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정인수(1876-1959)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정인수는 1876년 7월 18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28세가 되던 1904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자로 수속한 후 아내를 한국에 두고 혼자서 제물포를 거쳐 일본 고베에서 코리아 선박을 이용하여 그해 11월 1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정인수는 오아후섬의 와일누아로 이동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하였다. 그는 이곳 농막에서 한인감리교회에 다녔다. 한국에서 장로교인이었지만 하와이에 온 후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 감리사였던 조지 L. 피어슨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1909년 3월에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에는 언어별로 영어, 일본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목회부가 따로 있었다. 홍치범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인 총무를 맡았다. 그는 하와이섬, 가와이섬, 마우이섬 그리고 오하우섬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한인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그들의 시험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가와이 섬에는 다른 유색인종 감리교회는 없었고, 한인감리교회만 있었는데 막가웰리 외에도 엘리엘리, 가파, 리휘에 한인감리교회가 있었다.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는 그중에 교세가 제일 컸다. 학습교인이 119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86명이었다. 가와이섬의 네 교회 전체 학습교인이 227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58명이었으며, 하와이 네 개 섬에 유색인종 감리교인으로 학습교인은 625명이었고, 세례교인은 712명이었으므로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가 작은 교회는 아니었다.  

그해 3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모인 제4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는 정인수를 가와이섬에서 가장 교세가 큰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서 김봉기와 더불어 파송하였다. 막가웰리 교회는 네 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이 중 세 곳에 자체 예배당이 있었는데 이들 자체 예배당의 가치는 총 700달러에 해당했다. 

그달에 김이제 목사를 막가웰리 교회에 파송하였다. 그는 막가웰리의 네 교회뿐만 아니라 긱가하와 엘리엘리 그리고 골로아에 있는 교회를 담당하는 순회 목사였다. 엘리엘리 교회와 긱가하 교회에 권사가 파송되었으나 골로아에는 권사마저 파송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이제 목사가 다른 지역을 순회 방문했을 때는 김봉기와 더불어 정인수가 막가웰리 네 교회를 나누어 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는 친일 성명서를 발표한 미국인 더름 W. 스티븐스를 1908년 3월에 상항에서 사살한 이른바 상항 의거가 발생하였다. 이들의 재판비용을 위하여 이듬해 5월에 기부한 정인수 등 막가웰리 거주자 중 대부분은 이곳 교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최기로, 김경석, 안선화, 최종만, 공명운 부부, 김진호, 이달준, 박성백, 신치중, 박성선, 성봉준, 이경중, 김신환, 박준봉, 백수남, 장귀완, 심용이, 신태봉, 김병이, 김근신, 박명준 가정, 황봉우 부부, 이풍운 부부, 박성인, 이성도, 박명준 가정, 김상준, 양성학, 이경수, 방창룡, 신임경, 강원실, 윤태준, 김봉서, 문순서, 최성찬, 송인식, 황봉우, 김춘서였다.

1910년 3월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의 통계를 볼 수 있다. 작년과 비교할 때 학습교인은 69명이 적은 50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7명이 많은 103명이었다. 교회학교는 한 개 처가 더 많은 다섯 개 처였는데 교직원은 5명이 적은 14명이었으나 등록한 학생은 18명이 많은 133명이었고, 평균 출석률은 작년보다 3명이 많은 103명이었다. 교회학교 한 개 처가 신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년에 없었던 엡워스 청년회 고등부가 개설되어 등록한 학생이 44명이었던 점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헌금은 작년에 비해 14달러가 적은 58달러로 저조했다. 헌금 내역을 보면 선교비가 18달러가 많은 30달러였는데 모두 해외선교부 교회헌금이었고, 주일학교 헌금과 내지 선교/교회확장부 교회헌금과 내지 선교/교회확장부 주일학교 헌금은 아예 없었다. 교육비가 3달러 적은 1달러로 모두 교회 일반 교육비였고, 어린이 기금은 아예 없었다. 주일학교 헌금이 2달러 적은 1달러였는데 이는 교회를 위한 헌금이었고, 주일학교를 위한 헌금은 없었다. 흑인보조회 헌금은 아예 없었고, 미국성서공회 헌금이 1달러 적은 1달러, 부인 내지선교부 헌금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본 교회 주일학교를 위하여 25달러를 헌금하였다. 지난 1년간 해외 선교비가 30달러였고, 본 교회 주일학교 헌금이 25달러인 점에서 해외선교와 주일학교에 큰 관심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예배당 건물은 작년과 같이 평가되었다.

