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고창덕(古昌德)은 1871년 7월 28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1905년에 청운의 꿈을 꾸고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주하면서 그는 고호세(Jose Coh)로 통했다. 노동 기간이 끝나던 1908년 10월에 메리다에서 한인 전도회가 조직되고 성경 공부와 예배를 시작할 때 고창덕이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대한인 국민회가 파송한 황사용과 방화중이 방문하여 100여 명이 모여 한인교회를 세울 때 고창덕이 본 교회 개척 멤버였을 것이다. 그해에 조직된 대한인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에도 그가 가입하였다. 맛단사스 한인교회 연보 집사 고창덕은 동포와 함께 1921년 3월에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향했다. 마나티 지방을 거쳐 5월 말에 맛단사스에 정착한 그는 100여 명과 함께 주일마다 모여 예배를 드렸다. 대한인 국민회 쿠바 맛단사스 지방회가 지방회장 서문경의 사회로 1921년 11월 23일에 내년도 임원을 선정하였다. 고창덕은 부회장으로 선임될 정도로 그 지방회에서 그의 위치는 중요했다. 그 외 임원으로는 회장 차희관, 총무 김봉희, 서기 김억석, 재무 호근덕, 학무 인보천, 법무 이윤근, 구제원 박상오, 대의원 김덕순과 김억석, 사찰 홍익삼과 장호준이었다. 그날 1921년 7월부터 10월 말까지의 재정 결산이 보고되었다. 수입은 총 349.96원이었고, 지출 총액은 427.93원이어서 부족금이 77.97원이었다. 이듬해 3월 1일에 쿠바 맛단사스에서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다. 애국가 합창으로 개회한 후 고창덕이 기도하였다. 그 후 창가, 식사, 선언서 낭독, 국기 경례식, 국기 창가, 헌법 낭독, 경축가, 축사, 창가, 연설, 창가가 이어졌고, 만세로 기념식을 마친 후 다과로 친교했다. 고창덕은 1923년 10월에 맛단사스에 거주하던 이흥식의 부인이 소풍 갔다가 병이 났는데 병원비로 1원 50전을 후원하였고, 그해 12월에는 한국에서 수재 당한 자들을 위하여 2원을 보냈으며, 1924년 1월에는 병환으로 고생하는 서문경의 부인을 위해 2원을 기부했다. 고창덕이 1925년 6월에 대한인 국민회에 국민의무금으로 10피소를 냈다. 그와 함께 김봉희 등 9명이 모두 10피소를 낸 것으로 보아 의무금이 10피소였던 것 같다. 의무금은 교육, 실업 진발, 자유와 평등을 주창하고, 조국 광복을 원조하는 데 쓰였다. 그해 12월에 맛단사스 지방 회장 취임식이 있었을 때 고창덕이 사회와 기도 순서를 맡았는데 그가 총무로 소개됐다. 이듬해 고창덕은 한인 자녀를 위한 민성국어학교의 감사원을 맡았다. 1929년 7월 28일에 고창덕은 회갑을 맞았다. 그의 회갑 잔치에 참석한 일반 친우에게 자신을 맛단사스 한인교회 ‘연보 집사’로 소개하면서 감사하는 글을 1930년 1월 16일에 신한민보에 게재했다. 술 등 선물 내용이 이색적이다. 박창운이 안경 1개, 술 한 병, 버선 한 켤레, 서문경이 음식 전부와 의복 한 습, 이세창이 연초 1통, 차희관이 상의 1개, 방경일이 술 한 병, 이우식이 술 한 병, 한명학이 술 한 병, 이흥식이 술 한 병, 김봉희가 돈 50전, 김석봉이 수박 한 개. 그런데 당시에 기록하여 보냈다는 메모는 신한민보사에 도착이 되지 않았고, 12월 31일에 재차 기록하여 보낸 메모가 도착하여 “만시지탄이 없지않았으나 이에 소개한즉 독자는 용량하시압”이라고 신한민보사 편집실에서 기사에 덧붙여 고창덕의 늦장 부림이 아님을 밝혔다. 맛단사스 한인 감리교회 총무 집사 맛단사스에서 예배를 드린 지 8년이 되던 1929년에 미국 북감리교회가 쿠바 동양 연회를 조직하였다. 그해 10월 23일 수요일 오후 3시에 쿠바 동양 연회는 프로르 S. 레이나 목사를 한인 교회로 파송하여 한인 감리교회를 조직했다. 레이나 목사는 장영기를 목사로 안수하였고, 고창덕 외 방경일, 이우식, 차희관, 고창덕, 태덕일, 호근덕을 집사로 선임했다. 