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장영환(1863-?)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장영환은 1863년경에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39세가 되던 1902년에 경기도 이천에서 감리교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40세의 장영환은 단신으로 제물포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1903년 12월 7일에 나가사키에서 ‘시베리아호’를 타고 그달 2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장영환은 하와이에 도착한 후 Chang Young Whan 또는 Chang Young W으로 통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장영환은 가와이섬 기알리아 농장으로 이동하였다가 더 나은 노동조건에 따라 같은 섬의 길나위아를 거쳐 마위섬의 스프레클스빌로 이주했다.

데이비드 H. 무어 감독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권사

 

1908년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5일 동안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감독 데이비드 H. 무어 목사의 사회로 미국 북감리교 제3회 하와이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그해 감리사는 존 W. 와드만 목사였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 내에 한국인 목사로는 홍치범, 이지성,신판석, 민찬호, 김영식, 김이제 그리고 김유순이 있었고, 한인 감리교회는 총 28개 교회가 있었으며, 이중 마위섬에는 한인감리교회가 라하이나, 하나, 기파후루, 스프레클스빌과 하마구아포고 등 5곳에 있었다. 

장영환은 1908년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마위섬 스프레클스빌에 있는 한인감리교회의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가 하와이에 이주한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이 연회에서 이 교회의 목사로 홍치범이 파송 받았는데 그는 하마구아포고 한인감리교회까지 담당하는 순회 선교목사였다. 그래서 자연히 장영환의 사역이 많았다. 

장영환이 파송되던 1908년 보고에 따르면 스프레클스빌 한인 감리교회에는 세례교인이 9명, 학습교인이 16명, 유아세례교인이 1명이었고, 주일학교는 두 곳에 있었고, 4명의 교사와 직원이 있었으며 등록 학생은 30명이었는데 평균 출석도 같은 수인 30명이었으며, 주일학교를 통해서 지난 한 해 동안 7명이 개종했다. 상회비로 11달러를 헌금하였는데 내역으로 보면 선교비로 8달러를 헌금하였는데 해외선교부에 3달러, 내지 선교부에 5달러였고, 교육비로 학생보조를 위한 어린이 기금으로 1달러를 헌금했으며, 그 외 부인내지선교회에 1달러 그리고 총회 경비로 1달러를 헌금하였다. 예배당과 사택이 있었는데 이들 건물을 고치는데 280달러를 지출했고, 이들 건물 구매때 융자한 금액 중 50달러를 지불했다.  

1년 후 보고된 스프레클스빌 한인 감리교회의 사역 보고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례교인이 22명이 늘었고, 학습교인이 17명이 늘었고, 유아세례교인이 7명이 늘었고, 주일학교수는 같았지만 교사와 직원이 5명이 늘었으며 등록 학생은 20명이 늘었는데 평균 출석도 10명이 늘었으며, 주일학교를 통해서 지난 한 해 동안 14명이 개종했다. 상회비로 8달러를 더 헌금하였는데 명세로 보면 선교비로 2달러를 더 헌금하였는데 해외선교부에 2달러가 적었고, 내지 선교부에 1달러가 적었지만, 해외선교 주일학교와 내지선교 주일학교에 각각 1달러와 2달러를 새로 헌금하였다. 교육비로 학생보조를 위한 어린이 기금으로 1달러를 더 헌금했으며, 작년에는 하지 않았는데 일반 교육비로 1달러를 새로 헌금하였으며, 그 외 부인내지선교회에 2달러를 더 헌금하였다. 작년에는 하지 않았던 흑인 보조회와 미국 성서공회에 각각 1달러씩 헌금하였다. 예배당과 사택이 있었는데 이들 건물과 건물의 개조를 위하여 지출하지 않았고, 융자 금액을 완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배당은 당시 시가로 750달러였다.  

