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심상헌 (1885-1964)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심상헌은 1885년 6월 14일에 한국에서 태어나 황해도 송화에서 거주했다. 그는 19세가 되던 1904년 7월 18일에 총각으로 이민선 차이나호를 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이민선을 탈 때는 Sang Hyun Shim으로 사용했고,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그의 이름이 Sang Hun Shim 또는 Song Hun Shim으로 적혀있다. 그는 농장 노동자로 하와이섬 고하라에서 노동하였다.

 

고하라 한인감리교회

 

하와이로 이주한 지 12년이 되던 1916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던 제11차 하와이 선교연회가 있었다. 루이스 감독이 사회를 하였고, 감리사는 윌리엄 헨리 프라이 목사였다. 이 연회에서 심상헌은 김윤구와 함께 하와이섬 고하라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는 그의 하와이 선교사역의 시작이었다. 그해 본 교회 목사는 차윤충이었고, 전도사는 황정Y였다. 심상헌이 권사로 임명받던 2월 보고서에 따르면 1년 전에 받은 세례교인이나 보고한 그달 등록 교인이나 엡워스 청년회나 수지 현황에 대한 보고는 없었고, 단지 주일 학교에 관한 보고만 있었다. 2명의 주일 학교 교사가 있었고, 25명의 학생이 등록하였다. 이듬해인 1917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심상헌의 1년간의 사역을 엿볼 수 없다. 

 

파파로아 한인감리교회

 

1917년이나 1918년에 심상헌은 하와이섬 파파로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박성배와 이관영과 함께 그는 1918년 3월에 애드나 W. 레오라르드 감독의 사회로 모인 제13차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파파로아 한인교회의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해 박종수가 지난해에 이어서 본 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았고, 하와이 선교연회가 전도사를 파송하지 않았다. 

매트 S. 휴즈 감독의 사회로 1919년 3월에 개최한 제14회 하와이 연회는 심상헌을 위의 파파로아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심상헌이 전도사로 파송받기는 처음이었다. 성찬식과 세례식 이외에 그는 결혼식과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예배를 인도할 수 있었다. 1920년 제15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바대로 1년간의 사역의 결과로 4명의 세례 교인, 3명의 입교 교인 그리고 4명의 학습 교인이 있었는데 위의 4명의 학습 교인은 지난 한 해 동안에 받은 학습 교인이었다. 1918년 통계와 비교하면 세례 교인 1명과 11명의 학습 교인이 이 지역을 떠났다. 주일학교 교사는 한 명 줄었으나 등록한 학생은 22명이었고, 엡워스 청년회는 6명이 늘어 22명이었다. 본 교회는 100주년 기념 헌금으로 70달러를 헌금하였다. 

심상헌은 1920년에 애드나 W. 레오나르드 감독의 사회로 모였던 제15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도 위의 파파로아 한인감리교회의 전도사로 다시 파송 받았다. 박종수 목사 대신에 파송된 이관묵 목사를 도왔다. 그런데 1921년의 제16회 하와이 선교연회 보고서에는 이관묵이 아니라 박종수의 이름으로 보고서가 작성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그런데 작년과는 달리 이 해에는 박성배와 이완규가 권사로 파송을 받았으므로 교회의 성장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1년 2월에 세례 교인이 2명이었고, 어린이 세례 교인이 3명이었으며 지난 한 해 동안 학습을 받은 교인이 4명이었다. 안타깝게도 지난 1년 동안 2명의 교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주일 학교는 5명의 교사와 22명의 학생이 등록하였고, 웹워스 학생회에 14명이 등록하였다. 한 해 동안에 이룬 사역으로는 예배당 건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예배당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예배당 토지 비용 500달러를 빼면 1,500달러로 예배당을 건축한 것으로 파악되고, 건축 관리에 286달러를 지불하였다. 그리고 100주년과 기타 목적으로 70달러를 헌금하였다. 1922년에 보고된 하와이 선교연회록에는 파파로아 한인감리교회가 적히지 않아 한인 노동자의 이동으로 본 교회가 문을 닫았을 것 같다.

 

힐로 한인감리교회

 

그즈음 심상헌은 힐로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에 그는 힐로에서 등사판으로 된 힐로시사를 발행하였는데 정간이 되었다가 사장 심상헌과 편집인 진연철의 이름으로 1924년에 다시 출간하기로 하고 활자를 구매하고 신문을 확장할 계획을 하였다.

1927년 2월에 모인 제22차 하와이 선교 연회에서 심상헌이 하와이섬의 힐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정두와 다른 한 명의 전도사와 함께 힐로 한인감리교회에 파송을 받은 첫해 본 교회로 파송을 받은 자로는 이관묵, 박종수가 있었는데 이관묵은 목사였고, 박종수는 집사 목사 곧 준회원이었다. 위의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내지선교/교회확장부의 부장인 일본인 T. 고무로 목사는 본 연회와 필라델피아에 있는 내지선교/교회확장부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 사택과 마우이섬의 푸코리에 있는 필리핀 교회와 일본 교회의 예배당 건축과 함께 힐로 한인장로교회 예배당 건축이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1933년에 심상헌은 힐로감리교회 전도사로 다시 파송을 받았다. 그해 5월 7일 저녁 6시 반에 엡윗청년회 체임회가 있었다. 이날 회장에 김세라, 전도국에 김양수, 인제국에 최순이, 학문국에 김순이, 교제국에 김순복, 통신국에 이원태, 회계국에 한도원이 선임되었다. 그달 17일에 감리사 프라이 박사가 힐로 감리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날 저녁 7시 반에 예배를 시작하여 감리사가 설교하였고, 이어서 계삭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참석한 직원은 목사 이관묵, 전도사 심상헌, 김붕서 그리고 김묘연, 권사 김창운, 주일학교장 대리 김순복, 청년회장 김세라, 유사 피흥선과 이정근, 탁사 전익서, 고성화, 김원섭 그리고 오영식, 속장 안선도, 김베드로였다. 각 임원의 보고가 있었고, 유사의 보고에 따르면 수입이 308달러 77센트였고, 지출이 301달러 71센트여서 잔액이 7달러 6센트였다. 

1934년에도 심상헌은 힐로 감리교회 전도사로 봉직했다. 그해 8월 20일 저녁 7시 반에 본 예배당에서 그의 아들 심라득과 한장춘의 딸 한텔마가 이관묵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거행했다. 찬란하게 단장한 가운데 2백여 명의 하객이 모인 가운데 풍금 소리를 따라 결혼식을 마친 후 사교실에 모여 다과를 나누었다. 

1935년 이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전도사 명단과 교회 현황 보고가 없어 심상헌의 선교 사역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1916년 이후 1922년까지와 1927년 이후 1934년까지 권사와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하와이에서 한인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고 보인다. 

심상헌은 오랫동안 철도회사에서 봉직하였고, 1953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으며, 1956년과 1957년에 힐로 대한인 상부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64년 4월 28일에 78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와이 힐로에 있는 호메라니 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에게 아내 다니심과의 사이에 두크, 해리, 도날드, 순태 등 자녀를 두었다.

damien.sohn@gmail.com

07.0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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