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안재덕(1873-1942)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안재덕은 1873년에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심근골(현 남양주)의 죽산 안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자로 安載德이라고 썼는데 安在德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장로교인이 되었다. 그의 동생 안재상이 1903년 1월에 하와이로 건너간 후 그를 뒤따라 안재덕도 하와이 노동 이민을 계획하고 30세가 되던 1903년 3월에 29세 된 아내 윤 씨와 12세 된 딸 연희와 함께 제물포를 거쳐 일본에서 노동 이민선 갤릭을 타고 그달 30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로 간 그는 로마자 알파벳으로 An Chai Duk, Ahn Choi Duk 또는 An Jai Tuk으로 통했다.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

 

호놀룰루에 도착한 직후 안재덕은 아내와 함께 오아후섬 와일누아로 이동하여 그곳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였다. 와일누아에 온 지 3개월이 되던 1903년 11월에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에 등록했다. 아내는 이듬해 1904년 7월에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에서 감리사 조지 피어슨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해 하와이 군도에는 총 14개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다. 가와이섬에 7개 교회, 오아후섬에 5 교회, 마위섬에 2 교회가 있었고, 총 400명의 한인이 등록하였는데 이 중에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가 재적 92명으로 제일 큰 교회였다. 내리감리교회가 파송한 김이제가 1905년에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안재덕은 가족과 함께 같은 섬 와이파후로 이동했다가 같은 섬 목골니아로 다시 이동했다. 

 

공립협회에서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까지

 

1903년 9월에 도산 안창호가 이대위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환란 상부를 목적으로 미주에서 최초 한인 단체인 친목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친목회를 확장하여 환란 상부와 더불어 동족 상애와 항일운동까지 목적하여 1905년 4월에 공립협회가 조직되었다.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이 공립협회 회관이 소실된 가운데 오아후섬 목골니아에서 거주하던 한인 동포가 공립협회 회관이 다시 세위질 수 있도록 기부하였을 때 목골니아 거주 51명과 함께 안재덕이 50센트를 기부하였다. 

1905년 하와이에 8개 군도에서 지형적인 형편으로 항일운동과 동족 상애를 목적으로 공진회와 에와회 등 24개의 한인 단체가 있었다. 1907년 9월에 하와이에 있었던 이들 단체가 합동하여 조국 국권 광복과 재류 동포 안녕 보장과 교육 장려를 목적으로 한인 합성협회를 결성하고, 임정수를 총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임정수는 호놀룰루 리리하 스트리트에 중앙회관을 설치하고, 이미 발간되고 있던 공진회보와 친목회보를 합쳐서 그해 10월에 합성신보를 발행하였다. 하와이에 47개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1,051명이 가입하였고, 회원은 일 년에 2달러 25센트의 예납금이라는 회비를 냈다. 안재덕은 1907년에 오아후섬 목골니아 지방 합성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듬해 안재덕이 거주하던 목골니아에서 살던 최규상이 시국에 대하여 항상 비분강개하는 가운데 그해 9월에 처자를 작별하고 혼자서 상해로 향하였는데 그도 합성협회 목골니아 지방회 회원으로 보인다.

1908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대한제국 외교 고문이었던 친일 미국인 조지 스티븐스를 저격한 의거를 계기로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미주의 공립협회가 1909년 2월에 발전적으로 통합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로서 국민회가 조직되었을 때 안재덕은 국민회 산하 목골니아 지방회에서 활동하였다. 이듬해 5월에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가입하여 대한인 국민회로 탈바꿈하였을 때도 안재덕은 대한인 국민회 산하 목골니아 지방회에 소속되었다. 안재덕이 회원으로 있던 하와이 목골리아 지방회가 하와이 학갈나우 지방회와 함께 1910년 7월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신한민보를 후원하였을 때 3달러를 후원하였다.

하와이 지방총회, 북미 지방총회, 시베리아 지방총회 그리고 만주리아 지방총회의 대표가 1912년 11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교육과 실업을 진발하며, 자유와 평등을 제창하고, 동포의 영예를 증진하며, 조국 독립을 광복함에 목적을 두고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를 설립하고, 초대 총회장으로 도산 안창호를 선임하였을 때 안재덕은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산하 목골니아 지방회에서 활동했다. 

1914년 7월에 대한인 국민회 산하 하와이에 있던 와일누아 지방회, 옥갈나 지방회, 복각기 지방회와 함께 안재덕 등이 회원으로 있는 목골니아 지방회가 신한민보 후원금으로 5달러를 기부하였고, 신한민보는 그달 16일에 ‘감하의연’이라는 제목으로 감사를 표했다.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 권사와 지방전도사

 

1916년 2월 17일부터 21일까지 5일간 제11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열렸다.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는 안재덕을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했다. 그리고 그 연회에서 황계수가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았고, 조연택 목사가 와일누아 지방 순회 전도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조 목사는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는 물론 와일누아에서 북서쪽으로 17마일 떨어진 가후구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와일누아에서 동북쪽으로 3마일 떨어진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하와이선교연회에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의 교세가 따로 보고된 바는 없다. 그러나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와 가후구 한인감리교회의 이름으로 보고된 교세는 있는데 예배당이 3곳에 있었다고 하므로 그중 한 예배당이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으로 보인다. 지난 해에 파송되었던 이관묵 목사가 보고한 교회 교세를 아래에 적는다. 주일학교는 한 곳에만 있었고, 교사와 직원은 6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36명이었다. 엡워스 고등부에 15명이 등록하였다. 세례 교인은 84명, 학습 교인은 9명, 유아세례교인은 13명이었다. 예배당이 3곳에 있었고, 당시 시가는 1,400달러였고, 1년간 연료비가 40달러였다. 