최초 쿠바 한인교회 7명의 집사는 세계 최초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를 연상케 한다. 고창덕의 집사직은 회갑에 이어 두 번째 축복이었다. 그날 등록한 교인은 53명이었고, 25명으로 주일 학교를 조직했다. 맛단사스 한인 감리교회는 그해 11월 8일에 교회 역사와 교회 조직에 관하여 신한민보에 아래와 같이 게재하였는데 게재된 그대로 옮겨 ‘아래 하 자’를 제외한 당시의 평안도 글투로 읽어 본다. “구주 강생 일천 구백 이십 구년 십일월 팔일 큐바 맛단사쓰 디방에 거류하난 대한인 예수 교인 일동은 각처에 거류하시는 일반 형뎨자매에게 근고하나이다. 임이 아시난 바와 갓치 현금 이 나라에서 손노릇하난 우리 한인 수백 명은 일천 구백 오년에 죠국을 리별하고 일척 삼십인이 묵셔가 유카탄으로 이민한 지 사년 후에 미주로서 황사용과 방화즁 양씨가 왕림하시와 교회와 사회를 조직하엿슴니다. 그 시 예수 교회 신쟈가 백여 명에 달하여 매우 자미잇셨슴니다. 그러나 시세가 변천됨을 따라 일반 동포의 생활란이 극도에 달한 거로 행여나 살 길을 차즐가하고 일천 구백 이십일년 삼월경에 우리 남녀 동포 이백여 인이 다시 뎨이 고향인 멕스코를 떠나 큐바로 이거하게 되야 동년 사월 초순에 마나티 지방에 도착하야 있다가 또다시 오월 죵에 맛단사스 지방으로 옴겨 온 후에 교회를 창설하고 지금까지 계속 유지하여옵니다. 그러나 이 나라 형편이 또한 각색 직업과 로동이 곤란함을 따라 일반 교우들의 물질력이 박약한 관계상 교회 발젼이 못됨을 항상 유감으로 알던 바 맛참 우리 본국에 가서 십여 년 동안 전도 사업에 죵사하시던 미국인 미스 벨 독가란 부인이 큐바에 젼도 사명을 띠고 왓다가 우리 한인 교회가 잇다는 말을 듯고 차져 와서 우리 일반 동포와 피차 교셥상 경애함과 친절함이 우금 륙년 동안에 교회 일에 대하야 서로 의논하게 되엿슴니다. 그이의 주션으로 말미아마 우리 교회 목사까지 선택하야 이 나라 교회에서 각처 교회 목사와 여러 장로들과 거 십월 이십삼일 수요일 하오 삼시에 집회하여 미국 감독이 목사 장영기씨에게 안수례를 거행하고 교회 집사 七인까지 선택하엿슴니다. 그러나 이 사졍을 즉시 일반에게 소개하지 못한 리유는 범사가 곤란한 교회에서 모든 것을 의론하야 실행하기 때문에 이와 갓치 천추되엿슴니다. 본 교회 젼후 력사는 후일 다시 공포하고져 함으로 아직 이만치 기록하야 신한민보에 긔재하여 일반 내의 교우들의계 경고하는 바 모든 형뎨자매께서 본 교회를 위하야 기도 만히 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본 교회 목사와 직원의 씨 명은 여하합니다. 목사: 장영긔, 집사: 방경일, 리우식, 차희관, 고창덕, 태덕일, 호근덕. 쿠바 맛단사스 대한인 민성 국어학교는 1930년 7월에 남녀 학도들이 시험을 치르고 난 뒤 매우 취미 있는 순서가 있었다. ‘무궁화가’를 부르고, 국기와 민기에 경례한 후 본 지방 교회 집사 고창덕이 기도하였다. ‘한반도’를 부른 후 갑, 을, 병, 정 등 4반의 1등과 2등에게 진급 증서와 선물 분배에 이어 학도 일동이 ‘부모의 은덕가’를 부른 후 학생들이 연설하였다. 갑반에서 1등 한 여학생 박선녀의 연설을 아래에 소개한다: ”지금 우리가 할 연설 문제는 ‘국가 사상과 동포의 애정’이라는 문제올시다. 그러나 나는 먼저 할 말은 ‘나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먼저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곧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을 순종하고 형제를 우애하며 일가의 화목을 하며, 동족을 사랑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려면 또한 마음을 잘 먹고 잘 배우기를 힘쓰고 거짓말 아니하고, 같은 동무끼리 욕도 아니하고, 동무끼리 서로 사랑하기로 작정인데 제일 먼저 많이 잘 배워서 나보다 모르는 아이를 잘 가르쳐 주기로 작정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많더라도 배우지 못하고는 아무리 하려 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일반 학도들은 힘써 배워서 우리나라 독립 찾아 우리나라 한국기를 세계에 날리며, 국기 밑에서 만세를 부르며, 영원토록 살기를 바랍니다.