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남세윤은 1885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 후 그는 마흔 살이 되던 1905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을 계획하고 서른여덟 살 된 부인과 아홉 살 된 딸 호미와 일곱 살 된 딸 필종과 네 살 된 딸 필분을 데리고 제물포를 거쳐 일본에서 노동 이민선 차이나를 타고 그해 5월 29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에 온 남세윤은 로마 알파벳으로 Nam Sei Youn으로 통했다.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
1910년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제5회 미국 남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그해 가와이섬에는 오직 한인감리교회만 있었고, 일본인 교회와 필리핀 교회와 백인교회는 없었다. 엘리엘리, 골로아, 기알리아, 가파, 길나위아, 리휘, 하나마울루, 막가웰리 그리고 긱가하 지역에 각각 한인감리교회가 하나씩 있어서 한인감리교회수는 아홉이었으나 이들을 네 순회지역으로 나누어 엘리엘리 지역, 가파 지역, 리휘 지역 그리고 막가웰리 지역으로 나누었다.
감독 에드윈 홀트 휴즈 목사의 사회하에 개회된 본 하와이 선교연회는 남세윤을 가와이섬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가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온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에서는 권사로 남세윤 외에도 정인수를 파송하였고, 지방전도사로 차윤중을 파송하였고, 순회 전도목사로 김이제를 파송하였는데 김이제는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긱가하 한인감리교회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남세윤이 가와이섬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되었던 1910년 가와이섬 막가웰리 지역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가 열리던 그달에 보고한 교세 현황에서 찾을 수 있다. 학습교인은 35명, 세례교인은 103명, 유아세례교인은 5명이었다. 주일학교는 5곳에 있었는데 교사와 직원이 14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133명이었으며, 평균 주일에 출석한 학생은 103명이었고, 엡워스 청년회는 한 곳에 있었고, 44명이 등록하였다. 예배당은 세 곳에 있었고, 당시 시가는 700달러였다. 해외 선교국에 11달러를 헌금했고, 주일학교국에 1달러를 헌금했으며, 훈련국에 12달러를 헌금했다.
1년 후에 보고된 막가웰리 지방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참조하면 남세윤의 사역 성과를 엿볼 수 있다. 학습교인은 10명이 많은 45명, 세례교인은 18명이 적은 85명, 유아세례교인은 4명이 적은 1명이었다. 주일학교수는 보고되지 않았는데 교사와 직원이 2명 많은 16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21명이 적은 112명이었으며, 평균 주일 학교 출석한 학생 항목은 없었으며, 엡워스 청년회는 한 곳에 있었고, 19명이 적은 25명이 등록하였다. 예배당은 작년과 같이 세 곳에 있었고, 당시 시가는 작년과 같이 700달러였다. 해외 선교국에 헌금하지 않았고, 작년에 하지 않은 내지 선교/교회확장국에 30달러를 헌금했고, 주일학교국을 위하여 작년과 같이 1달러를 헌금했으며, 작년에 항목 자체가 없었는데 신설된 항목으로 흑인보조회와 미국 성서공회에 각각 1달러를 헌금하였으며, 작년에 했던 훈련국 헌금 조항은 없었다.
제6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11년 1월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간 호놀룰루 감리교회에서 있었다. 가와이섬에는 작년에 있었던 9개 한인감리교회가 그대로 있었다. 작년에 이어 감독이 된 에드윈 홀트 휴즈 목사는 남세윤을 작년에 이어 2년째 가와이섬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본 교회로 파송된 자는 작년에 이어 2년째 정인수를 권사로 파송하였고, 차윤중을 작년에 이어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으며, 순회 전도목사로 김이제를 작년에 이어 파송하였는데 김이제는 작년처럼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긱가하 한인감리교회에도 파송하였을 것이다.
1년 후에 보고된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참조하면 남세윤의 사역 성과를 볼 수 있겠는데 안타깝게도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그의 성과를 가름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1913년 이후 1915년까지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남세윤의 파송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와이 선교연회는 그를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와 지방전도사로 계속 파송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915년 6월에 하와이 지방총회 아래 가와이섬 긱가하 지역의 대의원이었던 이흥기 등 4명이 중앙총회에 공소장을 올렸다. 공소장에 따르면 하와이 지방총회에 내는 의무금과 관련하여 총회장 김종학이 5월 10일에 임시총회를 한다고 발표하였는데 임시총회에 참석한 18개 지방 대표의 자격이 문제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정이 불법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남세윤이 18개 지방 대표 중 가와이섬 도민회 대표로 참석했으므로 그가 교회 사역외에도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
1916년 2월 17일부터 21일까지 5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1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있었다. 이해 가와이섬에는 막가웰리, 골로아, 리휘 그리고 길나위아에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다. 5년 전에 가와이섬에는 9개 지역에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는데 1916년에 4개 지역에만 한인감리교회가 있어 교회수로 보면 5개 지역 교회가 문을 닫았는데 그들은 엘리엘리, 기알리아, 가파, 하나마울루 그리고 긱가하 지역에 있던 교회였다.
