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양흥렴 (1878-1952)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양흥렴 (梁興廉)은 1870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덟 살 적은 곽선일과 결혼하여 윤용, 현이 그리고 채용 등 세 자녀를 낳았다. 하와이에 온 후 부인 곽선일이 수산나로 소개되었고, 한자표기로 郭壽山羅로 통했으므로 결혼 전후에 감리교 신자였던 것 같다. 그와 그의 가정은 후동에서 거주하였다는데 위치가 어딘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양흥렴은 35세가 되던 1904년 9월에 청운의 꿈을 안고 하와이 노동 이민을 선택했다. 그는 가족 6명과 함께 하와이로 향했다. 27세의 부인, 44세의 과부 장모 김복소, 15세의 과부 처제 차근순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6세인 장남 윤용, 4세인 차남 현이, 삼남 채용을 데리고 몬골리아 선박에 승선하여 하와이로 향했다. 그달 26일에 호놀룰루에 이주한 후 그는 Hung Yup (또는 Yerp) Yang으로 통했다.

1915년경에 양흥렴은 홍진표와 함께 국민회 총회관 건축문부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신한민보는 가와이 긱가하 대의원 이홍기, 하와이 하위 대의원 김규섭, 가와도 동부 참의원 김윤배 그리고 오아후 와히아와 대의원 이정건이 보낸 ‘중앙총회에 온 하와이 대의원의 공첩’이라는 제하의 글을 게재하여 당시 총회장 김종학의 재정 유용을 밝혔다. 위의 조사위원에 따르면 그가 $1,345.64 달러를 유용했으므로 반납하라는 취지였다. 

 

와히아와 기독교회

 

양흥렴은 전도사로서 와히아와 기독교회를 섬긴 것 같다. 본 교회 담임목사는 1928년에 본 교회에 부임한 삼일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사람인 42세의 박동완이었다. 

