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진호(金鎭鎬)는 1884년 10월 10일에 한국 경북 김천군 개령면 광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가 되던 1904년에 하와이 노동이민을 신청하고, 제물포를 거쳐 일본 고베에서 기선 ‘코리아’를 타고 그해 11월 8일에 출발하여 10일 후인 그달 18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1909년에 가와이섬 막가웰리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하였다.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의 공판투쟁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할 때 김진호는 1달러를 후원하였는데 40여 명의 막가웰리 동포가 기부한 금액은 66달러 25센트였다.
막가웰리 한국어 학교 교사
1918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3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감독 애드나 W. 레오나르도 목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김진호는 1918년에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내에 있는 한글 학교 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한국 부모들은 일본 부모들과는 달리 모국어인 한국어로 자녀와 대화하기를 원했고, 한글 학교를 유지하기를 열망했으므로 한국인 어린이는 숫자상으로 적었지만, 하와이 선교연회는 한국어 교사에게 월 15달러 내지 20달러를 보조했다.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
1918년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김진호는 가와이섬 막가웰리에 있는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김재성 목사가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와 골로아 한인감리교회를 담당한 순회 선교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래서 김재성 목사가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지 않는 날에는 김진호가 예배 등 모든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진호가 파송된 1918년 3월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의 교세는 아래와 같았다. 유아세례교인이 4명이었고, 학습교인이 5명이었으며, 세례교인은 1명이었다.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3명이었지만 등록한 학생수는 적혀 있지 않았다. 예배당이 있었고, 토지와 건물의 당시 시가가 500달러였으며, 지난 1년간 건물에 소요된 비용은 3달러였다. 훈련을 위하여 24달러를 지출하였고, 기타 다른 지출은 12달러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1919년의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교세 현황 보고가 없어 1년간의 김진호의 선교 결과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위의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그해 파송한 권사 명단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그의 파송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김진호는 1918년에 하와이 국민회 산하 막가웰리 대의원으로 재직했다. 그해 2월에 총회장 안현경이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불법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그해 4월에 하와이 군도 14 지역의 대의원이 임시의회를 소집하는 청원서를 냈을 때 막가웰리 대의원이었던 김진호도 청원 명단에 포함되었다. 대의원을 잡아 가두는 등 과격하게 소동이 몇 달간 이어졌는데 ‘한인들이 만일 일향 이렇게 하면 법사에서는 국민회를 해산시켜도 원통하다 하지 못하리라’는 정부 관계자의 말까지 나돌면서 신한민보는 그해 6월 27일에 아래와 같이 탄식하면서 붓을 들었다. “하와이 경무청 관리가 국민회를 해산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치안 방해를 위할 뿐 아니오 더욱 재정상 손해를 분로함이다... 하와이 인도자에게 말하노라. 만일 잊자함으로 말미암아 국민회를 해산할 지경이면 해의 한인 전체 동포의 엄중한 선고가 있으리라 하노라.”
이듬해 10월에는 신한민보를 통해 하와이 국민회 총회가 재정을 보고하였다. 수입은 6월 이월금, 대표 의연금, 독립의연금, 21예금 그리고 영업부 금액을 합하여 총 23,451달러 45센트였고, 지출은 봉급, 북미총회 출판부, 운동비, 딘노비, 통신비, 예비, 영업부, 사무실, 외교부, 출판부, 문방비, 비존물, 서적비, 가족비, 파출소, 등록부, 화교부, 조각비, 운반비, 잡비, 대체부 등의 항목 비용을 합해서 총 19,765달러 5센트였으며, 잔고는 3,686달러 40센트였다. 수입 항목 중 21예납금 총액이 5,715달러 26센트였는데 김진호는 5달러를 냈다.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
제15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20년 2월 19일부터 그달 22일까지 나흘 동안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감독 애드나 W. 레오나르도 목사의 사회로 모였다. 이 연회에서 한국 교계는 슬픈 순간을 맞았다. 작년 12월 13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조영택 목사를 위한 추도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 목사는 평양에서 태어나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온 지 4년이던 1907년에 하와이 선교연회의 파송으로 하와이섬 고나에서 노동하는 한인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1917년에 집사 목사로 안수받은 후 이어서 장로 목사가 되어 미국 북감리교 가주 연회의 정회원이 되었다. 정회원이 된 지 몇 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김진호는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되었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기재된 Kim Chiu Ho가 Kim Chin Ho의 오타로 보인다. 그해 그 외에도 한재명, 이태성, 정운선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되어 그해 파송된 총 권사의 수는 4명이었다. 그해 지방 전도사도 파송되었는데 그들은 안운규, 남새윤, 정운명, 황계수였다. 그리고 담임목사로 황사용 목사가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에 파송되었다.
김진호가 파송되던 해에 보고된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교세는 다음과 같았다. 유아세례교인이 8명이었고, 학습교인이 10여 명이었으며, 세례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주일학교는 교사와 직원이 5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60명이었다. 엡워스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8명, 엡워스 중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22명이었다.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69달러를 헌금했다. 예배당의 당시 시가는 32,100달러였고, 지난 한 해 동안 건물에 들어간 비용이 426달러였다.
이듬해 1922년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의 교세에서 지난 1년간의 성과를 찾을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성인이나 유아가 세례를 받은 자는 하나도 없었으나 학습을 받은 자는 7명이었다. 주일학교는 교사와 직원이 2명 많았고, 등록한 학생은 15명이 많았다. 엡워스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17명이 많았으나 엡워스 중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100주년을 기념 헌금은 작년과 같았다. 예배당의 시가는 17,900달러가 늘었고, 지난 한 해 동안 건물에 들어간 비용은 147달러가 적었다.