이해의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는 남세윤을 가와이섬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이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본 교회로 파송된 자는 작년에 파송되었던 이선일 목사였고, 그는 순회 전도목사로서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골로아 한인감리교회도 맡았다. 그런데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는 권사를 파송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선일 목사가 다른 교회를 방문할 때는 남세윤이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를 전담했어야 했다.
그달에 보고된 교세 현황에 따르면 순회 전도목사였던 이선일 목사가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교세와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합쳐서 보고하였으므로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교세만 따로 확인할 수 없다. 두 교회 교세가 합쳐진 교세로 보면 주일학교가 각각 있었고, 직원과 교사는 9명이었으며 등록된 학생은 75명이었다. 유아세례교인은 9명이었고, 유아세례를 받은 자로서 신앙을 고백한 입교 교인은 23명이었으며, 학습교인은 8명이었고, 세례교인은 73명이었다. 엡워스 고등부 학생은 18명이었고, 예배당은 막가웰리와 골로아에도 있었고, 두 예배당의 당시 시가는 1,950달러였으며, 전기와 연료 등에 135달러를 지출하였다.
1917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남세윤의 1년 노력을 가름할 수 없다. 그런데 그해에도 그가 파송되었을 것 같다.
1915년에 이어 1918년에도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 대 풍파가 일어났다. 총회장 안현경이 행정상 명확하지 않고, 재정상 부정하다고 주장하는 쪽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쪽이 충동하는 과정에서 오아후섬 대의원 유동면을 잡아 가두고, 회장 김진호 등을 선출하여 임시연합회와 이내수 등 8명 대의원을 선출하면서 지방총회의 분립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8명 대의원 중 한 명으로 남세윤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신한민보는 이를 대서특필하여 중대한 사건으로 게재하면서도 “언론과 사실에 닐으러서는 책임을 지지 안이함”이라고 적었다.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
1918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제13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모였다. 감독 애드나 라이트 레오나르드 목사는 남세윤을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해에 본 교회로 파송된 자는 지방전도사로서 남세윤 외에도 안원규와 백낙M이 더 있었고, 권사로는 한재명, 이태성 그리고 연계송이 있었으며, 방WC(방화중?)은 본 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남세윤이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았을 때의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교세는 아래와 같았다. 유아 세례교인이 17명이었고,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고백을 한 입교교인이 25명이었으며, 학습교인이 34명이었고, 세례교인이 160여 명이었다.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21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이 181명이었고, 웹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은 28명이었다. 당시 시가로 32,000달러의 예배당이 있었고, 예배당에 1년간 들어간 비용이 320달러였다. 자선기금으로 90달러를 헌금하였는데 이중 훈련비 헌금이 40달러였고, 다른 목적 헌금이 50달러였다. 그런데 필자가 찾은 이듬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교세 통계가 없어서 남세윤의 1년간의 전도 상황을 비교할 수 없다.
제14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19년 3월 6일부터 9일까지 나흘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감독 매트 S. 휴즈 박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휴즈 박사는 남세윤을 작년에 이어서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와 함께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은 자는 작년에 파송을 받았던 안원규와 정원명과 황계수가 있었는데 후자 2명은 그해에 새로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방WC(방화중?)가 담임목사로 다시 파송을 받았는데 얼마 후에 홍한식 목사가 그를 이어 목사로 부임했다. 파송을 받은 권사도 있었을 것 같은데 필자가 찾은 1919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1920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서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교세를 확인하게 된다. 유아세례 교인 8명, 유아세례를 받은 후 신앙고백을 하고 입교한 교인이 2명, 지난 한 해 동안 5명이 학습을 받았고, 그해 학습교인은 인쇄상의 문제로 그 숫자를 확인할 수 없었고, 지난 한 해 동안 3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해 세례교인도 같은 문제로 확인할 수 없었다. 주일학교는 하나만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5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60명이었다. 엡워스 청년회에 고등부 학생이 8명이었고, 중등부 학생이 22명이었다. 32,100달러 상당의 예배당이 있었고, 그해 예배당 건물에 지출한 금액이 426달러였다. 100주년 기금으로 69달러를 헌금하였다.
1920년 이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지방전도사와 권사의 파송 명부가 없거나 일부분만 있어서 남세윤의 파송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1924년 2월 14일자 신한민보에 ‘현 순 목사의 사직설은 허보’라는 제하의 글이 게재되었다. 현 순 목사의 사임설을 신한민보가 보도하였는데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 남세윤이 현 순 목사의 사임설은 허무맹랑하다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본 교회 일반 임원과 신도가 다 현 목사를 환영하므로 어찌 사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이 와전의 통신을 곧 정오하시옵소서라고 신한민보에 부탁하였다.
그래서 남세윤의 파송을 확인한 대로는 1910년부터 1912년까지 권사로 2년간, 지방전도사로 1916년부터 1917년까지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3년간 이어서 5년간이지만, 정황상 그는 1910년부터 적어도 1924년까지 14년간 권사와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전도사역을 감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1924년 이후 남세윤의 이름은 더 이상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damien.sohn@gmail.com
04.2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