“ 1935년 말에 망년회로 모여 송구영신을 의미 있게 맞았다. 기름진 큰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남녀노소 동포 116명이 모여 저녁을 먹은 후 임천택의 사회로 ‘무궁화가’를 합창하고, 국기와 민기 경례식으로 막 열려, 지방회장 이세창의 취지 설명 후 2분간 묵도하고, 조덕중과 박창운의 송구영신 감상담이 있고 나서 고창덕 등이 광복 사업에 대하여 연설하였고, 만세삼창으로 폐회하고, 춤과 식사로 친교하였다. 1936년 이전부터 고창덕은 총무 집사로 쿠바 맛단사스 한인 감리교회를 섬겼다. 그해 12월에 7, 8 주간 병으로 고생했을 때 이우식, 이승택, 태덕일, 임천택 등뿐만 아니라 서문경 부인, 박창운 부인, 임병일 부인, 호근덕 부인 등 부인들도 음식과 과일을 제공했고 간호하였으므로 그들의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대한인 국민회 맛단사스 지방회 청년부가 창립 1주년을 맞아 1937년 3월 10일 저녁 7시에 총장 이승택의 사회로 기념회를 열었다. 이날 고창덕은 박두헌과 함께 축사 순서를 맡았다. 이날 남녀 학생들은 ‘삼천리 강산가’와 ‘조선 청년의 노래’를 합창했다. 1939년 구주 성탄 축하식에 연극이 특별났다. 김보배 등 10여 명의 등장으로 성극을 출연하여 내외국인 청중의 흥미를 돋았다. 이들 2세 소녀들이 빛이 곱고 맵시 있는 한국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와서 원형으로 돌면서 애국가를 합창하고 대한 만세를 부르는 가운데 휘장이 내릴 때 박수갈채가 장내를 진동하였다. 청중의 요구에 재차 나와서 ‘애국가’와 ‘만세’를 부르니 다시 장내에서 한국 부활의 기상이 자못 힘 있게 나타났다. 성탄 축하식을 위하여 고창덕은 최고 기부액인 3원을 후원했다. 1940년과 1941년에 고창덕이 대한인 국민회 맛단사스 지방회 대표원으로 활동하면서 1940년 6월에는 광복군 후원금으로, 그해 7월에는 내지 한재 의연금으로, 그해 9월에 서문경의 병원비와 이현순의 첫돌 기념비로, 1941년 1월에 광복군 후원금으로, 그해 2월에 이세창의 병원비로, 그해 11월에는 카르데나스 동포 구제금으로 고창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을 나누어 후원했다. 맛단사스 한인 감리교회가 세워진 지 20년이 되던 1941년에도 고창덕은 이우식과 호근덕과 함께 집사로 재직했고, 전도사는 양춘명이었다. 교인은 남녀를 아울러 20여 명이었고, 임경옥과 박선녀 등은 신진 인물이었다. 순국 선열 기념식이 맛단사스 지방회의 주도로 1944년 11월 17일에 있었다. 아침부터 지방 회관에 반기를 달아 조례를 표했고, 오후 6시에 대한 여자애국단 맛단사스 지부 단원과 국민회 지방 회원이 모여 기념식을 가졌다. ‘애국가’ 합창에 이어 국기에 경례, 식사, 선열 역사 보고, ‘추도가’ 합창, 헌화, 묵상이 순서대로 있었고, 고창덕 등 4명이 기념사를 담당하였으며, 구호와 만세로 마쳤다. 1944년 12월 24일 성탄절 이브에 성탄 예배를 드린 후 총무 집사 고창덕 등은 기부하신 동포에게 감사를 표했다. 기부한 명단에서 당시 교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고창덕이 7원 40전으로 제일 많았고, 적게는 30전이었다. 그 외에 기부자는 박창운, 김덕서, 권달수, 이우식, 호근덕, 이새창, 김흥서, 주한옥, 임병일, 현미숙, 박선녀, 임천택, 차희관, 이승준, 차용섭, 기한묵, 김명구, 동모친, 류혜경이었다. 고창덕의 마지막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연보 집사와 총무 집사로서 교회를 섬겼고, 때마다 최고의 금액으로 헌금했다. 그리고 대한인 국민회 맛단사스 지방회에서 부회장, 학무원, 대표원 등을 맡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후원하였다. 고창덕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damien.sohn@gmail.com 08.24.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