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조병요 (1881-1961)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조병요(趙秉堯, 趙柄堯)는 고종 18년이 되는 1881년 9월 16일에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는 동갑내기와 결혼하여 평양에 있던 소문안에서 거주하다가 23세가 되던 1904년에 부인과 함께 하와이 이주 길에 올라 그해 8월 22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조병요는 1905년경에 회중 성당 선교사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설립했고, 오아후 칼리지로도 알려진 푸나호우 (고등)학교 식당에서 접시닦이로 일하면서 주일이면 부인과 함께 성공회 미사에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민족의식이 있었던 그는 성공회 교인들과 같이 1907년 9월에 하와이에서 대한제국 부흥 운동과 교육 장려를 목적으로 전흥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회보를 발행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조병요와 그의 부인은 1908년에 하와이에서 영세 받은 최초 교인 중 두 사람이었다. 이로써 그는 평생 성공회를 떠나지 않았다. 

1910년 4월에 전흥협회가 대한인 국민회에 통합되었을 데 조병요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38세였던 1918년에 호놀룰루에 있었던 이올라니 학교를 졸업했다.

박승준 사제와 박상하 평신도 사역자가 사임한 이듬해인 1919년에 하와이 성공회는 조병요를 성 누가 성공회 성당에 평신도 사역자로 파송하였다. 한인 성공회 선교의 중심은 호놀룰루였지만 농장마다 성공회 선교지를 설립하기 위하여 농장 지도자를 조직하였는데 그는 오아후섬 가후쿠와 하와이섬 코나에서 동원된 지도자였다. 마우이섬의 라하이나에서는 13명의 한인 지도자를 동원할 수 있었고, 하와이섬의 올로와루, 고할라 그리고 막가팔라에 한인 성공회 선교지를 설치하고 야간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지역에서 이들 성공회 선교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일을 따라 이동하였기 때문에 세워진 선교지마저 문을 닫기 일쑤였다. 

박승준 평신도 지도자를 지도했던 캐논 포트와인 사제의 지도하에 조병요는 1908년 이후 중국인 성 엘리자베스 성공회 성당 예배실에서 중국인 미사와 어긋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는 한국 성공회가 보내준 한국어로 번역된 영국 기도책을 사용하였으며, 주교의 허락하에 미국 기도책을 한국어로 직접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1920년 초까지 성 누가 성공회 성당에 등록한 교인은 110명이었다. 

1921년 10월에 이승만 계열과 박용만 계열로 분열된 한인 단체를 연합하여 하나의 기관을 만들기 위하여 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하여 하와이 대조선 국민대표 기성회가 조직되었을 때 조병요는 총무로 선출되었다. 본 기성회는 한인사회의 자치와 단합을 도모하였고, 독립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를 상대로 대한 독립을 홍보하였다. 

1922년 9월에 한국 학교를 열었다. 성당에 출석하는 어린이가 70명 이상이었는데 오후 학교에 출석하였다. 세 분의 교사가 가르쳤는데 이 중 최순이 교사는 하와이 대학교 재학생으로서 음악과 노래를 한국어와 영어로 가르쳤으며, 본 성당 오르가니트였고, 라하이나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던 승루시를 대신한 교사였다.

조병요는 1922년 10월에 보낸 보고서에서 존 D. 라모디 주교의 허락을 받아 한국어로 된 공동기도책을 요청했다. 이 기도책은 하와이에서 처음 300달러를 헌금한 H. 클락 부인의 도움으로 출판되었다..  

호놀룰루에 있는 국어학교 학생은 기독학원 학생 이외에도 약 150명이 있었다. 하와이 정부가 외국어 학교를 제한하는 법령을 실행하였으므로 과거에 비하면 약간 감축된 숫자였다. 조병요는 다른 4명의 교사와 함께 팔나마 국어학교를 운영하였는데 70명이 등록하였다. 그 외 두 학교가 더 있었다. 염달욱과 그의 딸이 릴라하 학교에서 50명의 학생을 가르쳤고, 현 순 목사와 이윤호가 감리교 한국학교에서 30명을 가르쳤다. 이들 학교는 국민보에서 출간한 교과서를 사용했다.

