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이은구 (1873-1958)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은구는 1873년 9월 8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서른두 살이 되던 1905년에 청운의 꿈을 안고 하와이 노동 이민을 추진하여 가족을 한국에 두고 홀로 그해 2월 26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로 이주한 그는 Eun Koo Lee로 통했다.

 

라하이나 한인 감리교회

1910년에 이은구는 하와이군도 마우이 카운티의 라하이나에서 거주했다. 그해 44세의 조윤택이 홀아비로 한국에서 태어난 15살 된 아들 재은과 함께 라하이나에서 거주했는데 그가 라하이나 한인 감리교회를 개척했다. 개척한 교회는 스톤 한인 캠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교회에 이은구가 출석한 것 같다. 

그해에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에 기부금을 낸 라하이나 거주 한인이 다수 있었다. 기부한 자들은 이은구를 포함하여 안석윤 등 50 여명이었다. 이들은 많게는 15달러를 기부했고, 적게는 50센트를 기부했다. 이들 대부분이 라하이나 감리교회에 출석한 자들로 보인다.  

국민회 제8차 연회가 1917년 1월에 있었다. 연회에 보고된 작년 통계는 아래와 같았다. 78명이 한국에서 이주하였고, 이 중 67명이 여자였고, 11명이 남자였으며, 여자들은 대부분 사진 신부였는데 재작년보다 많았다. 81명이 태어났고, 이중 남자아이가 39명이었고, 나머지 42명은 여자아이였다. 31명이 사망했고, 이중 남자가 27명이었고, 여자가 4명이었다. 11명이 한국으로 귀국하였는데 7명이 남자였고, 4명이 여자였다. 미국 본토로 이주한 자는 남자 8명, 여자 3명으로 총 11명이었다.  국민회는 63개 처에 지부를 두었는데 주로 농장에 있었고, 이 중 6개 처가 작년에 조직되었다. 18개 처의 농장에 한국인을 위한 초등학교가 있었고,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운영하였으며, 국민회가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국민회 수입 총액은 $7,816.83였는데 회비가 $6,883으로 제일 많고, 특별 후원이 $678.50, 임대료 수입이 $98 그리고 외부 후원이 $157.33였다. 본 연회에서 이은구는 유동면과 함께 교육부 위원에 선임되어 교육부 부장 이승만을 돕게 되었다. 이날 자선부 임원도 선출되었는데 부장에 박인양, 위원에 남숭명과 이정근이 선정되었다.

1919년 1월에 이은구는 와일라이에 있는 기독학원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줄 것을 국민보에 게재했다. “와일라이 선량한 바람에 올련한 높은 집은 우리 청년 남녀 학생이 기숙하는 기독학원이라. 청아한 찬미가와 요요한 풍금 소리는 오고 가는 유지 열사의 어찌 한번 감상치 않으리오마는 우리 민족 대한 사람 그 감상이 어떻다고 할까. 다수한 남녀 학생은 연연한 손을 들어 우리를 영접함은 참 과연 우리의 감상을 일 층 더 줌이오. 뜰앞에 푸른 화초는 우리의 중임을 대신한 듯하여 자수 자괴함이 한층 더 발함은 저같이 연애하는 우리에 더 어린 학생에 무겁고 중한 목적을 이루고져하는 신의를 만족게 하여 주지 못한 부끄럼이 과연 나의 심중을 현란케함이로다. 오늘날 과연 학교에 사실을 들어 말하고자 함은 이때에 이런 정세를 일반 동포와 일반 학부형 되시는 이들께옵서도 아셔야 하겠기로 대강말함이라. 지금 학교 정령으로 말하면 이 박사는 세세 부득이하여 타 곳을 가셨고, 다만 쓰탁스 부인과 김영우 씨가 중임을 대신한 바 전후 적절에 곤란함이 한두 가지 아님은 우리 일반 동포가 말하지 않터라도 아실여니와 학교 소부가 불소하여 이리모 절화 지경을 당하게됨이니 이것이 우리 책망이 하니며 우리의 실책이 아니라 할 수 없소이다. 만일 몇 달 동안 저 학교 하나를 치루어가지 못하고 폐지케 되는 경우면 멀리 있는 이 박사 마음도 우리가 저버림이 어떠하다 할 수 없을뿐더러 또한 우리 장황이 설명치 않으려니와 만일 우리가 이 몇 달 동안 별별 운동과 특별한 성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와일라이 깊은 곳에 표연한 우리의 남녀 학생에 연연히 부르짓는 정형을 면치 못하겠으니 참 이때를 당하신 우리 경애하시는 일반 형제자매는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멀리 호놀룰루와 일라이 우리의 십여성상 적공한 탑이 나무아미타불 지경이 되지 않게 하심을 한번 경고코져 하여 추황한 말 두어 줄로 결백한 국민보 한편 페이지를 더럽히오니 우리의 충애하시는 일반 동포시여 한번 경성하며 깊이깊이 사세를 통창하심을 바라나이다.” 


