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고덕화 (1881-1979)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고덕화(高德化)는 1881년 10월 20일에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른바 지식인이었다. 결혼한 후 서울에서 거주하였는데, 하와이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노동 이민을 신청한 그는 1903년 4월에 인천에 있던 대한제국 원민원에서 여권을 받았다. 여권은 한문과 영어로 되어 있었고, 신청인은 하와이 이민 회사 측으로 보이는 강원석이었고, 발행인은 대한제국 원민원 총재 민랑환이었다. 부인을 한국에 두고 23세의 나이에 단신으로 45달러를 소지하고 닙본 기선을 타고 고덕화는 1903년 4월 말에 신천신지의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1910년부터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이동하여 1924년까지 약 800명이 하와이에 이주하였다. 오아후섬에서 1911년에서 1929년까지 결혼한 명부에 따르면 고덕화는 사진 신부였던 김공도와 1913년 2월에 호놀룰루에서 결혼하였다. 신부는 고덕화보다 14살이 적었는데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식 부인이었다. 고덕화는 하와이섬의 북쪽에 위치한 호녹가이지에 있는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아내와 함께 이곳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 

 

1916년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의 감독은 윌슨 S. 루이스 목사였고, 감리사는 윌리엄 H. 푸라이 목사였으며, 총무 겸 재무 겸 통계 총무는 리온 L. 루프부로 목사였다. 하와이 연회에 한인 임원이 여럿 있었다. 한국어, 일본어, 필리핀어로 나누어진 세 언어권 총무가 있었는데 그중에 한국어 총무는 김CH였고, 두 명의 통계 부총무가 있었는데 임준호가 그중 한 명이었고, 보조 재무가 둘 있었는데 그중에 김이제가 있었으며, 한국어 통역관으로 후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있었다. 그리고 하와이 선교연회에 속한 한인 목사도 여럿 있었다. 장로 목사 곧 정회원으로 홍치범은 10년을 사역하였고, 김이제는 9년을 사역하였으며, 몇 년 사역한 지 알수 없지만, 홍한식이 있었다. 집사 목사 곧 준회원으로 임준호, 조연택, 이선일은 준회원 과정을 완전히 마쳤고, 이관묵, 박세환, 김재성은 4년차 과정에 있었다. 연수 과정에 있었던 한인으로는 2년차 연수에 있었던 차윤중과 1년차 연수에 있었던 한명교, 한YC, 박종수 그리고 박기홍이 있었다.

그해 2월 17일부터 21일까지 4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이 연회에서 고덕화는 아내와 함께 출석하던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하와이 선교가 처음 시작되었다. 이 선교연회에서 호녹가이지와 국구해리 지역 순회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박세환 목사와 호녹가이지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은 황인W와 그리고 고덕화와 함께 호녹가이지 권사로 파송을 받은 변성운과 함께 고덕화는 동역했다. 

고덕화가 권사로 파송을 받은 그해 2월에 보고된 통계에 따르면 이들 두 교회에서 1년 동안 11명이 성인 세례를 받았고, 6명이 어린이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한 사람이 28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습 교인이 11명이었고, 등록한 세례 교인은 45명이었으며, 주일학교가 네 곳에 있었는데 교직원 21명이 62명의 학생을 가르쳤고, 엡윗 청년회 고등부에 30명이 등록하였으며, 예배당이 한 곳에 있었는데 당시 시세가 650달러였고, 예배당 건물 유지와 수리를 위해 235달러를 지급했으며, 연료와 전기 등에 45달러를 지급했다. 그런데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와 국구해리 한인감리교회의 통계이므로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의 통계를 따로 확인할 수 없고, 예배당이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의 것인지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고덕화가 권사로 파송되기 1년 전 곧 1915년 하와이 선교연회록과 그가 권사로 파송 받은 1년 후 곧 1917년 하와이 선교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그가 1915년에 권사로 파송을 받았는지와 1917년에도 권사로 파송을 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없고, 그가 1년간 권사로 사역한 후의 통계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재미한족 연합위원회

 

와이아키아 밀 회사에서 노동하던 고덕화는 1918년 10월에 세계 제1차대전 징집 서류를 작성했다. 위의 징집 서류에 따르면 그는 키가 컸으나 체구는 중간형이었다. 징집 서류를 작성한 지 2년 후 그는 인구조사에 응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그는 농장에서 퇴직하여 하와이섬 하마크나 지역에서 양복점을 경영하였고, 그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1914년에 태어난 장남 영이와 1918년경에 태어난 차남 영호에 이어 1922년경에 삼남 영석을 낳았으며, 1923년경에 사남이자 막내 영헌을 낳았다. 

1922년 8월에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이 작성한 ‘포화에 있어서 조선인의 현 상태에 관한 보고의 건’에 따르면 고덕화는 자본금 5,000달러로 호놀룰루에서 양복제조업에 종사했는데 이듬해 7월에 위의 일본 영사관이 작성한 ‘미령 포화에 재류하는 조선인 실황’에 따르면 그해 그는 호놀룰루에서 10,000달러의 자본금으로 양복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1년 사이에 자본금이 5,000달러가 많아졌다는 보고인데 사실상 그 수치를 믿을 만하지 않더라도 그가 성공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음을 증빙한다.

