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안시흡 (1882-1971)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안시흡(安始洽)은 1882년 1월 16일 한국 전주 인근 완산 춘산리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했다. 원산 인근 춘악에서 거주하던 그는 24살이던 1905년에 미국 꿈을 품고 시베리아 기선을 타고 그해 5월에 호놀룰루에 안착했다. 그는 로마자 알파벳으로 Ahn Shi Heup, Ahn See Hup 또는 Ahn Syheup으로 썼고, 영어 이름은 헨리였다.

안시흡이 하와이에 온 지 11년이 되던 1916년 2월에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 감독이었던 윌슨 S. 루이스 목사가 소집하여 제11차 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열렸다. 이 해 감리사는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였고, 한국인 총무는 김C.H.였다. 이 연회는  안시흡을 가와이 섬의 리휘와 길나위아 지역에서 노동하고 있던 한인들에게 파송하였고, 최태C를 리휘 지역의 지역 설교자로도 파송했다. 안시흡의 선임자였던 김C.S는 리휘 뿐만 아니라 길나위아와 하나마울루 지역도 맡은 데 반해 안시흡은 리휘와 함께 길나위아 지역을 맡았다.  1년 전만 해도 한인 노동자가 거주했던 길나위아와 하나마울루 지역에는 한인 노동자가 더 이상 거주하지 않은 반면에 길나위아 지역에 한인 노동자가 새롭게 거주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1916년 2월에 김C.S.가 보고한 리휘, 길나위아 그리고 하나마울루 지방에 주일학교가 3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8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38명이었고, 세례교인수가 122명이었고, 엡워스 연맹 고등부에 가입한 수가 30명이었으며, 예배당이 하나 있었고, 그 시가가 1,500달러였다. 그달에 리휘에 주일학교가 있었고, 1,500달러 시가의 예배당이 있었으며 엡워스 연맹 고등부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1917년 하와이 선교 연회록을 찾지 못해 안시흡의 1년간의 선교 사역 통계를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깝다.

1917년에 하와이 선교연회 제12차 회의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안시흡은 목사 준회원 과정을 위한 수습 과정 1년 차에 들어갔다. 이 연회에서 그는 1년 전과 같이 가와이 섬의 리휘와 길나위아 지역으로 파송받았다. 1년 후인 1918년 3월에 성인 세례자가 8명이었고, 아동 세례자가 9명이었으며, 유아세례를 받고 아동 세례를 받은 자가 48명이었으며, 학습 교인이 27명이었는데 이 중 지난 1년간 학습을 받은 자가 18명이었다. 주일학교가 세 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이 5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이 45명이었다. 엡워스 연맹에 등록한 자는 없었으므로 엡워스 연맹은 활동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배당은 리휘와 길나위아, 두 곳에 있었는데 동산과 부동산을 포함하여 500달러에 해당했고, 사택은 리휘에만 있었던 것같은데 시가는 1,000달러여서 예배당 시가의 두 배였다. 그런데 이들 건물에 든 1년간 비용은 196달러였다. 자선비로 1,515달러를 헌금하였는데 훈련비로 45달러였고, 다른 목적을 위한 헌금이 1,470달러였다.  

1918년 3월 중순에 하와이 선교연회 제13차 회의가 감독 아드나 W. 레오나르드 목사의 소집으로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였다. 안시흡은 J.M. 크루즈와 함께 준회원 수습 과정 2년차에 있었다. 최S.E.는 병환으로 한국으로 귀국하여 수습 1년차 과정에 머물렀고, 일본인 스즈키도 계속 1년차 과정에 머물렀다. 본 연회는 안시흡을 지난 2년 동안 파송되었던 가와이섬의 리휘와 길나위아 지역으로 다시 파송하면서 임병순과 황균표는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해 10월에 안시흡이 제출한 세계 제1차대전 징집서류에서 그가 중간 키에 중간 체구였음을 알게 된다.

매트 S. 휴즈 감독의 소집으로 1919년 3월에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선교연회 제14차 회의가 모였다. 그런데 안시흡은 박기홍과 함께 병원에 입원한 관계로 이 연회에 참석할 수 없었고, 작년에 이어 집사 목사로서 준회원을 위한 수습 2년차 과정에 있게 되었다. 이 연회에서 안시흡은 작년과 같이 가와이섬의 리휘와 길나위아 지역으로 파송되었다. 그리고 함준후와 송공선이 리휘 지방에 권사로 파송되어 안시흡의 리휘 사역은 크게 도움이 되었으나 그만큼 사역이 컸음을 알게 된다. 

안시흡이 1년간 사역한 1920년 2월에 리휘와 길나위아 지역에는 성인 세례 교인이 3명이었고, 아동 세례 교인은 4명이었으며, 유아 세례자로서 아동 세례를 받은 교인이 20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10여 명이었는데 그해 학습을 받은 교인이 4명이었다. 그해 2명이 사망하는 슬픔이 있었다. 주일학교는 리휘에만 있었는데 교직원이 2명이었고, 7명이 등록했다. 작년과 같이 리휘 예배당은 시가가 500달러였고, 사택은 1,000달러에 해당했다. 지난 1년간 건물 수리와 보수를 위해 100달러를 지출했다. 지난 1년간 100주년 헌금으로 30달러를 헌금했다.  

그런데 안시흡이 1919년에 가와이 섬 골로아 지역과 막가웰리 지역에 파송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20년 하와이 선교 연회록에는 박WT가 파송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안시흡은 1917년에 파송된 리휘와 길나위아 지역 선교는 1920년 2월까지 3년간이었다.