파이아 한인 기독교회 (1930년대)

1924년 1월 31일에 하와이 교민단 총부단장 선정에 관한 기사가 신한민보에 게재되었다. 그달 5일에 호놀룰루에서 각 지방단 의사원이 참석한 가운데 하와이 대한인 교민단이 모였는데 마위9동과 마위호야 대표로 이은구가 참석했다. 기타 참석한 자는 와일루아 대표 한영우, 와히아와 대표 정도원, 호항 대표 손창화, 전익주, 노진국, 민한옥, 민근호, 하나 대표 이건원, 힐로 대표 김경준, 학갈라우와 학갈라우 상 대표 안시흡, 와이복가 대표 박원백, 마리후 대표 박원백 등 12명이었다. 총선거의 결과는 총단장에 61표에 대한 394표를 얻어 김영기가 피선되었고, 부단장은 142표에 대한 312표를 얻은 곽래홍이 피선되었다. 

1926년 정월 11일부터 18일까지 호놀룰루에 모여 하와이 교민단 총간부를 조직하였다. 이날 총단장에 최창덕, 부단장에 김성기가 당선되었다. 총단장이 받은 표수는 99표에 대한 239표였고, 부단장은 152표에 대한 186표였다. 이날 총단의 간부 임원도 조직되었는데 이은구는 총무가 되었다. 기타 임원으로는 서기에 김광재, 재무에 김광재, 법무에 전경준, 상무에 민은호, 구제원에 김상의 그리고 학무에 양유찬이었다. 최창덕은 하와이 한인 사회에 다년간 봉사하였으므로 하와이 정형에 매우 친숙하여 그해 하와이 한인계에 서광이 비칠 것을 기대했다.

1930년에 이은구는 59세와 62세의 다른 두 미혼 한국인과 함께 살면서 마위섬의 마카와오의 파인애플 농장에서 노동했다. 이곳은 파이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4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그해 인구조사에 등록한 한인은 많았다. 한국인 가정으로는 박흥숭 가정 (부인 김소명과 자녀 마리, 마가렛,존, 프리실라), 윤조빈 가정 (부인 분조, 자녀 베드로, 숙북, 히존, 히순), 김갈숭 가정 (부인 미리암, 자녀 비트리스, 유순, 옥순, 동순, 명순, 해순), 김만수 가정 (부인 배기운, 자녀 영수, 명순, 명년, 명애, 순호), 천대W 가정 (부인 추C. 자녀 데이빗, 대순, 태순, 태훈) 그리고 미국 이름을 가진 마울 Y. 캠브라 가정 (부인 루이사, 자녀, 아비아, 저트루드, 조셉, 제이콥, 로즈)이 있었고, 독신 또는 홀아비로 석이C, 김완식, 김한오, 한준보, 김학신, 김요항, 이순G, 성 황, 북철숭, 박유찬, 이경오, 김런진, 순학손, 오진만, 온리영, 윤행구, 김 순, 김보순, 오이순, 박온순, 김 지 그리고 윤올리버J 등이었다. 이들 한인의 대부분은 파이아 한인기독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동지회와 교민단 사이에 소송 사건이 1931년에 있었다. 이은구와 함께 배일진과 주자문의 이름을 빌려서 이승만이 교민단을 걸어 기소하였다. 그해 6월 6일에 퇴각을 당한 후에 다시 소송을 걸어 7월 7일에 크리스티 판사의 사무실에서 잠깐 양편 변호사의 변호가 있은  후 정식 성문 답변을 하기로 결정되었고, 그 기한은 그달 21일까지로 정하였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그 소송의 내용은 정작 알려지지 않았다.

 

마위 파이아 한인기독교회

마위섬에 있는 파이아 지역의 한인기독교회가 여러 해 목사가 없이 교인들끼리 양재구를 부사로 택하여 교회를 유지하였다. 본 교회는 1934년 가을에 이은구를 전도사로 세워 교회를 담임하도록 하였다. 이은구의 지도하에 특별히 청년들이 크게 활동하여 청년회를 조직하였고, 찬양대를 조직하여 예배에 활력을 부었으며, 주일 학교가 잘 발전할 수 있었다. 이로써 매 주일 평균 50명가량이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고, 그해 말에 적은 교회였지만 재정 상황이 좋아 50여 달러가 잔고에 있었다. 

