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전경준 (1870-1939)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전경준은 1870년 10월 21일에 경북 길안면 묵계리에서 아버지 전청Y와 어머니 김순Y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35세가 되던 1905년 2월 14일에 일본 고베에서 몽골리아 선박을 타고 그달 25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홀아비였고, 영문 이름 글자는 Chun Kyeng Choon 또는 Chun Kyung Choon이었다.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다가 전경준은 호놀룰루로 이주하여 1910년에 누아누 스트리트에 집을 얻어 살면서 폐물 상점에서 활동했다.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할 때 홀아비였는데 이때에는 독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호놀룰루 구세군 한인 영문

 

전경준은 이규연 등과 함께 하와이 구세군 정령인 브란취 칵스의 부인을 찾았다. 칵스는 영국에서 사역하다가 1883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인도에서 단기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한 적도 있었다. 칵스 부인의 후원으로 1912년 10월 15일에 하와이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놀룰루에서 한인 구세군 영문이 설립될 수 있었다. 그리고 A.C. 닐슨 정위가 한인 목양 책임 사관이 되었다. 그해 12월 10일에 호놀룰루의 구꾸이 스트릿에 월세로 건물을 임대하여 한인 구세군 영문을 세웠다. 교인이 적을 때는 15명이었고, 교인이 많을 때는 40명이었다.

영문을 세운 그해 구꾸이 스트릿에서 빈야드 스트릿 가까이에 있는 리버 스트릿으로 구세군 한인 영문을 이동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 호놀룰루 구세군 한인 영문이 크리스마스추리 축제를 개최하였다. 호놀룰루에 거주하는 한인 소년과 소녀 약 300명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예수의 탄생을 기념했다.

전경준 등은 전도하는 한편 성령 학교를 설치하였다. 이 성령 학교에서 고아를 양육하였고, 어린이를 위한 국어 교육에 힘썼다. 재정적으로 곤란하여 이 성령 학교는 1937년 2월에 폐지되었다. 

창립 이듬해인 1913년 10월에 창립 1주년을 맞이하여 창립기념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지역 신문에 5일이라고 적혀 있어 설립 날짜가 15일이 아니고 5일인지 모르겠다. 

1914년 4월 11일에 자유교회가 5주년 기념식을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이내수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회장 김종학이 개회 취지에서 하와이 한인의 순전한 명절은 오직 둘밖에 없는데 하나는 국민공회가 조직된 날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교회를 개척한 날인데 이들은 장차 조선 민족 가운데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과 같은 날이라고 했다. 이어서 신홍균 목사는 교회의 전진은 교인이 불어 나가는 성장이 아니라 참신앙과 참사랑을 들어내는 증거인데 이를 조선 반도에 옮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감독교회 목사 박상하, 중앙학원 교장 이승만, 국민보 주필 박용만, 부인회 회장 황마리아 등과 함께 전경준도 10분 동안 간단하게 연설하였는데 융융한 화기가 사람의 굳은 창자를 감화하였다. 

구세군 한인 영문을 개척한 지 5년이 되던 1917년 6월에 47세의 전경준은 호놀룰루에서 사진 신부로 한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46세 된 엄근섭과 결혼했다. 엄근섭은 1871년에 한국에서 태어나, 부부는 모두 40대 중반이었다.

 

라하이나 구세군 교회

 

1917년에 전경준은 라하이나 구세군 교회로 전임되었다. 1920년 10월 2일에 전별회를 개설한 후 전경준은 3년간 사역하던 라하이나 구세군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달 8일에 발간된 국민보는 ‘라하이나 구세군 교회에서 온 편지’를 아래와 같이 게재하였다: “경계자! 본 지방 구세군 영문 연대 정교 전경준 씨는 3년간 이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동포에게 전파하며 우리 공회 진출 갈력하다가 사령관의 명령으로 호놀룰루 구세군 고아원 간사로 이거하게 되오매 본 지방 일반 형제자매는 전 씨 내외분의 떠나감을 심히 섭섭하게 생각하므로 본월 2일에 전 씨 내외분을 위하여 본 지방 구세군 영내에서 전별회를 열고 피차에 3년간 친애지정도 설회하며 피차 육신은 멀리 있을지라도 영혼은 주의 은혜 가운데 항상 같이하리라는 전 씨의 연설이 있은 후 폐회하였사옵기 자에 보고하나이다. 대한공화민국 3년 10월 2일. 라하이나 구세군 교회 남녀 교우 등 백.”

1920년 3월에 구세군 교회 하사관이자 그로브팜 농장 노동주선인으로 활동하던 김천일이 가와이섬의 리후에의 아카쿠이우에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해 8월에는 와일루아 지방에 거주하던 구세군 교회 전도사인 박호병의 부인 김숙안이 별세하였다. 구세군 교회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에 큰 슬픔을 당했다. 

