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허 섭(1881-?)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허 섭은 1881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후 23세가 되던 1904년에 두 살 적은 아내와 한 살 된 딸과 56세의 어머니와 함께 하와이 노동 이민선에 올랐다. 그해 2월에 그는 가족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로마 알파벳으로 Hur Surp으로 그의 이름을 표기했다가 S. Hur로 소개했다.

하와이 노동 이민을 마치고 1908년 11월에 허 섭은 가족과 함께 미국 북가주 새크라멘토(삭도)로 이주했다. 윤경학과 함께 그는 이관일이 운영하던 한인 여관을 사서 영업하였다.

 

마운틴뷰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 겸 권사

 

허 섭은 가족과 함께 삭도에서 북가주 마운틴뷰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노동하였다. 1911년 9월에 허 섭 부인의 병환이 중한 가운데 이성민의 한인 여관에서 체류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인근 산호제 사립병원에서 치료 중 의약의 효험이 없어 향년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일 적에 불행 신사라 하니 만 리의 고혼 됨도 비창하거니와 어린아이들의 정경이 측은하다더라"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그해 10월에 모친과 어린아이들이 있어서 심히 어려운 중에 이성민이 그 상황을 불쌍히 여겨 아이 하나를 양자로 삼기로 하고 4, 5인 한인 동포 앞에서 서로 맹세한 후 이성민이 아이를 데려갔다.

1911년 12월에 마운틴뷰에서 동남쪽으로 3마일 떨어진 써니빌에서 김원섭이 125에이커의 도마도 농장을 시작하면서 에이커당 27달러로 빌려 300여 달러를 땅 주인에게 주고 나머지 3,000여 달러를 수확 후에 주기로 하였다. 이 거액을 그가 혼자서 담당할 수 없어서 10여 명의 한인 동포와 동업하였는데 허 섭도 이창호, 김성일, 정국신, 정국서, 임선봉, 이정규, 양국환, 박준화, 박춘근, 한치장과 함께 동업하였다. 

허 섭이 1914년에도 써니빌에서 농사하였다. 그해 2월에 가족이 있는 마운틴뷰에 갔다가 써니빌로 되돌아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중상당하는 등 아내 잃고 고된 노동에도 그해 8월에 구연성이 써니빌을 두고 읊은 시에 그가 감동하였을 것이다: “고은얼굴숙이고 아침이슬찬나봐 슈풀밑에숨어도 향내조차그길로.”

상항 한인 감리교회에서 1915년 6월 26일 토요일에 미국 남감리교 태평양 연회 산하 동양인 선교부는 제1차 한인교회 지방 연회를 개최하였다. 마운틴뷰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이자 권사인 허 섭은 같은 교회 평신도 대표이자 권사였던 김원섭과 함께 참석했다. 그들 이외에도 황사용 전도사,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성원, 삭도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찬일과 이응목, 상항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황사선과 강영승, 오클랜드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필권과 임준기가 참석한 가운데 항구 선교사 이대위 목사가 개회 예배를 간단하게 인도한 후 회무에 들어갔다. 북가주 한인 감리교회 사역에 관한 보고가 있고 난 뒤 제반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리고 이대위는 지방 집사 목사로 안수받게 되었고, 오클랜드 한인 감리교회 전도사 임준기, 삭도 한인 감리교회 전도사 이응목과 양주은, 상항 한인 감리교회 전도사 황사선에게 전도사 기간을 연장하였고,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에 순회 전도사를 파송하기로 하였다. 

새크라멘토, 스탁톤 그리고 오클랜드의 순회 전도사였던 황사선이 1915년 한인교회 지방 연회 이후 마운틴뷰도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가 마운틴뷰 한인 감리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을 때는 권사였던 허 섭이 동표 권사 김원섭과 나누어 예배를 인도하였을 것이다. 그해 마운틴뷰 한인 감리교회의 교세는 세례 교인이 6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7명이었다. 순회 전도사였던 황사용의 1916년 보고에 새크라멘토, 스탁톤, 맨티카, 오클랜드 그리고 매리스빌에 있던 한인 감리교회에 대한 통계는 있어도 마운틴뷰 한인 감리교회 통계가 없어서 그해 마운틴뷰 한인감리교회가 문을 닫은 것 같다.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허 섭은 1916년을 전후하여 마운틴뷰에서 맨티카로 이주하였다. 그와 가족은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에 등록하였다. 그해 황사용이 순회 전도사로서 맨티카뿐 아니라 새크라멘토, 스탁톤, 오클랜드 그리고 매리스빌을 순회 방문하면서 예배를 인도하였고, 전도하였다. 그해 스탁톤과 맨티카는 한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므로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통계와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 통계가 합쳐서 보고되었는데, 그해 세례 교인은 16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11명이었다.

