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강영각(康永珏)은 1897년 3월 7일에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취용리에서 강명화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이현에 살던 38세의 강명화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기선 차이나를 타고 1905년 5월 29일에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이 강명화가 강영각의 아버지일 수 있으나 도착한 아들은 영각이 아니라 경손이었다. 하와이로 이주한 강영각은 영어로 Young-Gak Kang으로 통했다.
강영각은 하와이 호항 중앙학원을 졸업한 후 1909년에 미국 남가주로 유학했다. 그는 남가주 나성 인근의 업랜드에서 1912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클레어몬트에서 중학교를 나와 그곳에 있는 포모나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앰피온 소사이어티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두 ‘그리 클럽’ (찬양대)과 밴드와 관현악단과 음악대학 학생과 교수로 구성되었고 한 달에 한 번 모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클럽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외국에서 거주하였거나 국제적인 관심을 가진 학생이 가입하여 외국 학생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이 단체에서 총무를 역임했다. 그리고 그는 코넷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어서 대학 관현악단의 단원으로 활동했고, 포모나 대학 밴드의 부디렉터를 역임했다. 1914년에는 한인학생군악대를 조직해 지휘하였는데 1919년에 한인음악대로 탈바꿈했다. 한편 강영각은 홍 언, 김영훈, 임정우와 함께 1919년 3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화교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어 중국인 사회에 기미년 독립선언을 알리고 모금하여 15,000달러를 모금했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하여 1921년 2월에 포모나 대학을 졸업하였다.
강영각은 동포를 위하여 교육에 희망을 두었는데 하와이 호항 기독학원 민찬호 학사로부터 기독학원 교사로 초빙되어 보내준 교통비로 1921년 9월에 호항 기독학원에 도착했다. 그해 12월에 한인 2세를 위하여 영문 월간 신문인 한인 소년 The Young Korean을 펴내 1년에 2차 출판했을 뿐만 아니라 한인 학생 동문, 한인 대학생 클럽 그리고 태극클럽을 조직하였다.
1923년 7월에 와히아 한인감리교회가 2,000달러로 예배당을 헌당했다. 그달 12일에 헌당식이 있었다. 일동 찬미에 이어 임준호의 기도와 송치순의 취지 설명 직후 강영각이 음악 순서를 맡았다. 이후 황사용의 연설, 찬미대의 특송, 현 순의 연설, 김또라의 독창, 헌금에 이어서 김이제 목사가 축사하고 폐회했다. 그동안 재정상 문제로 착수하지 못하였는데 그해 9월에 미국 남감리교회 남학생기숙사가 건축되었다. 이에는 현 순, 안원규, 이지성과 함께 강영각의 주선이 컸다. 다음 달에 엡윗 청년회 임원 선출이 있었을 때 강영각은 포모나 대학을 졸업한 후 하와이로 이주하여 처음으로 엡윗 청년회 임원을 맡았다. 그는 통신국을 맡았고, 그 외 임원에는 회장 정월난 등이 있었다.
1925년 5월에 호항 교민총단회관에서 음악대장 강영각의 인도로 2시간이나 음악을 선사했다. 이날 많은 동포가 참석할 수 있도록 무료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 달 6월에 하기 방학 졸업생을 위한 축하식이 있었다. 학생 연맹회가 주최하였는데 회장 강영각이 만찬회를 준비하여 여러 가지 재미있는 순서를 진행했다. 그달에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호항을 방문한 서재필 박사를 환영하는 한인대회에 한미보 발행인이었던 강영각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서 박사를 환영했다. 재정적 한계로 여러 번 정간을 겪으면서도 그는 한인 소년과 한미보를 통해 하와이 청년사회의 계몽을 이끌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합을 강조하였다. 그달에 연합운동을 고취하기 위하여 정원명 회장 중심으로 단산시보가 간행되었고, 강영각은 현 순 등과 함께 이사로 관여했고, 그동안 주필로 재직하던 영 코리아를 차병수에게 넘기고, 호항 서양 영문 매일보인 애더버타이스(Advertise)로 자리를 옮겼다.
1925년 8월에 호항 한인감리교회 주일학당을 증진하기로 하고 매주 금요일에 목사 사택에서 모여서 가르칠 성경 공과를 미리 준비하기로 하였다. 당장은 정월라였고, 교사는 강영각을 위시하여 박에스더, 문인희, 임준호, 현피득, 문또라, 정만용이었다.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와히아와는 꾸준히 발전하여 미국 육군 스코필드 바랙스와 연계된 산업이 발전했고, 파인애플 농장이 중요한 우대책이었다. 그래서 와히아와는 거대한 파인애플 농장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한인이 호항 다음으로 많이 거주하여 한인감리교회도 발전했다. 강영각은 전도사로서 청년 목회를 담당하여 1928년에 부임한 안창호의 목회를 보조했다. 강영각이 1928년에 하와이 펄시티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을 때 안창호 목사에게 이말리를 소개하여 피아노를 연주하여 예배를 도왔다. 1929년 9월에 강영각은 한인 청년 학생을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에 초청하여 ‘오아후 농촌한인학생대회’를 열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총 90명의 중고등학생이 모였는데 와히아와뿐만 아니라 와이아루아, 스코필드, 구니아 그리고 에와에서도 참가했고, 이 모임에서 김피터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강영각은 주일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1930년에 주일학교 교사를 위한 성경반이 사택에서 있었다. 그는 성가대에 관여하지 않았다. 학생 성가대는 18명으로 조직되었는데 성가대 지휘자 정에스더 부인의 인도로 금요일 저녁 8시에 교회에서 연습했고, 어른 성가대는 강Y옥 지휘자의 인도로 목요일 저녁에 연습했다.