 

호놀룰루 보육원

 

전경준은 1920년 10월에 호놀룰루 구세군 보육원 간사로 전임되었다. 센트럴 유니온 교회의 요청에 따라 첫 구세군 파견대로서 5명의 신실한 사역자들이 1894년에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후 1903년에 카이우라니 소녀 보육원이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하와이 토착 소녀들만 수용하다가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되면서 외국인 소녀도 수용하였다. 1915년에는 21개의 침대가 있었다. 1920년에 직업 훈련이 필요하여 1922년에 직업 훈련 건물을 지어 와이오리 티룸이라고 불렀다. 아침 클라스가 만든 제품을 매일 오후에 티룸에서 사용하였다. 전경준은 이곳에서 1923년까지 약 3년간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한인 상조회

 

1923년 6월에 호놀룰루에서 한인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한인 상조회가 조직되었다. 의지할 곳이 없는 한인 노인들이 피차 재정과 위문으로 말년에 서로 돕자는 목적 이외에 회원 중에 누구나 세상을 떠나는 경우면 한인 상조회의 재정으로 장례를 지나게 하였다. 150여 명이 등록하여 모은 회비가 1,000여 달러에 달했다. 전경준이 한인 상조회 회계로 선임되었다. 그 외 간부로는 회장에 백락현과 총무에 최용선이 있었고, 이사장에 민찬호가 선출되었다. 

그해 10월에 누아누 청년회관 체육실에서 한인 상조회 창립기념식을 열었다. 회원과 방문한 자 등 약 150명이 참석하여 회장 백락현의 사회로 성대한 순서를 가졌다. 회중 일동의 합창과 감리교회 목사였던 현 순의 기도, 한인 상조회 총무 류춘관의 취지 설명, 한인기독교회 목사 민찬호의 연설이 있었다. 한인 상조회가 조직된 지 4개월 만에 20여 명의 회원이 늘어 170명에 달했고, 저축금이 500달러가 많아 1,500달러에 달했다. 장차 묘지로 쓰기 위하여 갈네히에 약 30 에이크의 땅을 구매하기 위하여 교섭 중이었다.

한인 상조회가 점차 발전하면서 회계였던 전경준이 보수를 받지 않고 매일 몇 마일씩 걸어 다니면서 방문하여 월 25센트의 회비를 거두어 매년 몇백 달러를 저축할 수 있었다. 지난번 보고에 수입액이 2,123달러 61센트였는데 1924년 4월에는 지출금을 제해도 잔금이 1,998달러 11센트나 되었다.

 

한인 기독교회

 

1924년 6월에는 하와이에서 전례 없이 결혼식과 약혼식이 많았다. 그해 28일 저녁에 전경준은 감독교회 (성공회)에서 한국에서 온 부인과 재혼한 것으로 보인다. 전경준 외에 6월에 결혼한 한인은 여럿 있었다. 7일에는 주조섭과 김엘리스가 결혼하였고, 21일에는 이유찬 박사와 백인 여성인 활더론이 결혼하여 ‘동양과 서양이 서로 모이지 못하리라는 이론을 한꺼번에 깨뜨렸으며,’ 28일 저녁에는 두 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전경전 외에 강영옥과 남피니가 감리교회에서 결혼하였다. 그달에 약혼식도 있었다. 힐로 지방에 거주하는 정동호와 김경수가 약혼하였고, 호놀룰루에서 세 팀이 약혼하였는데 최갑출과 김또라가 약혼하였고, 정덕홍과 이풀노가 약혼하였으며, 최월림과 정미수가 약혼하였다.

1926년 1월에 하와이 교민단은 새로운 간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전경준은 법무에 선출되었다. 총단장은 239표를 얻은 최창덕이 당선되었는데 하와이 정형에 매우 밝아 하와이 한인계는 서광을 기대하였고, 부단장에 186표를 얻은 김성기가 선임되었으며, 그외 간부로는 총무에 이은구, 서기와 재무에 김광재, 상무에 민능호, 구제원에 김상의, 학무에 양유찬이었다. 교민단은 그달 11일부터 18일까지 계속 모여 그해에 할 사업을 의결하였다. 

1918년 12월에 이승만 박사의 지도로 30여 명이 모여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민찬호가 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푸우누이에 있던 한국여자신학교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 수가 증가하여 와이라라에 있던 한인 기독학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알리이오니 학교를 거쳐 노스 스쿨 스트릿에 있는 오늘날의 한인양로원에 처음으로 예배당 건물을 건축하였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는 1928년 7월 1일에 재무 김성기의 사면을 허락하고 그를 대신하여 전경준을 재무로 임명하였다. 그해 전경준은 한인상조회 회관 건축을 위하여 건축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하와이 전역을 여행하였는데 이 여행 때 한인기독교회 현황을 일반 교우에게 소개하기로 하였다. 

1929년에 한인상조회는 전경준의 노력으로 노스 스쿨 스트릿 270번지 뒤편에 있는 집 한 채와 레아이 지역의 마키니 스트릿에 집 두 채를 18,000달러로 매입하였는데, 7,000달러를 선지급하고 나머지는 은행에서 주택담보를 받았다. 노스 스트릿 집을 ‘한인 노인집’이라 불렀다. 거주하는 남성 노인들이 홈장을 뽑아 홈장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자취하면서 월세를 지불하였다. 

1935년 7월에 하와이 국민회가 노령화되는 한인의 장례를 위하여 호상부를 조직하였으므로, 1923년에 조직된 한인 상조회는 조직된 지 16년이 되던 1939년에 릴리하에 있는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부속 기구로 재편되었고, 오늘날 하와이 한인양로원이 되어 한인 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인을 위한 복지시설로 확대되었다.

1938년 4월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정면을 서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누가 모형으로 만들어 한국 고유의 건축 양식을 가진 예배당을 완공하여 헌당식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고유의 건축 양식을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삼았다. 

전경준이 1938년 6월에 호놀룰루에서 사회보장제도에 등록하였는데 사회보장제도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이듬해인 1939년 6월 29일에 펄시티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damien.sohn@gmail.com

09.0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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