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이내수 (1872-1923)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내수는 1872년에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장수로 이동했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수년째 계속된 흉년으로 허덕이던 1904년 2월에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인천을 거쳐 일본 고베에서 도릭호에 승선하여 두 주 뒤 하와이 호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일본 공사가 선박 회사와 부동하여 한인들의 여권을 주지 않아 하와이 이민국에서 사무를 보던 류약류와 송헌주가 담판하여 여권을 찾아 각 농주에 전하였는데 미처 전하지 못한 이내수 등 15명의 여권을 공립신보사에 맡겼다. 그래서 이내수는 광고비와 우표비 조로 20센트를 내고 여권을 찾았다.

일본의 야비한 행동을 체험한 이내수는 1906년 12월에 하와이 호항에서 동포가 자치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생활을 개선하고,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민찬호, 임준호, 임정수와 함께 동포 자치 계몽 단체인 공진회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하와이 선교부 제2차 연회가 호놀룰루에서 모였다. 그해 감독은 얼 크랜스톤 박사였고, 감리사는 존 W. 와드만이었다. 한국교회 총무로 현 순과 선교부 보조요원으로 이지성이 있었고, 2년차 목사 수련생으로 민찬호, 윤병구, 이경직, 홍치범, 김유순, 1년차 목사 수련생으로 신판석, 최진태, 김이제, 김유순이 있었다. 와드만 감리사는 그해 하와이 선교부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지난 1년간 시간과 공간이 부족하여 하와이에 입국한 5, 6천 명의 한국인 노동자를 완전히 전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 중 절반 이상이 세례교인이나 학습교인 또는 원입교인으로 교회에 등록했으며, 25개의 기도처를 조직했고 12명의 전도인과 6명의 교사와 많은 권사와 속회 인도자를 두어 자원하여 봉사토록 했다. 이런 가운데 하와이 선교부는 일본인교회보에 이어 포화한인교보 (Hawaian Korean Advocate)를 발행했다. 포화한인교보 이외에 한인과 관련된 기관으로는 한국 매일학교가 있었는데 와드만 감독의 부인이 교장을 역임했다. 

위의 하와이 선교부 연회는 이내수를 포화한인교보의 발행인으로 파송했고, 부편집인으로 민찬호를 연임시켰다. 민찬호는 1906년에 포화한인교보 발행인이자 부편집인으로 재직했다. 1904년에 홍승하가 등사판으로 발간한 포화한인교보는 도쿄에 있는 감리교 출판사에서 타입을 만들었는데 앞표지에 반도 왕국 대한 제국이 새롭게 문명화되는 의미로 솟아나는 태양 그림을 넣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한 가운데 태극기는 명암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서 구출을 보여 인상적이었다. 포화한인교보는 편집인 사설, 교회 뉴스, 선교 요지, 편지, 한국 소식, 주일학교 학습지 등을 실었다. 매월 500부를 인쇄하여 하와이 각 섬에 배포했고, 널리 알려져 더 많이 인쇄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한국에서 사용하는 타입을 수입하고자 했다. 

이듬해인 1907년 8월에 이내수는 호항에서 우체함 669호를 마련하고 청루 이층집을 빌려 해동여관을 설치했다. 한국이나 미국으로 가는 동포에게 선표를 주선하고 매사를 편리하게 도움을 주었는데 상등은 1 주야에 55센트였고, 중등은 1 주야에 45센트라며 다음 달에 포화한인교보에 광고를 냈다. 

그해 9월에 하와이에 있던 24개 한인 단체 대표 30명이 호항에 모여 조국의 국권 광복을 후원하고 재류 동포의 안녕을 보장하며 교육사업을 증진한다는 목적으로 한인합성협회가 결성되었고, 총회장에 임정수와 정명원, 부회장에 안원규와 함께 이내수가 선임되었다. 그들은 하와이의 47개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여 1,051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회비(예납금)는 매년 2달러 25센트였다. 그달 말에 청년회 통상회가 모였다. 회규에 따라 새 임원을 선정하였는데 이내수는 인제국에 선임되었다. 그해 새 임원은 회장에 임정수, 전도국에 임전호, 학무국에 김성권, 교제국에 김덕성, 통신국에 한재명, 회계국에 이지성이었다.

