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차윤중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차윤중(車允中)은 미국 꿈을 품고 1900년 초에 노동이민자로 하와이에 입국하였는데 입국 명단에 차씨 성을 가진 30여 명 중에 Cha Yoon Choong은 없었으므로 입국 당시 그의 이름은 달리 표기한 듯하다. 

하와이 선교연회 감독 에드윈 B. 휴즈 박사와 존 W. 와드만 감리사의 소집으로 1910년 3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제일감리교회에서 하와이 선교부 제5차 연회가 모였다. 한국인 준회원 (집사 목사)에 민찬호, 이경직, 홍치범, 김용S 그리고 김유순이 있었다. 하와이 선교부는 가와이섬에 있는 막가웰리에 거주하는 한인 선교를 위하여 김이제를 목사로 파송하면서 차윤중을 평신도 설교자(전도사)로서 파송했고, 이 지역에 정인S와 남새Y를 권사로 임명했다. 1910년 연회록에서 그가 파송 받던 그달의 본 교회 통계를 볼 수 있다. 세 개의 예배당이 있었는데 학습 교인이 50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103명이었으며, 시니어 챕터에 44명이 등록했다. 주일학교가 다섯 곳에 있었고, 등록한 학생은 젖먹이와 아기까지 합하면 133명이었으며 교직원이 14명이었다. 세 예배당의 시가는 700달러에 해당했다.

아래에 열거한 1910년 인구조사에 응한 한인 중 다수가 막가웰리 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음신구(29세), 이존삭(38세), 이상종(28세), 김삭훈(32세), 이중담(30세), 박봉헌(29세),  박K흠(37세), 노수몽(27세), 강대춘(26세), 강계양(32세), 최경옥(35세), 박원근(29세), 연신문(33세), 김춘일(32세), 안충현(29세), 장경식(29세), 박기실(27세), 이한식(29세), 김몽열(35세), 이박용(31세), 박성달(26세), 박순김(35세), 양성학(32세), 강경완(63세), 이덕아(54세), 이방서(44세), 최순방(31세), 김홍욱(28세), 오상완(30세), 김인용(28세), 장강애(26세), 우장완(24세),  김덕수(30세), 이춘수(32세), 김완서(30세), 오동국(61세), 이군조(28세), 김종학(34세), 김덕구(38세), 유용분(28세), 유달봉(19세), 이명섭(31세), 김영순(38세), 김춘우(30세), 김경진(28세), 김순옥(33세), 김영일(53세), 최원준(31세), 이만엽(25세), 문순서(35세), 박 문(32세), 이관목(30세), 김동기(44세), 김종완(30세), 문 철(30세), 홍형화(31세), 여준삼(37세), 홍재봉(37세),  왕응식(40세), 김용석(26세), 전우김(26세), 함신엽(38세), 한경선(27세), 장정박(29세), 최윈순(29세), 장순박(32세), 장 삭(36세), 연영환(27세), 박규신(31세), 감규항(31세), 이만보(35세),  이운상(14세), 김문염(44세), 추경도(45세), 조지추(50세), 김현구(31세), 양기완(31세), 김순파(26세)는 독신이거나 홀아비였다. 이들 80여 명에 가까운 한인들은 거의 2, 30대였고, 진갑을 지낸 노인도 있었고, 14세 된 앳된 소년도 있었다. 

그리고 막가웰리에는 가정을 가진 한국인도 있었다. 목사 김이채(34세)와 사모 제니(28세)와 딸 도라(5세)와 딸 마다이(3세) 그리고 아들 동삼(5개월) 외에도 연지완(43세)과 그의 부인 이 씨(34세)와 아들 영선(6세)과 딸 충선(4세)과 아들 우선(2세) 그리고 갓 난 아들 성선, 박종기(46세)와 그의 아들 공진(12세), 김해석(24세)과 그의 부인 동갑네기 한 씨 그리고 아들 보라(6개월), 마새연(62세)과 그의 부인 메리(50세) 그리고 딸 필창(15세)과 딸 본필(11세), 마준용(21세)과 그의 부인 이 씨(22세), 심용화(50세)와 그의 부인 공 씨, 김낙일(26세)과 그의 부인 한 씨(28세) 그리고 딸 학실(5세)과 아들 영찬(3세)과 영광(4개월), 강대기(34세)와 그의 부인 강바베(21세) 그리고 처제 김아분(12세), 마형식(44세)과 그의 부인 박 씨(40세) 그리고 딸 인봉(9세)과 딸 순봉(2세), 전기화(26세)와 그의 부인 전공진(17세), 전윤비(31세)와 그의 부인 전마타(23세) 그리고 딸 파바(8세)와 어머니 전디아마, 홍택신(36세)과 그의 부인 김 씨(34세), 김종수(23세)와 그의 부인 김나감(18세)이 있었는데 모두 14가정이었다. 이들 가정 중에는 단출한 가정도 있었지만, 부모를 모시거나 처제와 함께 사는 가정도 있었고, 부인이 없이 자녀만 있는 가정도 있었고, 62세의 가장이 있었는가 하면 21세의 가장도 있었다. 막가웰리에서 인구조사에 응한 1,688명 중 한국인은 극소수였다.