그해 8월에 맨티카 노동 주선인이었던 조동호가 3,550달러를 갈취하여 몰래 도망하였는데, 그가 갈취한 돈은 한국인 30명의 공금과 필리핀인 2명의 공금과 여러 한국인에게서 빌린 돈도 포함되었다. 허 섭이 그에게 60달러를 빌려주었고, 그 외 빌려준 자는 강원서, 안중권, 손기보도 있었다. 도망친 조동호가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에 출석하였을까? 허 섭외에 조동호에게 돈을 빌려준 강원서, 안중권, 손기보도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이다.

그달 29일에 국치기념일을 지켰다. 일동이 ‘무궁화가’를 부른 후 최능익이 기도하였고, 전폴린이 ‘정신가’를 불렀으며, 순회 전도사였던 황사용이 연설하였다. 허 섭의 딸 허순복이 ‘대한국의 용병, 나가자’를 부른 후 누군가 연설하였고, 한영대와 김승헌이 음악을 하였으며, 3명이 이야기를 한 후 마쳤다. ‘대한국의 용병, 나가자’를 부를 때 도적을 꾸짖으며 손을 들고 대병을 지휘하는 모습을 취한 허순복에게 만당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모였다. 다시 음조를 바꾸어 조국의 참상을 노래하여 반도 한국의 원통히 흐르는 피를 그려내면서 허순복이 하염없이 흘린 눈물이 옷깃을 적시었고, 목이 메여 노래를 마치지 못하였다. 50여 명 청중은 허순복의 노래에 흔들렸다. 대군의 뒤를 따를 생각이 물결일 듯하다가 참상을 그려놓아 일어나는 가련한 동포의 신음하는 정상이 완연히 눈에 보이는 듯하여 분하고, 아픔을 금치 못하여 일시에 눈물을 뿌렸고, 사람마다 분연히 일어나 무엇이든지 조국을 위하여 예비하기로 작정하였다. 청중은 탄식하면서 14세 된 어린아이가 조국 강산을 구경도 못 하였는데, 조국의 비운을 슬퍼하여 저같이 눈물을 뿌리거늘 우리는 항일 활동을 점점 쉬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모인 자들은 허 섭에게 이 아이를 잘 가르쳐 우리나라 태산북두가 되게 하면 진실로 적지 않은 공덕이라 하였다.

1917년 2월에 허 섭은 맨티카에서 우체국 사서함 177호를 열고 여관을 운영했다. 그는 그달에 다음과 같이 광고했다: “맨티카라면 일 많은 곳인 줄 아시오리다. 본인이 이곳에서 여관 하는 줄도 아시오리다. 올해에는 사탕 회사도 한층 확장하고 여관 사업도 규모를 늘려서 무이 밭일은 물론 사철 계속이오. ... 포도밭도 6, 7에이커를 계약하였사오니 일하시기 원하시는 동포는 어디로 갈고 방황하지 마시고, 이곳으로 찾아오시옵소서.” 이러한 광고를 3월에도 냈다. 

그해 여름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의 교세는 세례 교인 54명에 학습 교인은 11명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임정구가 순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맨티카뿐 아니라 오클랜드와 스탁톤을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전도하였다.

그해 10월에 허 섭은 신한민보 가옥채 보상금 제9회 발기자로서 6달러를 기부했다. 다음 달에 맨티카 지방회가 내년도 임원을 선정하였는데 임원은 대부분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허 섭은 부회장에 선임되었고, 그 외 임원은 회장 김필권, 서기 김계선, 총무 한치홍, 재무 김계선, 학무원 조문해, 법무원 방영관, 구제원 김성일, 대의원 김원택 그리고 실업부원 한상호였다.