1910년 3월 16일부터 4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5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열렸다. 이 연회에서 두 가지 특별한 일이 있었다. 첫째, 한인교회에 엡워스 청년회가 조직됨에 그달 19일에 호항 한인교회에서 엡워스 청년회 한인 지방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김유순 목사, 제1부회장에 민찬호 목사, 제2부회장에 조YY, 제3부회장에 최HC, 제4부회장에 김DS, 서기에 조윤Y 그리고 재무에 한CM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한인 청년 지도자의 조직적 육성을 기대할 수 있었다. 둘째는 막가웰리에 거주하던 러시아 노동자의 설교자 파송 요청이었는데 농주가 설교자 사례비를 지급하겠다고 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만주 할빈에서 이곳으로 이민을 온 러시아 노동자 가정은 언어가 달랐음에도 막가웰리 한인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들이 할빈 러시아인 목사와 연락한 후 러시아 교회 지도자가 미국으로 오게 되어 몇 주안에 러시아인 감리교회 개척이 눈앞에 다가왔다. 러시아인 감리교회 탄생에 한인교회가 일조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됐다. 

1910년에 개최한 제5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정인수는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재차 파송을 받았다. 1911년 1월에 보고된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 통계를 살필 때 작년에 비해 교세가 저조했다. 학습 교인은 5명이 적은 45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8명이 적은 85명이었다. 교회학교수는 보고되지 않았는데 교직원은 2명이 많은 16명이었으나 등록한 학생은 21명이 적은 112명이었고, 작년에 조직한 엡워스 청년회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19명이 적은 25명이었다. 이에 더하여 지난 1년간 두 명이 소천하여 큰 슬픔을 당했다. 그러나 헌금 상황은 호조였다. 선교비가 3달러 많은 33달러였다. 작년에 없었던 내지 선교/교회확장부 교회헌금이 30달러였고, 주일학교부 헌금이 작년과 같이 1달러였으며, 작년에 없었던 흑인보조회 헌금은 1달러였고, 미국성서공회 헌금이 작년과 같은 1달러였다.  

정인수는 남새Y와 함께 권사로서 1911년에 파송받았고, 1년 전과 같이 막가웰리와 긱가하 지역을 위한 순행목사 김이제와 지방전도사 차윤중도 파송받았다. 그런데 1912년 이후 5년간의 하와이 선교연회 보고서를 찾을 수 없으나 정황적으로 볼 때 그가 계속 권사로 파송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교회 활동 외에도 그는 1914년 6월에 박용만이 오하우섬 가할루의 아후마누 농장에서 국민군단을 창단할 때 정인수는 군단 경리부 자부로서 활동하였다.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오아후섬의 도시 와히아와는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산업의 중심지였다. 최첨단 파인애플 회사가 이곳에 있었고, 도시 중앙에 있던 통조림 공장 주변에 여러 노동자 캠프가 있었는데 이 중에 한인 노동자 캠프가 있었다. 정인수가 이곳에서 노동하고 있었다.

1916년 2월 17일부터 4일간 호항 제일감리교회에서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의 사회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위의 하와이 선교연회는 정인수를 오아후섬에 있는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에 서진S와 함께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고, 임준호 목사는 3년째 파송을 받았다. 1915년에 지방전도사와 권사가 각각 한 명이었는데 1916년에는 지방전도사 2명에 권사 4명이 파송을 받았으므로 와히아와 한인촌과 한인감리교회가 급격하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해 파송 받은 권사는 정운서, 송치순, 곽종태 그리고 남덕도였다. 