1929년 11월 14일에 발간된 신한민보에는 고덕화가 신한민보를 위하여 10달러를 보조하였다고 보도했다. 국제적인 경제공황 사태에서 그의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932년 2월에 신한민보가 게재한 원동 소식에 따르면 만주 사변 이후 오지에 재류하던 한국 농민의 대부분은 생명에 대한 위험은 물론 지방 치안이 문란한 관계로 안전지대를 찾아 흩어진 수가 이미 수만에 달하였으며, 구사일생으로 원지에 남아있는 농민도 경작기를 앞두고 속수무책으로 궁지에 빠져 있어 춘경기의 작농 문제가 최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사변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봉천성과 길림성에 이주한 한인 농민 중 적어도 그해 경작기에 구제받지 못하면 작농치 못할 호수가 49현에 13,430호에 달한다는 조사가 나왔다. 적어도 매호 150원의 농업 구제금이 필요하여 총 200만 원의 거액이 필요했다. 이에 원동사변 임시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신한민보는 원동 사변 청원을 수시로 광고했다. 

그해 7월에 신한민보는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국민보의 주필 사면과 후임자에 대한 보도를 냈다. 국민보의 주필 김헌규에게 보수금을 재정 곤란으로 인하여 지급하지 못하여 국민보의 편집 사무는 교민 총단장인 차신호가 겸임하여 국민보를 계속 발행하기로 하였다. 이렇듯 국제적인 경제공황의 여진이 남아있던 터에 재정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고덕화는 원동 사변 임시위원회에 15달러를 기부하였다. 그 외에도 최응호, 이옥행, 이혜주, 김윤하, 박원겸, 방사겸이 기부하였고, 중국인까지 기부하였는데, 료달삼 등 2명도 기부하여 총 53달러 45센트나 모였다.

유동식이 지은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85년사인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에서 고덕화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전신인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를 시무하던 임두화 목사는 하와이의 동역 목회자들과 유대를 가지기 위하여 자주 자리를 같이하여 친교 모임을 열었고, 그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1937년 2월에도 그가 목회하던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에서 점심을 준비하여 목회자들을 초대하였는데 고덕화가 있었다. 함께 초대받은 목회자는 마우이섬에서 사역하던 임준호, 오이알루아와 가후쿠에서 사역하던 홍한식, 가와이섬에서 사역하던 현 순, 와히아와와 와이파후에서 사역하던 안창호, 라나이에서 사역하던 이관묵, 호놀룰루 제일한인교회의 본처 목사 박종수, 힐로와 하카라우에서 사역하던 정의조 그리고 최용기도 있었다. 그런데 위의 책은 고덕화가 사역하던 교회를 밝히지 않았다.

이듬해인 1938년의 8월에 발간된 태평양주보에 고덕화가 재봉사업을 하였는데 태존씨에게 방매했다는 기록이 있다. 2년 후인 1940년에 있었던 인구조사에서는 그는 파호아 애비뉴 길에 있는 주택에 거주하면서 건물 임대 사업을 하고 있었다. 

고덕화의 아들 영호가 아이오라니 학교에 다녔는데 23세가 되던 1940년 10월에 세계 제2차 대전 징집 서류를 작성하였다. 아들 영호가 징집 서류를 작성한 이듬해 12월 7일에 일본 군부가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였다. 이는 역사상 최장 거리의 기습작전이었는데 전술적으로 보면 일본 제국이 완벽하게 승리했으나 전략적으로 볼 때 그동안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다. 이로써 아들 영호가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1944년 2월 말까지 입대한 군인 중에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들만도 56명이나 되었다. 영호도 56명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941년 4월에 8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등 9개 단체가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재미한족 연합위원회를 결성했는데, 1944년에 재미한족 연합위원회를 상설기관으로 인정하고 각 단체 대표원이 모두 위의 연합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가결하여 연합위원회 임원을 개선하였다. 고덕화는 유동면과 승룡환과 함께 군사부에 선임되었다. 이들 외에 개선한 임원은 위원장에 박상하, 부위원장에 안원규, 비서부에 기록서기, 통신서기, 영문서기를 두기로 하고 기록서기에 정두옥, 통신서기에 김현구, 영문서기에 조제언, 선전부 위원에 현 순, 유진석, 박금우, 재무부에 독립금 재무와 군사금 재무를 두고, 독립금 재무에 강창신과 김공도, 군사금 재무에 차윤중과 최두욱, 감사부에 송승균, 차신호, 권혜경 그리고 교제부에 오창익, 박보광, 이봉수, 강상호 그리고 심영신이었다.

1950년에도 고덕화는 호놀룰루에서 건물 임대업으로 생계를 이었고, 아들 영헌은 해군 공창에서 기술공으로 재직하였다. 고덕화는 1979년 9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향년 98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damien.sohn@gmail.com

03.1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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