 

하나 한인감리교회 권사

 

1909년에는 찰스 W. 스미스 박사가 하와이 선교연회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해 3월 3일부터 7일까지 4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그의 사회로 제4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있었다. 그 연회에서 장영환은 마위섬 하나에 있는 한인감리교회의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파송을 받았을 때 본 교회의 명단 자체가 없었고, 연회 중 하나 한인감리교회 목사를 파송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새로 개척할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듬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마위섬 하나 한인감리교회 보고가 없었다. 홍치범이 스프레클스빌과 기파후루뿐만 아니라 하나로도 파송된 것으로 보아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보고에 하나 한인감리교회 보고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1909년의 하와이 선교연회는 장영환을 파송하지 않았고, 그 이후 당분간 그의 이름은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조선에 영웅이 있는가“

 

그런데 장영환의 이름이 신한민보에 나타난다. 하와이섬 학갈라우에 거주하던 장영환은 1932년 5월 12일에 신한민보에 ‘조선에 영웅이 있는가’라는 제하의 아래의 글을 기고하면서 일본 제국으로 부터 탄압받는 조국을 일으킬 을지문득과 이순신 같은 영웅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조국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을 아래의 글로 표현하고자 몸부림치고 있었다. 

“지금 동양 천지에 풍운이 자욱한 이때 영웅이 나올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두어 자로 말하려 한다. 대체 경쟁 시대에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 제도와 사회 조직과 인류 보호가 모두 무력으로 뻗어 나아가는 이때 폭발탄, 비행기, 잠행정[잠수함], 구축함 같은 군용물이 구비하여  소약민족[약소민족]을 마구 무너뜨리는 이때 소약민족[약소민족]의 마음이 어떠할까? 그중에 우리 조선 민족이 더욱 잘못할 학대와 압박하에 있도다. 슬프다. 삼천리강산에 2천3백만 민족 중에 영웅이 나설까 안 나설까 한번 상상하여 볼 것이다. 고구려 시대 을지문덕 같은 영웅이 재생하였으면 어떨까? 임진왜란 시에 이충무공 같은 명장과 김덕량 같은 용장이 부생하였으면 어떠할까? 거북선을 창조하신 이충무공이 다시 탄생한다면 그때 그와 같이 신기하게 보이던 거북선보다 우승한 무엇을 새로 발명하여 지금 사용하는 비행기, 잠행정, 폭발탄 등속을 모조리 휩쓸어 버리고 임진왜란에 왜놈을 소멸하던 장절 쾌절한 일을 다시금 보게 될는지 누가 예언할 수 있는가? 오호라! 동반도 화려강산에 제세 영웅이 있는가? 없는가? 

오늘에는 영웅이 있더라도 그 민중이 합하지 못하면 영웅이라도 속수무책일 것 같다. 아무려면 영웅이 나기만 하면 그 지도하에 민중이 자연 합심 될 것이라 할 듯하며, 민중이 합심 못 되는 것은 영웅이 없는 탓이라고 할 듯하다마는 우리 하와이 한인사회에는 ‘영웅’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저마다 영웅 같아 보이며, 영웅 노릇을 제법 하려고 든다. 민중을 합하기는커녕 민중을 분리하게 시키는 것이 우리 하와이 ‘영웅들’의 사업이다. 이것이 비평 같지만, 사실인데야 어찌하나? 10여 성상 하와이 역사를 돌아보면 배고픈 우리가 1원, 2원, 10원 또는 백 원까지 독립운동을 위하여 냈지마는 남은 것은 교회나 사회에 분열뿐이니 참 한심하다. 중국의 6조5계 시대와 같이 하와이에는 영웅이 많기 때문에 그 백성 그 회원을 그대로 두고 단체 이름 고치는데 맥 빠지고 말았다.