1918년 3월에 발표된 맨티카 지방회 실업 조사에 따르면 한인들이 단독으로나 동업으로 821에이커 무이농장을 경작하였는데 허 섭은 320에이커의 농장을 단독으로 경작하였다. 농장 외에 맨티카 호텔 내 서양 식당이나 세탁업을 하는 자도 있었다. 그해 11월에 신한민보 기계채정장 의연으로 제32회 동맹자에 가입하여 허 섭이 5원을 기부했다. 

1918년 여름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는 세례 교인이 56명이었고, 학습 교인이 5명이어서 작년보다 세례 교인이 5명 늘었고, 학습 교인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임정구 순회 전도사가 관리하는 오클랜드와 스탁톤에 있던 한인 감리교회보다 세례 교인은 다섯 배 이상 많았다. 작년에 이어 임정구 순회 전도사가 맨티카를 비롯하여 오클랜드와 스탁톤을 순회 전도하도록 파송 받았다. 그해 8월에 맨티카 교회 재무 김원택이 보고한 바로 허 섭은 맨티카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10원 50전을 헌금했다. 그해 5월에 허 섭은 국민의무금으로 5원을 냈고, 이듬해 5월에 독립 특별 의연으로 10원을 냈으며, 이듬해 8월에 국민회에 의무금 5원을 냈고, 다음 달에 독립 의연으로 20원을 기부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의무금을 또 냈다. 

맨티카 한인 감리교회는 1919년 여름에 세례 교인 30명에 학습 교인 2명이어서 지난 2년 동안 가장 열세였다.

 

다뉴바 한인 장로교회

 

1920년에 허 섭은 가족과 함께 다뉴바로 이동했고, 다뉴바 한인 장로교회에 등록했다. 그해 그 교회는 기도처에서 조직 교회가 되었다. 간도 참상 구제금으로 10달러를 기부한 다음 달인 1920년 5월에 허 섭의 모친이 향년 6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내에 이어 모친을 하나님께 보내드린 허 섭은 모친의 장례 예배에 참여한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말씀을 신한민보에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는데 그의 크리스천 됨을 본다: “헛되고, 헛되고, 다시 헛된 이 세상에 처하여 있는 인생은 공연히 번거로움이 많아 양심을 흔드는 중 겸하여 천태만상으로 변함이 많습니다. 어떠한 때에는 희락도 생기고, 어떠한 때에는 비참함도 생깁니다. 희락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이 영광스러우나, 비참함을 받은 자는 마음에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과 아픈 것과 답답한 것뿐입니다. 고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슬픔과 감사함을 아울러 고하옵는 바는 만 리 이역에 외로운 몸으로 의지하고, 믿고, 모시고 지내던 죄생의 모친께서 토혈증으로 불행하게도 이달 초 3일 상오 8시 30분에 단축한 시간으로써 이 세상을 떠나시는 동시에 슬픔과 아픔이 앞을 가려 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으므로 원근간 여러 친구에게 친히 부임치 못하였음을 용서하시며, 따라서 초 3일 하오 3시 행장시에 수고를 생각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외로운 죄상의 가족을 위로하여 주시며, 영화스러운 영광을 돌려주신 수백 명 사랑하시는 동포 전에 감사함을 드리나이다.”  

아내가 소천한 지 11년이 되던 1922년 12월에 허 섭은 멕시코 부인과 재혼한 후 3년이 되던 1925년을 전후하여 캔자스로 이주하였다. 그해 3월 2일 오후 8시에 허 섭의 사택에서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다. 한장호의 사회로 개회하고, 일동 애국가를 제창한 후 허 섭이 기도하였다. 그 후 취지 설명, 김양선 등의 병창, 장병훈의 독립선언서 낭독, 김양선의 독창, 신태림의 축사, 장낙천의 독주가 있었다. 장낙천이 조국의 기근 구제를 위하여 간단하게 설명한 후 모금하였고, 만세 삼창하고 폐회했다. 한장호, 최영익, 장낙천이 종일 준비한 한식을 먹은 후 서양식 댄스와 한국식 소리로 12시까지 즐겼다.

그해 11월에 허 섭이 병을 얻어 의사의 진찰을 받으며 자택에서 치료하다가 입원하였는데 입원한 지 3주나 되어도 차도가 없었다는 신한민보의 보도 이후 그를 찾을 수 없다. 

damien.sohn@gmail.com

07.2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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