그런데 1922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권사와 전도사 파송 명단이 없어 김진호의 파송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그 이후에도 파송 명단이 없거나 일부분만 게재하여 그의 파송 여부 확인이 어렵다. 그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총 3년간 사역하였는데 심정상 그의 사역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도 파송된 것으로 보면 그의 사역 기간은 4년이다.
기타 사역
김진호는 개교회와 한인 사회에서 나름대로 복음 선교와 문화 선교 차원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 엡워스 청년부는 1924년 8월에 새 임원을 선정했을 때 김진호는 학문국장에 피선되었다. 그 외 임원으로는 회장에 현베드로, 부회장에 정활라, 서기에 현안라시, 재무에 현공춘, 교제국장에 김찬제, 전도국장에 김또라였다.
이듬해 6월 30일 저녁에 호놀룰루 중국인 식당에서 독립단 주최로 한국에서 온 5인 대표를 위하여 만찬회를 열고 환영하였다. 이곳에는 하와이에서 정치 운동으로 풍파를 많이 겪은 30여 지사가 모인 가운데 초청 연사의 연설을 들었다. 이 연설 후에 김진호가 하와이 한인 사회의 역사를 설명하였는데 참석한 5인 대표는 그의 장황한 설명에도 놀라는 기색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들었다고 한다.
1만여 달러로 건설한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 학생 기숙사를 1925년 가을 학기부터 더욱 확장하기 위하여 동 이사부원은 여러 번 회의를 거쳐 몇 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한편 학생을 모집하면서 다른 한편 기숙사 수리에 힘썼다. 이를 위하여 최두욱을 재무로 선정하고 김이제를 간사로 선임하여 확장 수리를 마치기로 하고, 하와이 선교연회 감리사 푸라이 박사에게 청원하였다. 그해 김진호를 위시하여 이사부 임원은 안원규, 정원명, 이지성, 김이제, 임준호였다.
호텔 객실 청소 매니저로 활동하던 김진호는 조용하를 앞세워 김윤배 등과 함께 1930년 1월 13일 밤에 민족주의에 기인하여 대한 독립운동에 촉진을 위하여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위하여 임시정부로 중력을 집중한다는 정강하에 ‘최후 일인 최후 일각까지 분투한다’는 방락으로 독립당 통일을 기성하려고 하였다. 김진호는 서기에 선임되었고, 위원장에 조용하, 재무에 김윤배를 선정하였다.
그해 6월 15일 오후 7시 30분에 호롤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에서 고 장인환 의사의 추도회가 있었다. 홍한식 담임목사의 사회로 애국가를 다 같이 부르고, 편성원이 기도하였으며, 이어서 김진호가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이후 최또라가 추도가를 불렀고, 강영효가 장 의사의 약사를 소개했으며, 태병선이 장 의사에 대한 감개를 논한 뒤 문또라와 정운서가 인도하여 부의금을 거뒀고, 찬미하고 기도한 후 마쳤다. 그날 모은 부의금은 26달러였다.
1930년 7월에 동지회가 미포 대표회의를 호놀룰루에서 개최하여 하와이 한인 사회를 동지회 중심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하와이 교민단이 반발하면서 양자 간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상호 인신공격과 폭력행사로 이어져 마침내 경찰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는데 태평양 잡지 주필이었던 김진호도 깊이 관여하였다.
1934년 6월 15일 오후 7시에 대의장 강영효와 대의원 여러분이 합석하여 각 지방 회원의 투표를 조사한 후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총회장에 김윤배와 부회장에 이호직이 피선되었음을 발표했다. 이어서 임원으로 서기에 김진호가 선임되었고, 그 외 임원으로는 총무에 박상하, 재무에 정인수, 실업국에 이정건, 접무국에 인봉규, 학무국에 박종수, 군무국에 태병선 그리고 사교국에 박봉집이 임명되었다. 신한민보는 7천 동포의 단결과 하와이 동포의 생활 향상으로 하와이 한인 사회가 부흥하여 태평양상 전쟁 활무대에 활동 근거가 되기를 바랐다.
그해 10월에 대조선독립단과 대한인 국민회가 합동하였다. 대조선독립단 대표는 정두옥, 안원규, 승동환, 이용직, 조병요, 김한경, 정원명이었고, 대한인 국민회 대표는 김윤배, 박상하, 태병선, 박봉집, 박종수, 인봉주, 정인수, 이정건 그리고 김진호였다. 신한민보는 다음 달 11월에 세 단을 할애해 합동을 축하한다는 긴 기사를 실었다.
1935년 1월에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는 신임 총회장 임성우 등 임원과 신설한 9인 참의부를 소개하였다. 김진호는 김윤배, 정인수, 정두옥, 송진홍, 박종수, 안원규, 박봉집, 인봉규와 함께 9인 참의부에 이름을 올렸다.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하는 운동이 1938년에 다시 진행되어 일곱 차례 모임을 했다. 대한인 국민회 대표는 정인수, 이종관, 김현구였고, 동지회 대표는 김진호를 위시하여 이원순과 김광재였다. 이들은 양 단체에서 각 지방회의 동의를 얻어 11월 11일로 임시 연합의회로 모이기로 하였다.
김진호는 1939년 2월 23일에 오아후섬 호놀룰루에서 향년 55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오아후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그는 최은희와의 사이에서 홍내, 강내, 영내, 마거릿 등 3남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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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