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두 김창근 (이덕희가 정리한 호놀룰루 도착 한인명단)
김창근은 한국에서 1872년경에 태어났다. 결혼하여 애우개 (서울 애오개)에서 거주하였는데 홀아비가 된 그가 1904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의 꿈을 가지고 그해 8월에 제물포를 떠나 일본에서 그달 10일에 개릭 기선에 승선하여 그달 22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런데 또 다른 김창근이 있었다. 그는 1864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나 어느 도시의 죽동 (대전 죽동?)에서 거주하다가 40세가 되던 1904년 8월에 제물포를 떠나 일본 고베에서 그달 24일에 코리아 기선을 타고 다음 달 5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 살 적은 아내와 일곱 살 된 딸 흥순과 열두 달 된 갓난이를 데리고 호놀룰루에 내렸다. 그리고 비슷한 영문 이름으로 표기된 김창근 (Kim Chang Koun)이 1903년 3월 3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조지 존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김창근은 이민자 서류에서는 Kim Chang Keun으로, 미국북감리교 하와이 연회록에서는 Kim Chong Kun 또는 Kim Chang Ken으로, 초기 하와이 한인 교인 명단에서는 Kim Chang Koun으로 통했다.
윌슨 S. 루이스 감독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1916년 2월 17일부터 21일까지 미국 북감리교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그해 감리사는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였고, 한국 사역 총무는 4년차 연수 중인 준회원 김재성이었으며, 한국어 통역관은 한인 여자 기숙학교 교장이었던 우남 이승만이었다.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 중에 있었던 하이라이트는 그날 20일에 루이스 감독이 주장한 4명의 한국인 목사 안수식이었다. 홍한식 목사가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의 정회원이 되었고, 김재성과 이관묵과 박새환이 위의 연회의 준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조한식이 지방전도사의 과정을 온전히 이수하여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날 준회원으로 안수받은 외국인으로는 코르넬로 C. 라미레즈 목사와 일본인 카메노수키 다나가 목사도 있었다.
윌리엄 H. 프라이 감리사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 산하에 여러 한국인 감리교회가 있었다. 오아후섬에는 에와, 호놀룰루, 가후구, 와일누아, 가하루 그리고 와히아와에 7개 한인감리교회가 있었고, 마위섬에는 스프레클스빌, 파이아 그리고 하나에 3개 한인감리교회가 있었으며, 하와이섬에는 고할라, 힐로, 하갈나우, 호녹가이지, 국구해리, 파할나, 남 고나, 북 고나, 파랄노아에 8개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다.
그해 가와이섬에는 한국인 감리교회가 넷이 있었는데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리휘 한인감리교회 그리고 길나위아 한인감리교회였다. 위의 한국인 교회들 외에도 가와이섬에는 막가웰리, 엘리엘리 그리고 긱가하에 필리핀 교회가 있었고, 기알리아와 가파에 일본인 교회가 있었다.
김창근은 하와이에 온 지 12년이 지난 1916년에 개최된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김창근 외에도 지방전도사로 고석C가 파송을 받았고, 담임목사로 이선일 목사가 파송을 받았는데 이 목사는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외에도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도 맡아 순회 목사였고, 골로아에 있던 한국 학교도 맡았다.
그달에 보고된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교세는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와 합친 보고였기 때문에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따로 파악하기 어렵다. 합쳐진 교세에 따르면 두 곳에 주일학교가 있었고, 교직원이 9명이었으며, 등록된 학생은 75명이었고, 학습교인은 8명이었으며, 세례교인은 73명이었고, 엡워스 청년회 고등부에 등록된 학생이 18명이었으며, 두 곳에 각각 예배당이 있었는데 당시 시가가 두 교회 합쳐 1,950달러였고, 한 해 동안 연료비와 전기비 등에 135달러를 지급하였으며, 한 해 동안 하와이 선교연회로 44달러를 헌금하였다.
참고로 그달에 보고된 하와이 선교연회의 교세는 다음과 같았다. 지난 1년간 세례를 받은 교인이 278명이었고, 회기 말 당시 학습 교인과 세례 교인이 1,885명, 예배당이 22개, 총 예배당 시가가 113,250달러, 사택이 6개, 총 사택 시세가 14,525달러, 엡워스 청년회가 15곳, 엡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이 448명, 주일학교가 38개,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1,412명이었다.