1930년에 양흥렴은 와히아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한인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교회를 섬긴 자비량 전도인이었다. 그의 부인 수산나는 자기 집에서 양복장이로 활동했다. 그 해 연방정부가 실시한 인구조사에 다수의 한인을 볼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박동완의 명성을 따라 와히아와 기독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이다. 가정을 가진 자는 34세의 윤동천 가정 (33세의 부인 영구, 12세의 동오, 10세의 아령, 9세의 애니, 4세의 다니엘, 3세의 덕환, 1세의 엘렌, 그리고 62세의 과부 어머니 마리아), 46세의 이만기 가정 (48세의 부인 박수은, 11세의 매리와 8세의 룻), 48세의 이맹숙 가정 (31세의 부인 김 룩, 2세의 태용), 48세의 이범숙 가정 (40세의 부인 이위분, 15세의 흥근, 13세의 호순, 10세의 헌줄, 8세의 순분, 5세의 히분, 3세의 손분, 9개월의 구분), 52세의 정도원 가정 (33세의 부인 정사원, 12세의 일흥, 11세의 몬흥, 7세의 애섭, 6세의 지흥, 5세의 인섭, 2세의 진흥), 35세의 신필립 가정 (26세의 부인 신낸시, 9세의 룻, 8세의 이테르, 5세의 매리, 4세의 데이빗, 3세의 넬리, 1세의 대이시), 74세의 배군원 가정 (54세의 여동생 주애니, 17세의 질녀 주 다이아나, 5세의 조카 주 조), 47세의 송숙순 가정 (34세의 부인 복필준, 9세의 하순, 7세의 조지, 5세의 성근, 2세의 성문, 9개월의 수잔), 53세의 문형식 가정 (33세의 부인 김매순, 9세의 옥경, 7세의 경임, 5세의 경조, 4세의 경원), 51세의 손진수 가정 (38세의 부인 손호순, 15세의 세실리아, 13세의 베티, 12세의 앨리스, 10세의 엘레트, 9세의 귀봉, 8세의 왈탐), 37세의 문토마스 가정 (28세의 부인 젤리아마), 49세의 선윤선 가정 (39세의 부인 이기남, 10세의 긴순, 8세의 은풍, 6세의 경희, 3세의 경은), 47세의 김누형 가정 (50세의 부인 김웅김), 43세의 김명식 가정 (28세의 부인 김마가렛, 9세의 엘리자, 8세의 새라, 5세의 제이슨, 3세의 이피), 42세의 유진감 가정 (32세의 부인 이복순, 13세의 운준, 11세의 도라, 9세의 새라, 7세의 윌라, 5세의 지준, 3세의 인준, 2세의 경준, 15세의 질녀 메리, 72세의 어머니 박 씨), 50세의 김흥순 가정 (39세의 부인 김영진, 14세의 레이철, 12세의 플로렌스, 10세의 에밀리, 8세의 아이다, 6세의 조셉 등), 54세의 김용찬 가정 (44세의 부인 차잔주, 15세의 헬렌, 13세의 에스더, 8세의 에마, 4세의 로즈), 40세의 이식천 가정 (32세의 부인 박니예, 13세의 헌화, 11세의 정긍, 9세의 군수, 6세의 옥기, 4세의 성섬), 49세의 변이포 가정 (39세의 부인 차영옥, 14세의 에스터, 12세의 겁수, 11세의 히수, 9세의 필수, 6세의 검수), 34세의 노리차드 가정 (29세의 부인 베시, 8세의 비아트리스, 7세의 베티, 5세의 엘렌, 3세의 로레타, 2세의 룻, 1달의 디오르), 47세의 유창근 가정 (36세의 부인 해나, 15세의 유종, 13세의 시징, 9세의 동닙, 6세의 기옥, 4세의 기성, 1세의 동순), 37세의 신성호 가정 (27세의 부인 김선조, 6세의 나오미), 42세의 류칠용 가정 (34세의 부인 명영, 5세의 순근, 4세의 빈영), 51세의 맹중호 가정 (44세의 부인 헌산), 47세의 김백현 가정 (39세의 부인 메리, 자녀: 17세의 매누엘, 16세의 에브린, 14세의 존, 13세의 로즈, 11세의 매기, 10세의 아벨, 6세의 조셉), 48세의 성봉준 가정 (31세의 부인 봉순, 11세의 경호, 9세의 경수, 7세의 경문, 4세의 경운, 2세의 경년), 52세의 염왈터 가정 (48세의 부인 애니, 5세의 룻), 33세의 김정환 가정 (27세의 부인 실라, 5세의 한주, 4세의 토마스, 1세의 조지), 25세의 유아가 가정 (24세의 부인 수잔나, 3세의 캐리, 2세의 한요, 68세의 아버지 유 완, 63세의 어머니 김 순), 52세의 최승찬 가정 (51세의 부인 마블, 15세의 스탠리, 10세의 왈리스), 39세의 최선주 가정 (26세의 부인 완순, 9세의 스미스, 1세 형문), 38세의 최천덕 가정 (36세의 부인 김 련, 16세의 영호, 7세의 앨리스, 6세의 베시, 4세의 사무엘), 45세의 김앤드류 가정 (25세의 부인 로즈, 8세의 복순, 7세의 접순, 5세의 복기, 2세의 순기), 45세의 천병찬 가정 (41세의 부인 신애, 10세의 영순, 8세의 영만, 5세의 영도, 3세의 영희), 55세의 김경옥 가정 (39세의 부인 김화안, 12세의 왈리스, 11세의 애니, 8세의 치옥, 4세의 복희, 1세의 헬렌), 59세의 김한균 가정 (46세의 김영한 부인, 16세의 순복, 11세의 순한), 49세의 이경운 가정 (35세의 부인 이수잔나, 11세의 영군, 9세의 이비다, 5세의 영희, 2세의 영춘, 1세의 영월), 48세의 이경운 가정 (27세의 부인 이정희, 4세의 희순), 46세의 손학손 가정 (29세의 부인 이두리, 6세의 도리스, 5세의 옥순, 4세의 기순, 2세의 옥군, 1세의 옥남) 등이 있었다.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1930년대)

홀아비 가정도 있었다. 55세의 홀아비 한박릴 가정 (19세의 덕천과 16세의 덕근), 57세의 홀아비 김자훈 가정 (9세의 귀은, 7세의 귀인, 3세의 세기), 58세의 홀아비 한귀완 (15세의 윤동, 12세의 해동, 10세의 경항, 9세의 선헌, 7세의 영헌, 4세의 순헌, 2세의 순동), 47세의 홀아비 문정현 가정 (14세의 덕만, 12세의 덕성, 10세의 덕순, 8세의 덕영, 69세의 어머니 길순) 등이 있었다. 

독신이거나 홀아비였던 자 중에는 49세의 손응삽, 45세의 강분조, 59세의 김치구, 48세의 장근손, 43세의 장호리, 48세의 안농호, 44세의 유지살, 54세의 시흥식, 45세의 신라문, 49세의 김창훈, 49세의 김기호, 54세의 박천섬, 68세의 장익성, 52세의 최장영, 44세의 안창호, 4세의 장만권, 67세의 김명준 등이 있었다.