A.W. 레오나르드 감독의 소집으로 1920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하와이 선교연회 제15차 회의가 있었다. 이 연회에서 안시흡은 연회 준회원인 집사 목사를 위한 수습 2년차에 등록되었고, 오아후 섬의 와일누아와 가후구 지역으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1921년 2월 연회록에서 와일누아 지역 통계가 없어 안시흡이 1년간 수고한 선교 통계를 확인할 수가 없다.

하와이 교민단체가 통합하여 한인합성협회가 조직되어 1907년에 기관지로 한인합성신보를 창간했다. 2년 뒤 한인합성협회가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있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가 되면서 그해 한인합성신보를 개제하여 신한국보를 발행했다. 그런데 1913년에 신한국보를 국민보로 개제하였다. 정해규가 외교와 통신에 집중하기 위하여 국민보 주필을 사면함에 따라 1920년 10월에 안시흡이 국민보 주필이 되면서 나라 사랑에 뛰어들었다. 1921년에도 안시흡은 국민보 편집인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안시흡은 1913년에 동지회가 창간한 태평양잡지 부편집인이 되었다.

1921년 2월에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선교연회 제16차 회의가 감독 아드나 W. 레오나르드 목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그런데 안시흡은 지난 해에 하와이 선교연회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선교지를 이탈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콜로아-마카웰리 지역 선교 기간은 길어도 2년이 되지 않는다.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를 떠난 안시흡은 이승만이 조직한 한인기독교회에서 사역하였다. 1924년을 전후하여 그는 학갈나우 가마이 지역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그해 1월에 모인 하와이 한인 교민총단 의사회에 안시흡은 학갈나우 지방 의사원으로 출석했다. 이 의사회에서 총단장에 김영기가 피선되었고, 부단장에 곽리홍이 선정되었다. 

그해 11월 2일에 청년회 통상회에서 임원을 선정하였는데 회장에 지만이, 부회장에 엄승문, 통신국장에 박새별, 재무에 최아지, 교제국장에 이산술, 인제국장에 김점이였고, 안시흡은 학무국장에 선임되었다. 그달 8일에는 한인을 특별히 사랑하던 농주 로쓰 내외를 환영하였는데 안시흡이 환영회 취지를 설명한 후 박성환의 환영사, 주일학교 유년반의 찬송가, 지만이와 이산숙의 이중창과 힐로 중학생 안순래와 홍세라의 이중창에 이어 농주 내외가 답사했다. 그리고 힐로 교회 목사 이명우의 연설에 이어서 다과회가 있었고, 무궁화가를 다같이 부른 후 환영회를 마쳤다. 그달 15일에는 한인기독교회 대회가 있어서 안시흡이 마위 목사 장 붕과 함께 참석하였다.

1926년 1월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에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평신도 연회가 회장 최창덕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이날 안시흡은 학갈나우 한인기독교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하와이 한인 교민 총단 제8차 의사회가 1928년 1월에 총단 집회당에서 11개 지방단 선출 의사원 10명이 모인 가운데 총단장에 최창덕이 재선되었고 부단장에 손덕인이 당선되었는데 안시흡은 통신 서기로 선임되어 조국 독립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날 국어 교과서 출판 등을 가결하였고 1년 예산으로 6,540달러를 통과시켰다. 

안시흡은 1924년경부터 1929년 초까지 적어도 4년간 학갈나우 지역 선교 사역에 몸담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 4월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평신도회의에서 본 교회 담임이었던 민찬호의 후임으로 안시흡과 이명우가 거론되었다. 이명우가 58표를 얻어 목사로 추대되고 안시흡은 51표를 받아 부목사로 선택되었다. 이명우가 담임목사를 사양하였으므로 안시흡이 임시로 담임목사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이명우가 임시로 목회하였다고도 한다. 

안시흡은 1930년을 전후하여 하와이에서 태어난 18세의 이완익을 고용하여 꽃농장을 운영하였는데 1933년경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1937년 호놀룰루 전화번호부는 안시흡이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소개하였고 1938년 전화번호부에서도 그가 위의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한인감리교회가 아니라 한인기독교회로 보인다. 

태평양잡지의 후신으로 태평양주보가 1930년부터 발간되었다. 1938년에 주필에 이원순이었고, 편집인에 안시흡이 책임을 맡았다. 이듬해 김이제가 태평양주보의 주필이었고, 안시흡은 편집인이었다. 그해 2월에 한인기독학원의 기숙사 주방 설비 대체, 기숙사 집기 교체, 그리고 2명의 간호 선생 월급을 위하여 3,993달러 모금을 위한 모금특별위원을 선정했을 때 부인반과 남자반으로 나누었는데 안시흡은 7명 남자반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호항 지방 공동회와 호항지방 동지회 서기로 선임되었던 안시흡은 그해 우리의 사업부흥이라는 책을 펴내 동지회, 기독교, 학원 그리고 외교 사업이 부흥했다고 적었다.

동지회 총서기 겸 재무를 안시흡이 1940년 3월에 사면하면서 국민보의 출판을 맡았는데 1942년을 전후하여 미국 연방정부 기관의 창고에서 일하면서 생활비를 조달했다. 1942년에 국민회 기관지인 국민보와 합동으로 국민보-태평양주보가 되었다가 1944년에 다시 태평양주보가 되었다. 1946년에 안시흡이 태평양주보 주필 겸 편집인이 되었다가 1950년 3월에 그만두었는데 그의 나라 사랑은 1958년 1월에 미포 대한인 동지회 연례대표회가 그를 통신 서기로 선정함으로써 계속되었다.

안시흡의 마지막 선교 사역은 1958년에 힐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면서다. 그는 1971년 6월 2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향년 89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위의 교회에서 사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mien.sohn@gmail.com

10.0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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