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정상원은 1882년 8월 25일에 한국 경상남도 진주에서 아버지 정봉U와 어머니 박문C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주는 조선 시대 때 경상도 최대 도시로서 경상남도 관찰사가 상주하였으며 그가 거주할 때만 해도 경상남도 행정의 중심지였다. 22세가 되었을 때인 1905년에 진주에서 거주하였는데 그해에 노동 이민의 꿈을 안고 아내를 한국에 두고 홀로 제물포를 떠나 그해 4월 1일에 일본 고베에서 하와이 노동 이민선 ‘코리아’에 승선하여 그달 13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로마자 알파벳으로 Chung Sang Won 또는 Chun S.W. 또는 Chung S.W.로 통했다.
하와이에 온 지 15년이 되던 1920년에 정상원은 하와이섬 부나에서 인구조사에 응했다. 노동 이민 계약을 벗어난 그는 그해에 정원사로서 자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해 하와이섬에는 힐로, 가날야유, 하갈나우, 파팔노아에 한인교회가 있었는데 이 중에 힐로가 가장 가까워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걸어서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 후 정상원은 정원사를 그만두고 하와이섬 부나에서 북쪽으로 찻길을 따라 30마일 떨어진 같은 섬의 하갈나우 농장으로 이주했다.
1935년 하와이 선교연회록 (아래에서 두 번째가 정상원이다.)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1931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26회 미국 북감리교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모였다. 이 선교연회는 한국인 선교를 위하여 세 개 섬에 각각 순회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하와이섬에는 이관묵 목사를 파송하였고, 마위섬에는 임준호 목사를 파송하였으며, 가와이섬에는 현 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이중 이관묵 목사가 파송된 하와이섬에는 파팔노아, 호녹가이지, 힐로, 고나의 4개 지역에 7개 교회가 있었다. 호녹가이지 지역에는 2개 교회가 있었고, 힐로 지역에는 3개 교회가 있었으며, 그 외 2 지역에는 각각 한 개 교회가 있었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는 장영운과 함께 정상원을 이관묵 목사가 한인 순회 선교사로 파송된 하와이섬의 하갈나우 지역으로 파송하여 교회 개척을 계획하였다. 정상원으로서는 처음 파송을 받는 영광의 한 해였다. 그런데 그해 하와이 선교 연회록은 그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고 이듬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하와이 선교연회 소속 지방전도사와 권사의 일부분을 소개하면서 하갈나우 지역에 지방전도사와 권사로 파송한 자를 소개하였는데 이들을 구분하지 않아서 하갈나우에 파송된 정상원 뿐만 아니라 장용운도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는지 권사로 파송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확인할 수 없으나 교회 개척 단계에 있었으므로 이들을 권사로 파송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정상원이 처음 파송되던 1931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하갈나우 지역 보고가 전혀 없어서 지역 형편을 가름할 수 없다.
1932년 2월 11일부터 14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된 제27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하갈나우 교회의 교세에서 정상원 등 교회 지도자들이 전도한 결과를 볼 수 있다. 그달에 보고된 교세 통계에 따르면 작년 보고서에 없었던 하갈나우 교회가 기재되었고, 유아세례교인이 4명이었고, 성인세례교인이 1명이어서 초라한 통계였지만 이관묵 목사가 섬기던 8 교회 중에서는 두 번째로 큰 교세였다. 그러나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에 속한 유아세례교인이 396명이었고, 성인세례교인이 170명이었으므로 하갈나우 교회는 작은 교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원입교인으로 받은 자가 76명이나 되어 교회의 미래가 밝았다.
그달에 정상원은 재차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에 파송을 받았다. 전도사인지 권사인지가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으로 권사로 파송을 받았을 것이다. 하와이섬 한인 순회선교사로 역시 이관묵 목사가 파송을 받았다. 1933년 3월 2일부터 5일까지 호항 제일감리교회에서 제28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열렸는데 그달에 보고된 하와이 선교연회 교세 통계를 찾을 수 없어 정상원의 1년 사역의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
지난 1년 동안 필리핀인 사역과 일본인 사역과 함께 한인 사역도 여전히 활발했다. 하와이섬 한인 선교사로 이관묵 목사를 파송하였고, 마위섬 한인 선교사로 임준호를 파송하였으며, 가와이섬 한인 선교사로 현 순 목사를 파송하였다. 그리고 6명의 한인 목사가 파송을 받았는데 최윤관은 호항 제일감리교회의 전신인 포스 스트리트 한인교회에 파송을 받았고, 이헨리 목사는 오아후섬 와일누아 지역 기독교 활동 디렉트로 파송을 받았으며, 안창호 목사는 오아후섬의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파송을 받았고, 홍한식 목사는 오아후섬의 와이파후, 와일누아 그리고 가후구에 있는 한인감리교회 순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으며, 정의조 목사는 YMCA사역을 위하여 파송을 받았고, 장용운은 하와이섬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임시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달에 하갈라우 한인감리교회에 파송된 자는 하와이섬의 한인 선교사로 이관묵이 파송을 받았고, 이전과는 달리 하갈라우 한인감리교회에 장용운을 임시 목사로 파송하였다. 그달에 파송한 전도사나 권사의 명단이 아예 소개되어 있지 않았지만, 정황적으로 볼 때 정상원이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을 것이다.
제29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34년 3월 1일부터 그달 5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열렸다. 그달에 보고된 교회 통계에서 정상원이 지난 1년간 사역한 하갈나우 교회 통계를 볼 때 상당히 성장하였음을 알게 된다. 유아세례교인은 없었지만, 학습교인이 34명이었고, 성인세례교인은 26명이었다. 주일학교 직원과 교사가 2명이었고,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26명이었으며, 웹워스 청년회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1명이었지만, 웹워스 청년회 소년부에 등록한 학생은 23명이었으며, 세계 봉사회에 10달러를 헌금하였다.