이듬해인 1935년 1월 7일부터 3일간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제15주년 연회가 호놀룰루 스쿨 스트릿에 있는 한인기독교회당에서 있었다. 이은구는 마위섬에 있는 파이아 지역의 한인기독교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기타 참석한 자들은 호항 대표 김형식, 이종관, 조석진, 안현경, 박주범, 정운서, 힐로 대표 장 붕, 코나 대표 김순성, 와히아와 대표 양흥렴과 박동완이었다. 먼저 박동완 목사가 30분간 기도회를 인도하였고, 작년 연회 회장이었던 최선주가 개회를 선언한 후 각 지역 대표의 대표증을 조사하여 접수하였다. 호항 교회 신임 목사 김형식을 회중에 소개한 다음에 연회를 조직하였는데 이은구는 안현경과 함께 재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기타 임원으로는 회장은 김형식, 부회장은 정운서, 서기는 박주범, 순서 위원은 박동완, 규칙 위원은 박동완과 김형식, 후보자 전형위원은 양흥엽과 조석진, 통계표 위원은 조석진, 성만찬 위원은 김형식으로 선정하였다. 

힐로 한인 기독교회 장 붕 목사와 대표가 미처 출석하지 못하여서 6일까지 정회하였다가 7일 하오 7시에 속계하여 사무를 처리하였다. 먼저 중앙 이사국장 대리 박동완 목사가 1년 동안 사업 성적을 보고하였다. ‘대체로 보면 우리 교회는 우리의 힘으로 유지 발전시키려는 굳은 정신과 결심이오, 청년들이 차차 교회에 접근하여서 활동하는 현상이 밝히 보이는 것이요, 또한 일반 사상이 전환되는 경향이니 곧 이전에는 먼저 정치적 문제가 해결되어야 교회도 서겠다고 생각하던 것을 이제는 교회가 튼튼히 뿌리를 박고 서게 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오. 따라서 정치 운동을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외다. 참으로 바로 개인 생각이외다. 이 모든 현상으로써 보면 우리 교회 장래는 곤란도 있으려니와 오직 낙관할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작년에 행한 사업 가운데 기독교회의 다년 현안이던 교회 헌장과 성례문을 제정하였고, 교회보를 2호까지 발행하였으며, 캡텐쿡과 옥갈나 등 두 곳에 새로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내지 선교사업으로 이춘원 목사에게 1,282달러를 후원하여 임천 흥산동에 19처에 있는 708명의 교인을 섬기게 하였다. 

이날 각 교회 담임자의 보고가 있었는데 교회마다 곤란한 것도 없지 않았거니와 특필할 만한 일도 적지 않았다. 호항 교회가 김형식을 담임 목사로 청빙하였고,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였다. 힐로 교회가 예배당 대지 비용으로 3,000여 달러를 확보하였는데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장 목사와 교우들이 활동하였고 외국 친구들이 사랑스럽게 도움을 준 까닭이었고, 이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에게 치하할 바였다. 특별히 이은구의 마위 파이아 기독교회에 대한 보고를 듣고 참석한 회원과 방청객 여러분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날 회장 김형식 목사가 사회한 가운데 긴요한 사건을 원만히 처결하였는데 중앙 이사원 3인으로 김형식, 장 붕 그리고 정운서가 선정되었고, 헌장 수정과 예산 통과가 순조로웠으며, 교회보를 매 삭 1차씩 발행하기로 하였고, 이사부장에 박동완을 선임하였다.  

1938년 2월 5일에 펴낸 태평양 주보에 따르면 이은구는 1938년에 ‘민원봉 가족 이야기’를 펴냈다. 민원봉은 하와이에서 중학을 졸업한 후 1936년 10월에 상항을 거쳐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런데 2년 후인 1940년에 예순여섯 살던 이은구가 마우이섬 키오키아에 있는 폐결핵 요양소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른 일곱 살이 되던 1950년에는 다른 19명과 함께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양로원으로 이동하여 거주하였다.

이은구는 1958년에 향년 85세로 호놀룰루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호놀룰루 인근 와이아래에 있는 오션뷰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damien.sohn@gmail.com

10.1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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