1908년 1월에 하와이 선교부 제3차 연회가 호놀룰루에서 모였을 때 지난 1년간 포화한인교보는 성공적으로 운영됐음을 알게 된다. 민찬호와 함께 이내수에게 한국인들은 크게 관심하고 동정했으며, 달마다 구독자가 증가하였고, 지난 연회 이후 9월까지 500부를 인쇄했고, 9월 이후 600부를 인쇄하고 있었으며, 연회 직전 주간에 민찬호가 구독자 모집 여행을 하여 새로운 구독자를 많이 찾았으므로 더 많은 수요에 더 많은 부수를 인쇄하게 되었다. 때때로 구독자들은 잡지 대금을 기쁘게 지급했다. 지난 한 해 포화한인교보는 편집인 사설, 다양한 필자가 쓴 기고문, 찬양가와 찬송가, 짧은 대화 글, 국제 주일학교 매달 교재, 교회 소식, 한국과 하와이 소식 등을 실었다. 이 출판 사역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소망했다.

1908년 하와이 선교부 연회는 이내수를 한 해 더 포화한인교보 발행인으로 파송했다. 그해 감독은 데이비드 H. 무어 박사였고, 와드만 감독은 연임됐다. 한국 교회 총무는 홍치범이었고, 이지성은 보조위원으로 연임됐다.

그해 3월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정거장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고종의 정치 고문이었던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통일하고 확대하자는 대의에 1909년 2월에 북미한인공립협회 총회장 대리 정재관과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총회장 정원명은 위의 두 기관을 합동하기로 하고,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와 국민회 포화 지방총회를 설립했다. 그해 6월에 국민회 포화 지방총회는 총회장에 이내수를 선임했다. 다음 달에 포화 지방총회는 본 지방 장통경주 동맹회에 교섭하여 한국과 해삼위(브라디보스톡)와 멕시코에 있는 우리 동포를 이민하기로 주선하였다.

그해 8월에 신한민보는 하와이 신한국보에 나온 기사를 일어탁수(一魚濁水)라는 제하로 게재했다. 하와이 각처 농장에 있는 동포 중에 몇몇 잡류가 있어 부지런히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협잡 분경으로 일반 동포의 걸림돌이 되어 심지어 농주에게 견죽을 당한 일이 있었다. 예를 들면 티겟(일한 날자를 증거하는 서류)을 작간하여 장부를 현란하게 하고, 밖에서 일하다가 십장의 지휘를 반항하거나 동포끼리 질투하고, 십장의 눈치만 살피다가 짬을 타서 외딴곳에 가서 잠을 자거나, 밖에서 매양 시간을 허비하여 남의 중한 금전을 공짜로 먹으려고 게으르게 굴다가 권고하여도 듣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자는 불과 몇 사람이 되지 아니한데 일어탁수가 되어 그달 30일에 호항에 있는 수백 명 한인 동포가 티켓을 얻으려고 정거장에 갔다가 일체 퇴각하였다. 그래서 민찬호와 함께 이내수가 가서 간신히 교섭하여 만일 폐해가 있으면 한인 단체인 국민회 포화 총회장 이내수가 담당하기로 하고 지방 농주의 허락을 얻어 한인 동포를 취업할 수 있도록 하였고, 폐해를 끼친 사람에게 캠프보시(동물 주관)를 하도록 하여 한인 동포의 노동 생업을 온전히 보호하기로 하였다.