그달에 하와이 선교연회는 정상원을 4년째 하갈라우 한인감리교회 임시 사역자로 파송하였다. 그런데 그가 파송 목사 명단에 있지만 이전에 권사로 파송되었으므로 이해에는 임시 목사가 아니라 지방전도사로 파송된 것으로 보인다. 파송된 하와이섬 한인 선교사는 역시 이관묵 목사였다.
1935년 3월 7일부터 11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30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이해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20명의 정회원이 있었는데 이중 한인 목사가 안창호, 홍한식, 현 순, 이관묵, 임준호, 임두화 등 6명이었다. 안창호는 한국 연회에 소속되어 하와이에서 10년째 선교사로 사역하였고, 홍한식은 캘리포니아 연회 소속으로 26년째 사역하였으며, 현 순도 캘리포니아 연회 소속으로 13년째 사역하였고, 이관묵도 캘리포니아연회 소속으로 23년째 사역하였으며, 임준호도 캘리포니아 연회 소속으로 23년째 사역하였고, 임두화는 조선 연회가 파송한 선교사로 하와이에서 3년째 사역하였으며, 정의조는 캘리포니아 연회소속으로 2년째 사역하였다. 그들은 하와이 선교연회 산하에 있는 내지선교/교회확장부, 캘리포니아 연회 관계부, 교육/주일학교/엡워스 청년회부, 성수주일부, 협력전도부, 절제부, 성경반포부, 헌의부 등 8개 부서에서 활동하였다. 준회원은 한 명뿐이었는데 한국인 정의조 목사였으며, 지역 준회원 2명 중 한 명이 이헨리 목사였다. 그래서 하와이 선교연회 정회원과 준회원과 지역 준회원을 합친 23명 중 한인 목사가 8명이어서 35%에 해당했다.
그달에 모인 하와이 선교연회는 작년과 같이 하와이섬 한인 선교사로 이관묵 목사를 파송하면서 정상원을 5년째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고, 이전과는 달리 그를 포함하여 2명의 지방전도사도 파송할 만큼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가 성장했다.
미국 북감리교 제31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1936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이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교세에 따르면 엡워스 청년회가 크게 성장했다. 엡워스 청년회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10명이었고, 엡워스 청년회 중등부와 소년부에 등록한 학생은 13명이었다. 헌금도 성장하여 작년에 항목이 없던 주일학교에 5달러를 지원했고, 세계 봉사회에 작년보다 6달러가 많은 16달러를 헌금하였다.
제31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작년과 같이 하와이섬 한인 선교사로 이관묵 목사를 파송하면서 정상원을 6년째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다.
미국 북감리교 제32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1937년 2월 18일부터 25일까지 호놀룰루에 있던 해리스 메모리얼 감리교회에서 있었다. 그동안 섬별로 한인 선교사를 파송하던 체재가 축소되어 마위섬과 가와이섬에만 한인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마위섬 한인 선교사로 임준호 목사를 파송하였으며, 가와이섬 한인 선교사로 현 순 목사를 파송하였고, 하와이 한인 선교사직은 아예 없어졌다.
제32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는 교인과 주일학교와 재정에서 다소 성장하였다. 지난 한 해 동안 유아세례자가 1명 탄생했고, 학습교인은 36명이었으며, 유아세례자로서 세례 교인 과정을 받는 어린이가 26명이었고, 성인 세례자가 14명이었다.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2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36명이었으며, 이중 평균 29명이 출석하였고, 엡워스 청년회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16명이었다. 1년 교회 경비가 14달러였고, 목사 사례비로 30달러를 헌금하였고, 선교사 보조부에서 지급된 비용을 제외한 지역 후원금이 44달러였으며, 세계 봉사회로 10달러를 헌금하였다. 이로써 정상원이 하갈나우 교회에서 사역한 기간 중 가장 성장했던 해라고 할 수 있다.
제32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정상원을 파송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는 파송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정상원은 1931년 2월부터 1937년 2월까지 6년 동안 하와이 선교연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하갈나우 교회에서 권사와 지방전도사로서 활동하였다.
정상원은 1940년에 하와이섬 인근 북쪽에 있는 작은 섬의 하마구아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사탕수수밭에서 한 주간에 48시간을 노동하면서 하와이에서 태어난 17세의 아들과 함께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내와는 이혼한 상태였다. 그의 집에 57세의 홍경택과 같은 나이의 박 두 그리고 53세의 김숙회 등 3명의 독신 남자 한국인이 하숙하고 있어서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이곳에 한인교회는 없었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필리핀인 교회가 있어서 이 교회에 출석했을 것 같다. 정상원은 60세가 되던 1942년에 세계 제2차 대전 징병 서류를 제출했다. 그가 친히 작성한 징병 서류에 따르면 ‘하와이 농업 1호 회사’ 산하의 하와이섬 파할나에 있던 지역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한인촌 11호 집에서 거주하였고, 전화기는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도 한인교회가 없어서 필리핀 교회에 출석했을 것같다. 68세가 되던 1950년에 정상원은 인구조사에 응했다. 그는 하와이섬 남 고나에서 두 손녀를 둔 아들 가정에서 거주하였는데 1살 된 손녀를 돌봐주고 있었을 것같다. 이곳에서도 한인교회는 없었다. 정상원은 1957년 1월 21일에 향년 74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하와이섬 와일래에 있는 오션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
03.3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