조선에 참 영웅이 있는가? 만주 평야에 풍진이 자욱하고 상해 천지에 폭탄이 굉렬하거늘 영웅이 있다면 초당 춘일에 꿈만 꾸고 있을까? 깊은 바위 구멍에서 낮잠 자고 있을까? 영웅아! 기회가 왔다 나오너라. 조선에 일이 났다. 만주에 전쟁이 계속된다. 우리 독립군이 일어나서 중국 의용병과 연합하여 왜놈과 싸운다. 동시에 백만 명의 재만 동포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 사망선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한다. 미[미국], 포[하와이], 묵[멕시코], 큐[큐바]에 있는 우리는 결사대를 두어 가지고 만주 평야에 가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할망정 우리의 능력을 다하여 국가사업을 응원하는 것이 참 영웅이오, 참 호걸이다. 만일 우리가 다 합심만 하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고 안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영웅 숭배 주의에 두통이 난 자이다. 어제 날에 영웅으로 섬기다가도 오늘에 발길로 툭 차내 버리며, 작년에 영웅 노릇을 제법 하던 이도 금년에 낙오자가 되고 마는 영웅 주의 때문에 우리 독립운동은 오늘과 같이 기회가 좋은 때에도 합력 공작을 할 수 없이 된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지휘하는 대로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야 할 줄 안다. 오호라! 참 영웅이 이때 있는가? 있거든 독립 전선으로 나올지어다. 만주로 갈지어다. 거기에는 문병도 있고, 무기도 있고, 기회도 있도다. 산에 가야만 범을 잡을 수 있고, 바다에 가야만 고래를 잡을 수 있나니라. 밥상머리에 앉아서 발버둥을 치며 집안의 불화를 가끔 빚어내는 어린 영웅들! 중국의 장개석, 장학량, 풍옥상 누구누구 같은 영웅들! 저희끼리는 무섭게 싸우지만, 왜놈 앞에는 찍소리 한 마디 못하는 영웅들! 중국과 조선에는 모두 이런 종류의 영웅뿐이냐! 이런 영웅들은 모두 만주 들에 모아다가 생장이라도 해버리는 것으로 할 것 같다. 오호라! 조선에도 참 영웅이 있는가?”

 

학갈라우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

 

장영환이 위의 글을 기고하기 3개월 전인 1932년 2월에 모인 제27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는 그를 하와이섬의 학갈라우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했다. 학갈라우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파송 받은 자는 이관묵이었는데 파팔노아, 호녹가이지, 힐로, 고나에 있는 4개처 한인감리교회도 목회하는 순회 선교목사였다. 그해 연회록에서 본 교회 교세를 찾을 수 없다.  

1933년에 있었던 제28회 하와이선교연회가 마친 2달 후인 5월 21일 주일 아침에 감리사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와 이관묵 목사가 동반하여 학갈나우 한인감리교회에 순회 방문하였다. 감리사가 이날 주일 아침 예배에서 설교하였고, 예배 후에 성만찬을 베풀었다. 성만찬 후 감리사는 계삭회를 열었다. 장영환은 전도사로 소개되었다. 그 외 직원은 담임 이관묵 목사, 지방 전도사 전세욱, 권사 유춘엽, 주일학교장 겸 속장 이옥산, 유사 김신우, 탁사 최봉탁, 김성만, 황수경 그리고 청년회장 최의선이었다. 이날 유사의 보고에 따르면 잔금이 8달러 20센트였다. 그달 31일 하오 7시 반에 본 예배당에서 김베드로의 사회로 소/중학교 졸업생 축하식이 있었다. 졸업생들에게 화환을 목에 걸어 축하하였고, 졸업식 뒤에 교실에 모여 다과를 나누며 즐겁게 지냈다.

장영환은 1934년과 1935년에 이어 1936년에도 이관묵 순회선교목사를 돕는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가 섬긴 마지막 해였던 1937년의 2월에 보고된 본 교회 교세와 주일학교와 재정은 아래와 같았다. 교세는 학습교인이 36명이었고, 입교교인 26명이었으며, 세례교인은 14명이었다.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2명이었고,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36명이었으며, 엡워스 고등부 학생이 16명이었다. 재정보고에서 교회 지출이 14달러였고, 목사사례비로 30달러를 헌금하였으며, 지역 후원비가 44달러였고, 세계 봉사회에 10달러를 헌금했다.

1937년 이후 그의 이름은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장영환의 선교 사역은 1908년 3월부터 1910년 3월까지와 1932년 3월부터 1937년 2월까지 7년간이었다. 

damien.sohn@gmail.com

06.2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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