1910년 3월부터 1911년 1월까지 1년간 1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15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1911년 1월에 본 교회에는 85명의 세례 교인과 45명의 학습교인이 제적했고, 시니어 챕터가 한 개 있었는데 25명이 등록했다. 지난해와 같이 막가웰리 지역에 예배당이 세 개가 있었고 시가는 700달러에 해당했다. 지난 1년간 본 교회는 33달러를 선교부에 헌금했는데 내지선교부와 교회확장을 위하여 30달러, 주일학교부를 위하여 1달러, 흑인 보조회를 위하여 1달러 그리고 미국 성서공회를 위하여 1달러로 ‘나누는’ 교회였다. 그런데 지난 1년간 2명이 사망하는 슬픔도 있었다. 

1911년 1월에 제6회 하와이 선교부 연회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였다. 그해 감독은 에드윈 H. 휴즈 박사였고, 감리사는 여전히 와드만 박사였다. 차윤중은 하와이 선교부로부터 평신도 설교자로 가와이 섬에 있는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로 다시 파송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에 파송한 김이제 목사가 다시 파송되었는데 김 목사는 막가웰리 지방뿐만 아니라 긱가하 지방도 맡았고, 작년에 막가웰리로 파송한 정인S와 남새Y를 권사로 다시 임명하였다. 

1915년 연초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부는 차윤중을 하와이섬 코하라 한인감리교회로 파송했다. 1년간 목회하였지만, 세례나 학습을 받은 자가 없었고, 세례 교인이나 학습 교인도 없었고, 예배당도 없어서 인지 재정 보고도 없었다. 그러나 1년 동안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는데 1916년 2월에 주일학교에 25명이 등록한 가운데 두 명의 교직원을 두었다. 

 

1910년 3월 평신도 설교자(전도사)로 파송
1915년 연초 하와이섬 코하라 한인감리교회로 파송
1925년 3월 임시 국민회 회장 선출

 

하와이 선교부 감독 윌슨 S. 루이스 목사는 1916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부 11차 연회를 소집했다. 하와이 선교부 연회 관계 위원회의 리온 L. 루프부로 목사, G. 모토가와 목사 그리고 C. 나까무라 목사의 추천에 따라 루이스 감독은 차윤중을 캘리포니아 연회에 제2년차 목사 연수자로 추천했다. 국권 피탈 이후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관계가 악화한 가운데 위의 연회 관계위원회 3명 중 2명의  일본인 목사는 한국인에 대하여 선한 마음을 가진 자로 보인다.

1918년에 펴낸 하와이 선교부 연회록에는 차윤중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는 8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신한민보에서 볼 수 있다. 신한민보에서 찾은 그의 이름은 나라 사랑에서 또렷했다. 그해에 교육과 실업을 진발하고 자유와 평등을 주창하며 조국 광복을 원조한다는 목적을 가진 국민회에 국민 의무금으로 5달러를 냈다. 이듬해에는 그가 두 차례나 특별 의연을 하였는데 각각 5달러와 10달러를 냈으며, 특별 의연뿐만 아니라 적십자회에 3달러를 냈다. 1920년에도 국민 의무금으로 5달러를 냈고, 이듬해에도 국민 의무금으로 5달러를 냈으며, 1922년에도 5달러를 냈고, 1923년에도 국민 의무금으로 10달러를 냈고, 1932년에는 인구세로 1달러를 냈고, 1942년에는 하와이를 제외한 북미에 유일한 한글 신문인 신한민보 신문 대금으로 10달러를 기부했다.

