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한영숙(1869-?)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한영숙은 1869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23세였던 1892년경에 한경일과 결혼한 그는 두 아들 홍수와 곤수를 두었다. 그는 36세 때인 1905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을 꿈꾸고, 31세의 아내와 함께 6살 된 홍수와 3살 된 곤수를 데리고 하와이를 향했다. 그들은 제물포를 거쳐 일본에서 ‘차이나’ 기선에 승선하여 그해 5월 29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호놀룰루에 온 그는 로마자 알파벳으로 Han Young Suk 또는 Han Young Sook으로 통했다.

1910년에 한영숙이 인구조사에 응했다. 그는 오아후섬 와히아와 농장에서 노동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자녀는 다소 변화가 있었다. 홍수는 길수로 이름을 바꾸었고, 곤수는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하와이에 도착한 그해에 낳은 셋째 아들을 둘째 아들 이름인 곤수라고 불렀다. 그해 와히아와에는 한인감리교회가 없었다. 그 후 그는 더 나은 노동조건에 따라 오아후섬 와히아와에서 큰 사탕 제련공장이 있던 마위섬 스프레클스빌로 이동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이곳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사탕 제련공장

 

마위섬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1916년 2월 17일부터 21일까지 리온 L. 루프보루 목사가 시무하던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미국 북감리교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그해에는 직원으로 회장, 감리사, 총무, 언어별 총무 (3명), 통계 총무, 통계 부총무 (2명), 재무, 부재무(2명), 한국어 통역관 등 13명의 직원이 있었다. 이들 직원 중에 한국인이 4명이었으므로 한국인 직원이 전 직원의 30%를 차지하였다. 김CH 목사가 한국어 총무로 재직했고, 우남 이승만이 한국어 통역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임찬호 목사가 통계 총무를 돕는 두 명의 통계 부총무 중 한 사람이었으며, 김이제 목사가 재무를 돕는 두 명의 부회계 중 한 사람이었다. 그해 감리사는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였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 산하에 한국인으로 정회원과 준회원과 준회원 과정자가 14명이었다. 정회원은 3명이었는데 홍치범 목사가 10년간 활동했고, 김이제 목사가 9년간 사역했으며 그리고 홍한식 목사가 있었다. 준회원은 6명이었는데 임준호 목사와 조연택 목사와 이선일 목사는 과정을 이수하였고, 이관묵 목사, 박세환 목사, 김재성 목사는 4년 차로 연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준회원 과정에 있었던 한국인은 5명이었는데, 차윤중이 2년 차로 연수중에 있었고, 한명관, 한YC, 박종수, 박기홍이 1년 차로 연수중이었다. 이들 한국인은 모두 캘리포니아 연회 소속이었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있었던 감리사 프라이 목사의 보고 중에는 호놀룰루 한인 감리교회의 건축이 포함되었다. 6,922달러의 헌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빚 없이 예배당을 헌당하였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내지선교/교회확장부에서 2,391달러를 기부하였고, 미국 동부 로드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에 있는 목사가 10달러를 헌금하였으며, 그 외 부족액은 하와이에서 모금하였다.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예배당 건축은 하와이 선교연회 모든 회원이 감탄했고, 한인교회는 자랑스러워했다. 

1916년 하와이 선교연회에는 마위섬에 두 한인 감리교회가 있었다. 하나는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하나 한인감리교회였다. 하와이 선교연회는 한영숙을 마위섬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와 함께 김이제 목사를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보냈다. 그런데 그달에 보고된 연회록에는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교세와 파이아 한인감리교회 교세가 함께 보고되어 있어서 따로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확인할 수 없다. 이들 두 교회에는 세 곳에 주일학교가 있었고, 7명의 주일학교 교직원이 있었으며, 등록된 주일학교 학생은 45명이었고, 엡워스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이 41명이었으며. 학습교인이 29명이었고, 세례교인은 55명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수치가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의 통계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파이아 한인감리교회와는 달리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는 자체 예배당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시가가 750달러였으며, 지난 1년간 예배당 건물을 위해 67달러가 지출되었다.

이듬해인 1917년의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한영숙의 1년간의 사역 열매를 읽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파송 여부도 확인할 수 없으나 정황상으로 그가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재차 파송을 받았을 것이다.

미국 북감리교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1918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하와이 선교연회 신임 감독인 애드나 W. 레오나르드 목사가 사회를 맡았고, 감리사는 역시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였다. 하와이 선교연회 한국인 직원이 다소 변화가 있었다. 임준호 목사가 한국어 사역 총무였으며, 방화중 목사가 부재무 겸 한국어 통역관을 맡았고, 송헌주가 2명의 통계 부총무 중 한 사람이었다. 