1930년에 10대 학생으로 구성된 학생회외에 엡윗 청년회가 있었고, 정에스더, 박플로라, 김애니, 김엘라, 이살로메, 김헤이즐, 천영순, 최플로렌스, 김그레디스, 김릴리안, 위제이슨, 김히람, 유월리스, 장찰리, 김 존, 김영남, 김호성, 김제임스, 김제이콥, 김토마스, 임토마스, 김해리 그리고 김히람이 가담했다. 1930년대에 엡윗 청년회가 자주 주일 아침 예배를 주장했는데 이때 강영각이 설교하였다. 그가 ‘인간 창조의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제하로 설교했을 때 유메리가 사회를 보았고, 김애니가 성경을 봉독하였다. 때때로 청년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김해리의 인도로 박플로라가 성경봉독을 한 후 김릴리가 ‘신년 결심’이라는 제하로 설교하였을 때 강영각이 영어가 어눌한 노인들을 위하여 통역하였으며, 이도로시와 김이비다가 헌금위원이 되어 회중이 헌금을 하는 동안에 김애니가 특송을 하였다. 강영각이 예배를 인도할 때도 있었다. 1930년 12월에 10대 학생으로 구성된 학생회가 성탄축하회를 준비했다. 김발남이 요셉으로, 김혜성이 동정녀 마리아와 그리고 임토마스와 김월리스와 임조셉은 세 명의 동방박사로 분장했고, 차제시는 크리스마스 촛불을 담당했다.
다른 한편 강영각은 민족 운동에도 관여했다. 1931년에 국민보의 영문 주필로 재직하였으며, 그해 흥사단에 입단하여 단우 번호 261번으로 민족 운동에 적극 활동하였다. 이듬해 4월에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투탄의거에 고무된 와히아와 지방의 한인과 함께 임시정부 와히아와 후원회를 조직하고, 독립자금을 마련하였으며, 1933년에 와히아와 상동 한인감리교회에서 있었던 삼일절 행사에서 ‘만주의 문제’로 영어 연설을 하였다.
1933년에 와히아와 교회 안창호 목사가 휴가로 잠시 귀국한 후 강영각이 대리로 주일 예배를 주장하였다. 그는 선생으로 불리었으나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해 7월에 임두화 목사가 주일 아침 예배에서 설교하였고, 한국 소식도 전했다. 안 목사는 그해 8월에 도미했다. 다음달인 9월에 강영각은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에서 이곳에 거주하던 최정호의 딸 메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한민보는 이들 신혼부부를 두고 하와이 청년계에 이상적인 가정을 성립했다고 보도하여 그가 청년 목회의 사표임을 알 수 있다.
1934년에 강영각이 주선하여 청년 전도대를 조직하였다. 호항 일곱 교회 청년 남녀로 조직한 이 복음단은 그해 6월에 벌써 네 교회의 초청으로 주일 예배를 주장하여 많은 환영과 좋은 호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제창하여 그곳 두 교회 청년을 합동하여 청년연합회를 조직하여 배달민족의 발전과 행복을 도모하였는데 이듬해 회원이 100명에 달했을 때 회장은 문덕만이었다.
호항
강영각이 호항으로 이주했다. 1940년 4월에 모국 기근 구제회 발기회가 조직되었을 때 회장 양유찬 아래 한문 서기 도진호 등과 함께 강영각은 영문서기로 선정되었다. 그해 12월에 호항 대학생회 임원 피선이 있었을 때 강영각은 통신 서기로 선임되었다. 1944년 2월에 강영각이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여 ‘새 결심과 새 사업’이라는 제하로 설교하여 일반 교인이 감동을 많이 받은 후 폐회 전에 교회 자립과 경상비를 작정하였는데 작정한 사람과 금액은 아래와 같았다. 로선 여사가 100달러, 유진석이 60달러, 한경선과 노진국과 선우혁과 임성우가 각각 50달러, 김해리와 현도명이 각각 30달러, 문순칠과 이경희와 박신애와 임창진과 이환일과 김예준과 이애경과 이백용과 위인산과 안창호가 각각 25달러, 김광호와 정병화와 박인규와 정앨니스와 김병율과 최순범과 이일탁과 김학조와 최병권이 각각 20달러, 손성범과 진연철과 유진간과 이필모와 박유근과 오필선과 선우철과 박대원과 박조이와 이봉수가 각각 15달러, 조순업과 박도현과 김신호와 김순연과 위태은과 황묘근과 김화안과 함홍식과 김상원과 전신호와 김펄은과 김정현 부인과 양기준과 위제곱과 이모세와 이화수와 김효심과 황용덕과 최태임과 임복수와 한필립과 장금환과 박용섭과 임영택과 송세환과 이금성이 각각 10달러, 김밀니사가 6달러, 박영하와 권봉학과 조숙자와 홍영철과 최재순과 이복덕과 강인덕과 이애바와 고선신과 김예윤과 이덕이와 김백원과 전승환과 전복만과 성매리와 최승률과 김정구와 변응환과 정도리스가 각각 6달러, 변익보와 박경오가 각 3달러, 한영후가 2달러 그리고 최마줄이 1달러였다.
1941년 7월에 호항에서 자본금 5,000달러를 모금하여 한인연합인쇄소가 문을 열었는데 사장 안원규 아래 강영각은 주무로 활동했다. 그해 12월에 동지회와 국민회가 연합으로 연합한민보를 발행하면서 강영각이 주필 외에도 이사회 서기까지 맡았다. 1944년에 강영각은 흥사단 제12반 하와이 반장이 되었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방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독립금 수봉위원회 훈련부에서 활동했다.
1946년 2월 4일에 강영각이 향년 49세에 심장병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조국 독립 운동을 기려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97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