민회 삭도 지방회 유지를 위하여 후원하였으며, 이듬해 2월에는 국민 의무금을 냈다.
1914년에 황사용이 삭도 구역 순회 목사로 파송되었으나 그가 방문하지 않았거나 이응목 전도사가 출타했을 때는 김찬일 권사가 예배를 인도하였을 것이다. 그해 6월에 그는 대한인 국민회 삭도 지방회 경찰원으로 활동하였다.
상항 옥 스트리트 1053번지에 있던 상항 한인 감리교회에서 1915년 6월 26일 토요일에 제1차 한인교회 지방 연회가 개최되었다. 김찬일은 삭도 한인 감리교회 대표로서 이응목과 함께 참석하였고, 이들 외에도 지역 교회 대표가 모였다. 이대위 목사가 개회 예배를 간단하게 인도하였고, 토요일 오후에는 기도회로 모여 2시간 동안 기도하였다. 임준기를 서기로 선출하고, 회무에 들어가 먼저 각 지방 교회 보고가 있은 후 북가주 한인 감리교회 사역에 관한 모든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튿날 주일 예배 설교는 임준기가 담당하였고, 예배 후 이대위 목사가 성찬식을 인도하였다. 주일 저녁 폐회 예배에서 이대위 목사가 사진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그해 황사용을 북가주 순회 목사로, 이응목과 양주은을 삭도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해 삭도 한인 감리교회에는 28명의 세례 교인과 13명의 학습 교인이 있었다.
삭도 한인 감리교회를 위하여 순회 목사 한 명과 지방 전도사 두 명이 있었으므로 김찬일이 예배를 인도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나 권사로서 활동하였을 것이다. 그해 8월 삭도 한인 감리교회 엡워스 청년회에서 통상회를 열고 임원을 선정하였다. 김찬일이 회장으로 피선되었고, 그 외 선임된 임원은 전도국장 양제현, 인제국장 김계선, 학문국장 김식은, 교제국장 김홍균, 회계국장 이신환 등이었다.
1916년에도 황사용 목사가 순회 선교 목사로 파송되었다. 그해 삭도 한인 감리교회의 세례 교인은 35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19명이었다. 중국 산동 선교사를 역임했던 김영훈 목사가 1917년에 삭도 한인 감리교회로 파송되었고, 그해 출석 교인은 51명이었고, 46명이 학습 교인이었다.
1917년 10월에 상항에 입항한 차이나호에서 백년 가연을 맺을 7명의 사진 신부가 내렸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복 있는 사람의 일이라 서해 하지 중에 바람조차 고요하고 결혼한 낭자의 상륙도 예 없이 쉽게 되었다. 독경대 금보장 같은 예물이라도 하루 안에 준비하여 그달 3일 하오 8시에 모두 한인 예배당에 나아가 ‘부자 되나 가난하나 서로 잊지 않겠소’의 맹서를 교환하고 오렌지 물로... 향기를 뿜는 가운데 골드 링을 끼여 주었는데” 상항 목사 이대위의 주례하에 김찬일씨도 김재신 여사와 결혼하였다.
김영훈 목사가 1918년 10월에도 삭도 한인 감리교회에 파송되었다. 그달에 세례 교인은 70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7명이었으며, 유아세례 교인은 3명이었고, 주일 학교에 25명이 등록하였으며, 지난 한 해 동안 교회를 위해 지출한 금액이 155달러였다.
그해 북가주 윌로스에서 이인선과 이 인의 아내가 별세했다. 그해 9월에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다년 거주하던 김영수가 중가주의 스톡턴과 다뉴브에서 포도를 따다가 윌로스의 이인선 농장에서 일하려고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에 아침을 먹고 자기 숙소로 가는 길에 열차를 달지 않은 기관차에 치여 치명상을 입고 별세하였다. 그래서 김찬일은 그의 장례비를 위하여 여러분과 함께 기부하였다. 두 달 뒤 11월에 윌로스에 거주하던 이 인의 부인이 별세하였다. 김찬일은 전도사 양주은 등 8명과 함께 상주가 되어 윌로스 백인 감리교회에서 커터 목사의 주례로 장례예배를 드리고, 한인 10여 인과 백인 남녀 36명이 모인 가운데 카터 목사가 하관 예배를 인도한 가운데 백인 부인 성가대가 조가를 불렀고, 설교한 후 백인의 개인 묘지에 그녀를 안장했다.
이듬해 3월에 김찬일에게 불행이 다가왔다. 스페인 독감으로 아들 상준이 세상을 떠나 그 비감한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다음 달에 둘째 아들도 세상을 떠나 하늘이 아득한 중 그해 8월에 아들을 낳아 위로받았다.