1916년 하와이 선교연회 한인 권사 파송 (제일 아래에 한영숙의 이름이 있다. 하와이섬은 오기로 마위섬이다)

 

그해 프라이 감리사는 두 가지 흥미로운 보고를 하였다. 하와이 군도 내에 일본인, 필리핀인 그리고 한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학교 통계와 신생아 출산 통계였다. 하와이 군도에 1917년 10월 31일 현재 17,508 학교가 있는데 이 중 공립학교가 16,107개, 사립학교가 1,401개였다. 일본인 지역의 학교가 세 민족 중 가장 많았는데 총 16,298개 중 공립학교가 15,080개, 사립학교가 1,218개였다. 일본인 지역 다음이 필리핀인 지역의 학교였는데 총 649 개로 공립학교가 607개, 사립학교가 42개였다. 한국인 지역 학교는 총 561개로 가장 작았는데 공립학교가 420개, 사립학교가 141개였다. 

1917년 6월 30일 현재 신생아 출산 통계에서도 학교수와 같은 차례로 일본인, 필리핀인 그리고 한국인의 순이었다. 일본인 신생아가 제일 많이 출생하였는데 총 4,260명 중 남아가 2,321명, 여아가 1,939명이었고, 그다음이 필리핀인 신생아로 총 364명이 출생하였는데 남아가 194명, 여아가 152명이었는데 한국인 신생아는 총 144명으로 남아가 82명, 여아가 62명이었다.  

그런데 1918년 1월에 한영숙이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대의회의 소란에 휘말렸다. 오아후섬 동부 구역 특파 전권위원 이재수 등과 같은 섬 서부 구역 특파 전권위원 신응문 등이 그달 4일과 9일에 발표한 공고서에 따르면 하와이 총회 금년도 대의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대의원 중 의견이 갈렸는데 박원길 등이 제출한 총회장 안현경에 대한 불신임안에 대항하여 한영숙 대의원 등은 총회장을 엄호하는 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한 달 동안 끌었다. 

위의 사건이 마무리되던 3월에 한영숙은 하와이 선교연회로부터 마위섬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삼 년째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하와이 선교연회는 그 외에도 세 사람을 마위섬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로 파송하였다. 홍한식 목사가 담임목사로 파송을 받았으며, 그와 함께 박운택이 권사로 파송 받았고, 김성K는 지방전도사로 파송 받았다. 

그해 3월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의 교세를 보면 한영숙이 권사로 파송 받은 1918년의 형편을 알 수 있다. 세례교인이 8명이었고, 유아세례교인이 14명이었으며, 학습교인이 58명이었다. 그리고 교회학교가 세 곳에 있었고, 교직원이 8명이었으며, 교회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59명이었고, 엡워스 청년회에 등록한 학생인 24명이었다. 예배당 하나가 있었고, 당시 시세로 750달러였는데 한 해 동안 예배당을 위하여 227달러를 지출했다. 훈련비용으로 40달러를 헌금했고, 기타 목적으로 28달러를 헌금했다.

이듬해인 1919년 3월 6일부터 9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감독 매트 S. 휴즈 목사의 사회로 미국 북감리교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있었다. 그달에 보고된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의 교세를 통해서 한영숙의 1년간의 사역 결과를 가름하게 될 텐데 교세 보고서가 없어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하와이 선교연회 직원에 큰 변화가 있었다. 한국어 등 언어별 사역 총무 제도가 없어졌으며, 한국어 통역관 자리도 없어졌고, 직원으로 한국인이 한 사람도 세워지지 않았다.

 

마위섬 파이아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

 

1919년 3월에 있었던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한영숙을 마위섬 파이아 한인감리교회 지방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작년까지 함께 동역했던 홍한식 목사가 마위섬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파이아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고, 권사는 파송되지 않았다. 

한영숙이 파송을 받은 파이아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살피면 한영숙이 1년간 사역한 교세를 살필 수 있을 텐데 찾지를 못했다. 그러나 1920년 2월에 보고된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마위섬의 하나 한인감리교회와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에 대한 교세는 소개되었지만, 파이아 한인감리교회 교세가 소개되지 않아서 그곳 농장 한인 노동자가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한인감리교회가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파이아 지역에는 한국인 교회지도자를 파송하지 않았고, 단지 하나 한인감리교회와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만 한인 목사를 파송하였는데 전자에 정YW가 임시목사로 파송되었고, 후자에 홍한식 목사가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1920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은 하와이 군도 한국인 교회사역의 열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와이 선교연회 감리사 프라이 목사가 진단한 하와이 군도의 한국인 사역에 따르면 하와이 선교연회가 재정적인 지원을 많이 하였고 열심 있는 한국 교회 지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사역이 급격하게 줄어든 이유가 하와이 한인 사회의 정치적인 갈등과 한인 지도자 간의 개인적인 갈등이었다. 파이아 한인감리교회 폐쇄 원인도 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한영숙은 1916년 2월부터 1920년 2월까지 4년 동안 마위섬 스프레클스빌 한인감리교회와 마위섬 파이아 한인감리교회에서 하와이 선교연회로부터 권사와 지방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사역을 감당하였고, 한인 사회에서 크리스천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48세가 되던 1922년 9월에 한영숙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신요 마루 기선을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한국을 방문한 후 그의 이름은 하와이 선교연회와 지역 신문 등에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damien.sohn@gmail.com

02.0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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