와히아와 교회는 1907년에 시작되었다. 임종수 지방전도사가 지역 공립학교 교실을 빌려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1923년에 예배당을 건축할 때까지 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예배를 드렸다. 창립 당시 와히아와는 성장하는 마을이었고, 이곳에서 한인이 노동하면서 한인촌이 형성되었다. 그는 배영학교도 개교하여 어린이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16년 2월에 보고된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따르면 학습교인이 45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15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3명의 교직원이 있었고, 등록한 학생은 35명이었고, 엡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은 25명이었으며, 한 해 동안 드린 헌금이 26달러였고, 지난 한 해 동안 지출한 비용과 연료비와 전기비가 13달러였다. 그런데 1917년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그의 사역 열매를 확인할 수 없다.

직접적인 교회 사역 외에도 정인수는 한인 사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15년에 하와이 지방총회 대의원 의장으로 재직하였고, 1916년 1월에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지방총회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그해 6월에 총회장 홍한식 목사가 사퇴하여 정인수가 총회장까지 역임하였는데 이듬해 신임 총회장 안현경은 정인수의 근로를 표창하여 25달러 가격의 은잔 한 개를 선사하였다. 그리고 이화학당 하란사 교수가 중심이 되어 서울 정동감리교회에 오르간 설치를 꾀할 때 1917년 10월에 정인수가 50여 명의 헌금 명단에 거론되었다.

1918년 하와이 선교연회는 정인수를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임준호 목사가 순회 목사로, 정운서가 권사로 파송되었다. 그달에 보고된 와히아와 교회 통계에 따르면 학습교인이 28명이었고, 세례교인이 50여 명이었으며, 주일학교가 두 개 처에 있었고, 교직원은 6명이었으며, 학생은 44명이었고, 엡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이 18명이었다. 한 해 동안 드린 헌금이 342달러였는데 이 중에 훈련비용으로 30달러, 다른 목적으로 312달러였으며,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지난 1년간 378달러를 헌금하였다. 

1919년 3월,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정인수가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다시 파송을 받았다. 그해 그는 전시 미주 금력 찬조에 손을 펼쳤고, 독립 의연을 3차례 하였으며, 북미한인교회 공의회에 5달러를 헌금하여 지역 교회 선교를 넘어 사회 기부에 들어섰다. 임준호 목사, 송치순 지방전도사, 남덕두 권사와 김유걸 권사와 함께 1920년에도 정인수는 와히아와 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았으나 더 이상 파송을 받지 못했다. 정황적으로 볼 때 정인수는 1909년부터 1921년까지 12년간 막가웰리 교회와 와히아와 교회에서 권사와 지방전도사로 주의 일을 감당했다.

이후 정인수는 직접적인 선교사역에서 떠나 사회활동과 교회활동에 관여하였다. 1921년 10월에 안원규 등 13명과 함께 1만 달러 고본금으로 호항에 간장과 토장 만드는 제장회사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고, 1928년에는 호항에서 조용하 등과 함께 대한 민족 통일촉성회를 조직하였다. 호항 기독교회 목사 이종관이 1934년 3월에 초대한 각 교회 목사 친목회에 정인수도 참석하였고, 이듬해 2월에는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참의원 9인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10월에 중일 전쟁이 발발한 비상시기에 동지회와 국민회가 통합하기로 하였을 때 정인수는 박종수와 박상화와 함께 국민회 대표가 되어 동지회 대표 안현경, 이종관, 차신호와 함께 통합을 꾀하여 이듬해 11월에 연합회의를 열어 6천 동포의 대단결을 이루어냈다.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하다가 호항으로 이주한 정인수는 양복점을 경영하였다. 3남 3녀를 출산한 아내 곽인순이 소천한 지 17년이 되던 1959년 1월 3일에 그는 82세로 호항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인근 마키키 공원묘지에 안장된 아내 옆에 묻혔다. 

damien.sohn@gmail.com

02.1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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