1920년에 김영훈 목사와 양주은 전도사와 김홍균 전도사가 파송되었고, 그해 10월 세례 교인은 67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5명이었고, 유아세례 교인은 5명이었으며, 주일 학교에 교사가 4명이었고, 주일 학교 학생은 28명이었으며, 엡워스 청년회에 70명이 등록하였다. 그해 교회 비용으로 883.52달러를 지급하였다. 임정구 목사가 1921년에 순회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그해 10월 세례 교인은 63명이었으며, 유아세례 교인은 3명이었고, 주일 학교 교사가 12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은 52명이었으며, 교회 비용으로 지출한 금액은 36달러였고, 기타 목적 헌금은 81달러였다. 1922년에는 따로 지정된 사역자가 없었으므로 김찬일이 예배를 인도하였을 것이다. 그해 교세는 지난 2년보다 열세였다. 세례 교인은 40명이었고, 주일 학교에 3명의 교사와 20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교회를 위한 지출액이 50달러였고, 기타 헌금이 200달러였다.
1923년에 김찬일은 삭도에서 상항을 거쳐 오클랜드로 이주하였다. 그의 권사직은 짧으면 2년간이겠지만 정황상 10여 년간 권사직을 감당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는 교회 사역뿐만 아니라 대한인 국민회에서도 활동하였다. 삭도 지방회에서 두 번이나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법무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삼일절 기념식에서 축사하였고, 매년 국민의무금을 냈다. 그리고 기부도 잊지 않았는데, 1915년 10월에 삭도 지방회 경비를, 이듬해 11월에 상항 청년회가 주선한 원산 학생 보조금을, 1917년 8월에 신한민보 가옥 은행채 보상금 6원을, 1919년에는 적십자회 후원비를, 1922년 2월에 대한인 국민회를 위한 특별의연을 기부하였다.
1923년 초, 삭도에서 상항으로 이주하여 차이나타운에서 몇 개월간 이발소를 연 김찬일은 그해 7월에 상항 인근 오클랜드로 이주하여 임석현의 이발소를 인수하였고, 오클랜드 한인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임정구 목사가 1917년부터 오클랜드를 포함하여 맨티카와 스탁톤 지역의 순회 선교 목사로 파송되었고, 김찬일이 나성으로 이주하던 1927년까지 본 교회를 섬겼다. 오클랜드 한인 감리교회 교인수는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와 스탁톤 한인감리교회가 합하여 보고되었는데 세례 교인은 1923년에 80명, 1924년에 134명, 1925년에 80명이었다.
오클랜드에 온 지 2년이 되던 때 김찬일이 이스트베이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하였고, 수술한 지 2년 후 “이발소를 헐값으로 사시오”라는 광고를 낸 후 전형균에게 매매하고 그해 6월에 로스엔젤레스(나성)로 이주했다. 1920년 말 나성에 거주하는 한인은 찹수이 도매업과 동서양 식당을 하는 자도 있었으나 주로 식물상점과 과채업을 운영하였는데, 김찬일은 과채업을 시작했다. 그가 나성 한인 감리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이나 확인할 길은 없다.
권사로 사역하던 삭도에서 지인이었던 이 인이 1928년 4월에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소년 서회 문예구락부에서 1914년 봄에 국문 풍월 글제를 걸었는데 글제는 ‘꽃’이었고 운사자는 ‘고도노’였다. 김찬일 등 31명이 제출하였는데 아깝게도 김찬일은 등수에 들지 못했으나 이 인의 글이 신한민보에 소개되었다: 북은입순반열고 능히나뷔불으니 소래업시우셔도 네마음을뉘아노. 김찬일은 김배혁과 함께 사업상 시간이 없었을 텐데 장례비를 거둬 이 인의 장례식을 유감없이 치렀다. 5원을 부조한 ‘친구’가 김찬일이 아닌가 싶다.
이듬해 1월에 김찬일은 자동차 사고를 당했으나 경상이어서 다행이었는데, 그해 7월에 나성 국어학교 기숙사에 김찬일이 5원을 기부했고, 이듬해 4월에 나성 지방 한인 동지회가 주최한 내지 학생 독립 시위 운동 후원을 위하여 5원을 기부했다.
김찬일은 1935년 2월에 5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에버그린 공원묘지에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44개의 화환이 둘러선 가운데 20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찾아 온 친구들의 눈물로 장례예배를 마친 후 에버그린 공원묘지에 영원히 잠들었다. 그가 두고 간 젊은 부인과 두 자녀의 슬퍼하는 모습은 참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아들 김태준이 모 신문사에 응모한 그림이 3등에 입선하였고, 수 주 후에는 1등에 당선되어 아버지를 먼저 보낸 가족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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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