그해 추수감사절은 와이아와에 있는 기독교회와 한인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드려졌다. 신한민보는 “와이아와 두 교회에서는 감사절 밤에 아름다운 순서로써 매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 경절을 엄숙히 지켰다더라”라고 보도했다. 그해 11월 26일 저녁에 와히아와 기독교회는 양재용 학사를 맞이하여 환영하는 모임을 했다. 양흥렴의 차남인 그는 미국 본토에서 중기학을 공부하였는데 그날 그의 학업 성취를 축하하였다.

다음 달인 12월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는 위태할 지경에 있었는데 양재용이 목회하는 와이아와 기독교회는 전보다 더 확장된 모양이었다. 최근에 민찬호, 최창덕 그리고 홍치범 등 세 목사가 그 지방으로 가서 목회를 찬조한 결실이었다. 그달에 하와이 한인사회에 풍파가 있었는데 와히아와에 거주하는 동포는 중립을 취하였다. 양흥렴 등 이 지방 인도자들은 싸움을 말리느냐고 각 방면으로 운동하였고, 여러 차례 모여 의결한 결과 대표를 뽑아 동지회와 민단에 파송하였다. 그러나 아직 효과는 없었다.


오늘날의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오아우 섬 각 교회는 그해 성탄절을 위하여 굉장한 순서를 예비하였다. 아직 완전한 일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와이바우 지방에서는 24일 저녁에 가진다고 하였는데 와히아와 기독교회는 20일 저녁으로 계획하였다고 전해졌다.

1935년 1월 7일부터 3일간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제15주년 연회가 호놀룰루 스쿨 스트릿에 있는 한인기독교회당에서 있었다. 양흥렴은 박동완과 함께 와히아와 기독교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기타 참석한 자들은 호항 대표 김형식, 이종관, 조석진, 안현경, 박주범, 정운서, 힐로 대표 장 붕, 코나 대표 김순성 그리고 마위 파이아 대표 이은구였다. 먼저 박동환이 30분간 기도회를 인도하였고, 이어서 작년 연회 회장이었던 최선주가 개회를 선언한 후 각 지역 대표의 대표증을 조사하여 접수하였다. 호항 교회 신임 목사 김형식을 회중에 소개한 다음에 연회를 조직하였는데 양흥렴은 조석진과 함께 후보자 전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기타 임원으로는 회장은 김형식, 부회장은 정운서, 서기는 박주범, 규칙 위원은 박동환과 김형식, 통계표 위원은 조석진, 성만찬 위원은 김형식, 순서 위원은 박동완 그리고 재정위원은 이은구와 안현경으로 선정하였다. 

힐로 한인 기독교회 장 붕과 대표가 미처 출석하지 못하여서 6일까지 정회하였다가 7일 하오 7시에 속계하여 사무를 처리하였다. 작년에 행한 사업 가운데 기독교회의 다년 현안이던 교회 헌장과 성례문을 제정하였고, 교회보를 2호까지 발행하였으며, 캡텐쿡과 옥갈나 등 두 곳에 새로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내지 선교사업으로 이춘원 목사에게 1,282달러를 후원하여 임천 흥산동 인근에 있는 19개 교회의 708명의 교인을 섬기게 하였다. 

이날 각 교회 담임자의 보고가 있었는데 교회마다 곤란한 것도 없지 않았거니와 특필할 만한 일도 적지 않았다. 호항 교회가 김형식을 담임 목사로 청빙하였고,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힐로 교회가 예배당 대지 비용으로 3,000여 달러를 확보하였는데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장 목사와 교우들이 활동하였으며 외국 친구들이 사랑스럽게 도움을 준 까닭이었다. 이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에게 치하할 바였다. 그리고 이은구의 마위 파이아 기독교회에 대한 보고를 듣고 참석한 회원과 방청객 여러분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날 회장 김형식 목사가 사회한 가운데 와히아와 기독교회 담임목사인 박동완이 이사부장으로 선임하였다.

1935년에 부인이 소천한 후 양흥렴은 딸 앨시 가정에서 거주했다. 딸 부부는 세탁장에서 근무하였으므로 9세의 손자 보비스와 6세의 손녀 마거릿을 돌보았다. 양흥렴은 1964년에 향년 9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부인 곽수산나가 안장된 호놀룰루에 있는 오아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

11.11.2023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