권사 안재덕은 지방전도사 황계수와 함께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를 거의 전적으로 맡아 전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17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서 안재덕의 사역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가 안재덕을 목골리아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나흘 동안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3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모였다. 그달 14일 오전 9시에 감독 애드나 W. 레오나르드 목사가 사회한 가운데 감리사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의 기도에 이어서 감독이 마태복음 26장 36절부터 56절을 본문으로 삼아 간단한 설교를 한 후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그날 오후 1시에 감독은 한인 목회자와 특별모임을 마련하였는데 그 정도로 한국교회 선교는 주목을 받았다. 하와이 선교연회 회원 중 한인 사역자는 정회원 8명으로 조연택, 홍치범, 홍한식, 김이제, 이관묵, 이선일, 임준호, 박새환이었고, 준회원 6명으로 김재성, 송헌주 등 2명, 수련목회자는 안시흡, 최상은, 한명교, 한영준, 박종수, 박기홍이었다. 16명의 한인 목회자는 하와이선교연회 총 회원 29명 중 55%에 해당했다. 한인 사역자 사례비가 1917년 한 해 동안에 7,272달러였는데 이는 일본 사역자비 5,028달러보다 많았고, 필리핀 사역자비 2,672달러보다도 많았다.  

1918년 연회에서 안재덕은 목골리아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다시 파송을 받았다. 그해 파송을 받은 자로는 권사로서 김림걸과 남덕두가 더 있었고, 파송 받은 지방전도사는 2명이었는데 그들은 황계수와 최원S였으며, 목사로 파송 받은 자는 조연택이었는데 그는 와일누아 지역 순회 전도 목사로서 가후구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목골리아 한인감리교회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조연택 목사가 보고한 와일누아 지역 한인감리교회 통계는 와일누아와 가후구뿐만 아니라 목골리아에 있던 한인감리교회를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고한 통계는 다음과 같았다. 유아세례교인 13명이었고, 유아 세례를 받은 후 신앙고백을 한 입교 교인이 13명이었으며, 학습 교인이 22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7명이었다. 교회학교는 한 곳에만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여섯 명이 있었고, 등록한 학생은 37명이었다. 엡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은 없었다. 예배당은 두 곳에 있었고, 당시 두 예배당 시가는 3,000달러였으며, 두 예배당에 일 년간 든 비용은 58달러였다. 훈련을 위하여 50달러를 헌금했고, 다른 목적으로 한 헌금이 471달러여서 헌금한 총 액수는 521달러였다. 필자가 찾은 이듬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아쉽게도 교세 통계가 게재되어 있지 않아서 안재덕 권사의 사역 성과를 가름할 수 없다.

제14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19년 3월 6일부터 9일까지 나흘 동안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감독 매트 S. 휴즈 박사는 안재덕을 목골리아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했다. 그 연회에서 조연택을 순회전도 목사로 파송하여 와일루아와 가후구와 더불어 목골리아에 있던 한인감리교회도 담당토록 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찾은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권사 파송 명단이 없어 목골리아 한인감리교회 권사 파송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목골리아 한인감리교회 보고도 없어서 교세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런데 이듬해 발간된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목골리아 한인감리교회 교세 보고가 따로 없고, 와일루아 지역 한인감리교회 교세만 있다. 안재덕이 처음 권사로 파송되었던 1916년과 비교하면 세례 교인은 76명이나 적은 8명이었고, 유아 세례 교인은 8명이 많은 21명이었으며, 학습 교인은 10명 이하였다. 주일 학교는 한 곳이 많은 두 곳에 있었고, 직원과 교사와 등록한 학생은 각각 한 명이 많은 7명과 37명이었다. 한 곳이 적은 두 곳에 예배당이 있었고, 당시 시가는 1,600달러가 많은 3,000달러였으며, 한 해 동안 예배당에 지출한 비용은 16달러가 많은 56달러였다. 그리고 1916년에는 없었던 100주년 기념 헌금이 71달러였다.

1920년 이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지방전도사와 권사의 파송 명단이 없거나 일부분만 있어 안재덕의 파송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독립 운동

 

1919년 3월 1일에 한국에서 일어난 삼일 독립운동 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안재덕은 하와이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위하여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노력했다. 1923년에는 국내에서 해외 동포에게 보낸 경고서를 미주 지역 각 한인사회에 배포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의 대동 단결을 주장하는 가운데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안재덕은 환갑을 지난 1930년대 초에 조국으로 귀국하여 고향 심근골에서 거주하다가 조국이 해방되기 3년 전인 1942년에 조국의 해방을 듣지 못한 채 69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재덕이 소천한 지 56년이 되던 199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그해 그의 형제 안재창에게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윤정일, 임병규, 민경조 그리고 황준연이 공저가 되어 2007년에 경인문화사에서 252쪽의 남양주 독립운동가를 출판했는데 남양주에서 태어난 안재덕이 포함되어 있다.

damien.sohn@gmail.com

06.08.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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