1917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서 김창근이 1년간 수고한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의 형편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정황상 1917년에 모였던 제12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김창근이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1918년에 개최한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그가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았기 때문인데 일반적으로 지방전도사가 되기 전에 3, 4년간 권사로 파송받아 지방전도사로서의 자질을 검증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1914년과 1915년에도 권사로 파송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해의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다.
1916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의 한인 권사 파송명단 (위에서 두 번째가 김창근)
1918년 3월 현재의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교세가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되었다. 지난 1년간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에서 성인 7명이 세례를 받았고, 유아 11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성인 4명이 학습교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달에 등록된 학습교인이 22명이었고, 등록된 세례교인은 5명이었다. 주일학교에 7명의 교직원이 있었는데 등록한 학생수는 적혀있지 않았고, 엡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은 23명이었다. 1,000달러 시가의 예배당 건물이 있었고, 예배당 건물에 지난 한 해 동안 50달러를 지출하였다. 그리고 훈련을 위하여 20달러를 헌금하였다.
1919년 하와이 선교연회 한인 지방전도사 파송 명단 (아래서 5번째가 김창근이다)
1918년의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창근을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해 담임목사로는 작년에 파송된 이선일 목사 대신에 김재성 목사가 파송되었는데 그는 이전 이선일 목사와 같이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외에도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도 맡았으므로 순회 목사였다. 그리고 그해 권사로는 이종관이 파송되었다.
그런데 1919년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록 pdf 파일에서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찾을 수 없어 김창근의 선교 열매를 알 수 없다.
1920년 연방정부 인구조사
1919년 3월 6일부터 9일까지 미국 북감리교 14회 하와이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창근을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다시 파송하였다. 본 연회 석상에서는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와 더불어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의 순회 목사로 임시 목사가 파송될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그 후 박WT가 파송되었다.
1920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된 제15회 하와이선교연회에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교세가 보고되었으나 같은 섬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교세와 합쳐져 있어서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 교세만 따로 확인할 수 없으나 두 교회의 교세는 다음과 같다. 지난 한 해 동안 유아세례를 받은 아기는 3명이었고,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 훈련을 받은 다음 세례를 받은 자가 26명이었으며, 학습을 받은 자가 20명이었다. 그래서 그해 등록한 학습교인은 20여 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확인되지 않았다. 두 교회에 각각 예배당과 목사관이 있었는데 전체 시가는 2,420달러였고, 네 건물에 120달러가 지출되었다. 그리고 100주년 헌금으로 두 교회가 68달러를 헌금하였다.
그런데 그해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와 같은 섬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의 교세를 하와이 선교연회에 소속된 전체 교회의 통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와이 선교연회에 소속된 전체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아기가 109명이었고, 입교한 자가 127명이었으며, 세례를 받은 자가 178명이었고, 회기말 학습교인은 620명이었다. 그래서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와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에서 지난 한 해 동안 받은 유아세례자는 하와이 선교 연회 전체 교회의 3%이었고, 입교자는 전체 교회의 20%였으며, 학습교인은 전체 교회의 7%였고, 등록한 학습교인은 3%였다.
1920년의 제15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창근을 파송하지 않았다. 단지 안SN 목사를 임시 담임목사로 파송하였는데 예전과 같이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도 맡았다. 이해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파송된 지방전도사와 권사 명단이 없어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에 지방전도사와 권사를 파송하였는지와 파송하였다면 누굴 파송하였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후 김창근의 이름은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김창근은 정황상 1915년 2월부터 1920년 2월까지 5년간 가와이섬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에서 권사와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해 김창근은 인구조사에 응했다. 47세였던 그는 아내 김영옥과 함께 거주했고, 세 살 된 충순과 11개월 된 화순을 낳아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의 집에 43세의 현상학, 37세의 이덕수 그리고 36세의 김한수가 하숙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독신이었다. 1920년 이후 김창근의 이름은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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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