차윤중은 1923년에 8월에 신 한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 후원회원에 가입하고 황보정걸 등과 함께 후원회금을 냈는데 그 액수는 보도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듬해 2월에 “민립대학 기성회 후원회”라는 제하의 기고문이 신한민보에 다음과 같이 게재되었다. “민립대학 기성회 후원회를 발기한 지 오랬으나 성적이 좋지 못합니다. 우리는 일층 더 활동하여 볼 필요가 있으므로... 더 기다릴 수 없이 후원회 간부를 조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조직 방침에 대하여는... 제1식은 후원금 판납하신 이 중으로서 먼저 아홉 사람의 평의원을 투표로 선정한 후 이 평의원 중에서 회장과 재무 겸 서기를 평의원의 투표로 선정하고 중요 안건은 일반투표에 부칠 일. 제2식은 누구 씨나 제1식을 불찬성하시는 이는 후원회 간부 조직 방식을 본사에 제출하면 본사에서 그 제의들을 모아서 상항 부근에 있는 후원회 발기인들과 같이 조사 초집 후에 다시 공동 투표할 일. 제1식을 찬성하시는 이는 이하에 열명한 제 신사 부인 중에서 가합한 사람 아홉을 추려서 그 가합한 이름 아래 비어 둔 자리에 ‘가’를 쓰시되 기한은 3월 말일로 한하며, 기한 일자를 쓰며 자기의 성명을 기입한 후에 본사로 보내면 들어온 투표만으로 실행할 일.”이라고 썼고, 이어서 차윤중과 함께 조득린, 백일규, 최응선, 김일선, 김일선 씨 부인, 최능익, 이옥형, 이정건, 신 한, 신 한 부인 경애, 김병규, 송헌두, 장수영, 김원택, 김 부인 원도, 김용정, 장인환, 김승제, 신달원, 황보정걸, 한백선, 신윤국, 차윤중, 김형식, 박을성, 허승원, 송상대, 박귀호, 김원호, 이영수, 최진하, 오창훈 가운데 선정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에 “제2식을 원하시는 이는... 후원회 조직 방식을 분명히 기록하여 보내되 그 기한은 3월 말로 한정할 일.”이라고 썼다. 그 후 백일규(31표), 최진하(30표), 장인화(27표), 황보정걸(19표), 최응선(17표), 정칠래(14표), 최능익(14표), 이영수(12표), 신육국( 11표)이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차윤중은 1표를 받아 평의원에 선임되지 못했다.

힐로 국민회 개설을 제안하는 자가 40명에 달하여 표상옥과 함께 차윤중이 주선하여 1925년 3월에 다수 동포가 모여 임시 국민회라 명칭하고 회장에 차윤중을 선출하였다. 그해 6월에 차윤중은 신한민보에 임시 국민회의 세 가지 목적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만사 일생의 유일한 활로가 단합에 있는 줄 확신하는 우리가 아무 기관이 없이 거의 1년을 지내왔습니다. 이 어찌 유감이 아니옵니까. 그동안 여러분 비분강개하심과 노심초사하심으로 응당 대동 단결의 쓸만한 재료를 많이 저출하였을 줄 믿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열쇠 되어 여러분의 반복 경용인 보귀를 열어젖히고 그 좋은 의향을 다 끄집어내 볼까 하는 본의에서 발기하는 것이올시다. 그런 이유에서 몇 조목을 첨부하오며 몇 줄로 문까지 기록하였습니다. 1. 이미 성립된 마위와 임시로 성립된 힐노에 의향을 받아 호항에 임시 교통 기관이 설립되기를 요하겠습니다. 2. 호항에서 임시 기관이 서기 전에 무슨 의향을 발표하고자 하시면 본회에서 가급적 수용하겠사오며, 3. 국민회로 회명을 한 것은 역사적임과 통일적임을 적용한 것뿐이고, 더 좋은 회명이 공결되면 복종하겠고, 만일 교민단 아래라도 모이자하면 더욱 열심 충종하겠습니다. 민국 7년 4월 10일.”

1944년에 연합위원회를 상설 기관으로 인정하고 각 단체 대표원이 연합위원회에 참가하기로 한 후 연합위원회 임원을 개선했다. 위원장에 박상하, 부윈원장에 안원규가 신임되었다. 차윤중은 군사금 재무에 최두욱과 함께 선임되었으므로 광복을 앞당기려는 차윤중을 읽게 된다. 

차용중에게는 미국 메인주에 있는 종이제조법 전문대학을 졸업한 아들 차성현이 있었고, 스탁톤에 거류한 최대선은 그의 처남이었다는 보도 외에 그의 마지막을 찾을 수 없다.

damien.sohn@gmail.com

10.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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