 

1907년 포화한인교보의 발행인으로 파송 … 포화한인교보 성공적으로 운영

출판 사역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소망

 

그달에 마위도 지방회원이었다가 수개월 전 한국으로 돌아간 원우현의 청원에 따라  국민회 포와 총회장이었던 이내수는 황해도 옹진군 기독 광선학교 임시공동회를 설립하도록 허락했다. 그해 10월에는 하와이에서 60여 곳에 국민회 지방회를 설립하고 총회장 이내수는 각 도를 순행하여 동포의 고초를 위로하고 애국 사상을 고취하여 국민회가 발전할 희망이 컸다. 

1909년 3월에 호황에서 미국 북감리교 인디아나 연회의 존 T. 존스 감독과 하와이 선교부 와드만 감리사에 의해 하와이 선교부 제4차 연회가 개최되었다. 이 연회에서 와드만 감리사는 포화한인교보는 일본인 교회보와 더불어 널리 알려졌고, 흥미 있는 정보 교환의 채널이 되었는데 후자는 캘리포니아 연회 포교도서위원회로부터 얼마간의 보조를 받았지만, 전자는 구독자의 회비를 통해 재정적으로 자립했다고 보고했다. 포화한인교보 구독자가 지난 1년간 100여 명이나 새로 가입해 700부를 출판하여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에게 배포했고, 이에 더하여 한국과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는 100여 명의 한인에게 많은 한국교회보를 배송했다. 지난 해에도 편집인 사설, 기고문, 국제 주일학교 매달 교재, 하와이 교포 교회 소식과 한국의 교회 소식을 실었는데 한 문장 한 문장은 한인에게 영적, 지적, 교육적 지식을 증가시켰고, 새롭게 올린 복음 사역 사진과 유명 인사 사진과 교회 사진은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에게도 흥미를 한층 끌어올렸다. 서면 보고한 민찬호는 한인의 학교 사역과 교회 사역에 진지하게 참여한 와드만 감리사에게 매우 감사하면서 포화한인교보에 대한 신심 어린 그의 관심에도 크게 감사하면서 포화한인교보가 한인을 위하여 가장 좋은 기독교 잡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고, 이러한 중요한 문서 사역이 계속되도록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함께 하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내수는 1908년 하와이 선교부 연회 이후 포화한인교보 발행인 직을 사임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이내수는 약 2년간 포화한인교보에서 사역하였다. 

포화한인교보를 떠난 이내수는 나라 사랑에 크게 힘썼다. 1910년 2월에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했다. 그해 12월에 신랑감의 사진만 보고 편지로 결혼을 약속하고 하와이로 온 최초 사진 신부인 목포 출생의 최사라와 이내수는 민찬호의 주례로 결혼했다. 당시 그는 코인 가구회사에서 매트리스 가구공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3월에 갈리히 지방에서 하와이의 각 지방 대표가 회동하여 오아후 임시연합회를 고쳐 국민회 포화 임시 연합 중앙회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정하였다. 이내수는 법무원에 선임되었다. 이날 제1조와 총회장 안현경 탄핵안은 재정상 과실을 들어 총회장 안현경의 행정을 거절할 것을 선언하였고, 하와이 시국에 대한 선후 방침을 결정하였으며,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는 때에 총선거를 다시 행할 예정이었다. 이런 가운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하와이 특명 위원부를 파송하였고, 위원부 부장이었던 이내수가 1920년 4월에 신한민보에 ‘중앙총회 공고’라는 제하의 6줄 기사를 통해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장 윤병구에게 본 위원부가 총회장의 지시에 따라 그동안 폐쇄하였던 총회관 문을 열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내수는 다년간 속병으로 신음하다가 불행히 1923년 6월 14일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 4명을 이 세상에 두고 향년 52세에 장서하여 이튿날 호항한인감리교회에서 장례예배가 있고 나서 누아누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나는 한국 국민의 일 분자가 되어 광복 사업의 성공함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됨이 실로 죄인이다’라고 했다. 그달 17일에 신홍균의 사회로 추도회가 있었다. 김진호는 이내수의 역사를 진술하고, 권도인, 정원명 등이 간곡한 추도사로 그의 충애와 약력을 소개하였다.

amien.sohn@gmail.com

09.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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