조병요는 1923년에 평신도 사역자를 그만두었다. 그의 사역은 4년간이었다. 그를 이어서 조광원이 한국 성공회 막 N. 트롤르프 (조마가) 주교의 파송으로 그해 12월에 하와이 성 누가 성공회 성당을 맡았다. 평신도 사역자를 그만두었지만 조병요는 새로 부임한 조광원을 도와서 한인 교인들을 설득하여 본 성당이 한인들의 성당이 되도록 비전을 심었고, 모든 교인이 본 성당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교인들은 1924년에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1,800달러를 헌금했고, 미국 성공회가 700달러를 보조하여 1925년 부활절에 입당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했지만, 그해 5월 3일에 팔라마 지방의 ‘카노아 레인’ 길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조병요는 조광원을 도와서 성 누가 성공회 교인들이 한국에 있는 한국인을 보조했고, 한국에 있는 고아원에 기부했다. 

조병요는 1920년대 후반에 임시정부 주석 김 구로부터 편지를 받고 하와이 동포에게 임시정부가 재정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모금에 앞장섰다. 1931년 11월에 오아후섬의 와이아와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김 구가 계획하고 있던 특무공작 자금을 지원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거사를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32년 2월 애국단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1934년 4월에 조병요는 다른 11명과 함께 특무공작을 후원하는 위의 애국단에 참가하면서 중국지역의 광복전선통일운동에 관여하였다. 애국단은 1936년에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광원이 부제가 되던 1923년에 평신도 지도자직을 그만둔 조병요는 12년만인 1935년에 다시 평신도 지도자가 되어 조광원 사제를 도왔다. 그의 평신도 지도자직은 1939년까지 4년간 계속되었다.

1936년에 조병요는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국민부담금 제도를 설치하여 국민회가 가진 채무를 청산하였고, 혈성금 제도를 만들어 임시정부의 경상비를 조달하였으며, 호상부 제도를 실시하여 나이 든 동포들을 보조하였다. 이듬해 11월 3일에 발행된 국민보에 총회장 조병요는 아래의 ‘개국 기원절’이라는 제하의 글을 실어 ‘예배 5일’이라는 단어를 구사하는 기독교인으로서 대한 독립을 기원했다. “음력으로 10월 3일, 즉 금년에는 양력으로 11월 5일 [예배 5일]이 우리나라 개국 기원절 (개천절)이 올시다. 하와이에 거류하는 우리가 연내로 흔히 잊고 그대로 지나간 적이 많은 것은 유감이나 이번에는 잊지 말고 기억하고 내년에는 좀 더 낫게 기념하여 봅시다. 근본을 잊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또한 개국 기원 이후로 반만년 혁혁한 역사적 영광을 기억합시다. 조선의 영혼과 역사의 영광이 우대의 양심을 감시합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의 광복 대업의 기회가 왔고, 따라서 일이 있으니 우리는 역사의 지도를 구할 때올시다. 5일 하오 7시에 일반 회우는 총회 집회실로 회집하여 이날을 잘 지킵시다. 특별한 소식도 있습니다. 민국 19년 11월 3일.”

해외한족대회가 1941년 4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었을 때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의 위원회는 민족통일운동과 독립운동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의사부를 두고,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설치하였다. 조병요는 이듬해 3월에 의사부 위원으로서 워싱턴에 특파되어 미주 각 지역 한인을 순방하였고, 워싱턴 외교위원회를 방문하였으며, 전쟁에 처할 하와이 한인의 정형에 대해 협의하는 등 크게 활동했다. 

조병요는 1961년 1월 13일에 향년 80세에 소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에 그의 독립운동을 기념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damien.sohn@gmail.com

06.0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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