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박종수 (1868-1951)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박종수는 1868년 11월 27일에 평안남도 증산군 논증리에서 태어나 평양 노기동에서 거주했다. 그는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36세가 되던 1904년 9월에 아내 김명근과 세 자녀 용손, 삼자, 보배 그리고 처제 부부와 함께 몽골리아 배편으로 하와이 노동자로 이민 갔다. 1910년에 그는 하와이섬 코나에서 농장 노동자로 활동했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공부한 사람이었던 박종수가 노동하던 농장에서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으므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연회는 그를 1911년에 오아후섬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하면서 이관묵 등과 함께 집사 목사 과정을 시작하도록 했다. 그는 신흥균, 임정수, 김유호, 이내수, 임봉안, 이재연, 유동면과 함께 하와이 재류 동포를 위하여 학생 양성소 창건을 추진하면서 1911년 7월에 신한민보에 학생 양성소 창건 발기문을 게재했다. 

박종수는 1912년에도 오아후섬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그는 그해 6월에 신한민보 경비를 위하여 1달러를 보조했다. 런던의 허 극이 4달러 63센트를 기부했지만 대부분 센트를 보낸 것으로 보아 큰 기부임은 물론이다. 그는 1914년까지 오아후섬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를 섬겼다.

1914년에 박종수는 같은 섬 가할루 교회로 파송받았다. 본 교회는 최근까지 있다. 그해 6월에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 지방에 있던 아후마누 농장에서 103명이 입대하여 대조선 국민군단이 설립될 때 박종수가 협력했다. 안원규와 함께 박종수가 리비 회사와 계약한 1,500 에이커의 파인애플 경작 도급을 기부하고, 와이아와에서 자작 농사하던 임응천, 한태경, 한치운과 이치영이 기부한 그해 농사 수입으로 재원을 확보했다. 미국 영토에서 외국인의 군사 활동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하와이 군사령부가 이를 묵인한 가운데 미국 군제를 사용하고 총 대신에 목총을 사용하였으며, 설비는 적었으나 완전한 군대였다. 박종수는 병 학교 주임으로 단장 박용만 바로 아래 계급인 대대장이었다. 그런데 어려운 군영 운영 재정 조달 등으로 1917년쯤에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박종수는 이듬해인 1915년에 하와이섬 파팔로아 교회로 파송받아 1920년까지 파팔로아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1913년에 설립한 한응학교를 통하여 국어와 애국정신을 가르쳤다. 1915년에 성인 4명과 어린이 3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어린이 5명이 학습을 받았는데, 1917년에는 청소년 1명이 세례를 받았고, 성인 6명이 학습을 받았으며, 1920년에는 성인 2명이 세례를 받았고, 학습교인 어린이 3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성인 4명이 학습교인이 되었다. 

5년간 섬기던 파팔로아 지역을 떠나 1921년에 박종수는 같은 섬 호녹가이지 교회로 파송받아 1923년까지 2년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1922년에는 성인 2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9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학습교인 어린이 42명이 세례를 받았고, 성인 2명이 학습교인이 되었다. 1923년에 오아후섬 와일루아 한인감리교회로 파송받았는데 그해 9월에 본 교회를 사면하였다. 

그런데 1925년에 박종수는 교역자로 파송을 받지 못했다. 그는 와일누아 교회에 출석했다. 서재필 박사를 하와이로 초대할 때 와일누아 교회 여러 명이 기부를 하였는데 그해 7월호의 한인교회보에 실린 기부 명단에 박종수도 있었다. 그 명단에 실린 본 교회 교인은 정미가, 이성삼, 양성학, 박경일, 조한문, 김경건, 맹정호, 김신실, 황사용, 이승렬, 박종현, 이동빈, 선우혁, 유정준, 박남순, 김상운, 박종현이었다. 와히아와 교회가 한국을 다녀온 박종수를 그달에 초청하여 환영도 하고 말씀을 들었는데 그는 이에 보답이라고 하는 듯 수십 달러에 해당하는 예배당 정원 잔디 깎는 기계를 기부했다. 이듬해 박종수는 황사용이 담임으로 있는 오아후섬 가후구 한인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아 가후구 교회를 섬겼다. 그해 성탄절 저녁 8시에 하와이 와히아와에 거주하는 박종수의 차남 관두와 호항 문홍석의 차녀 인희와 결혼했다. 그해 학습교인 12과 세례교인 7명이 있었다.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연회는 1927년 이후 박종수를 파송하지 않았고, 곧바로 그는 호놀룰루로 이동한 것 같다. 조국 독립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1930년 1월에 하와이한인협회를 조직할 때 그는 이정근, 최두욱, 조광원, 이원순, 신국 겸, 전운서, 박상하, 김윤배, 김진호, 조용하, 이상호, 강영효, 정원명, 김이제와 함께 임시위원으로 활동했고, 임시 위원장은 조용하, 임시 재무는 김윤배였다. 이듬해 1931년 8월 29일 저녁 7시 30분에 호항 교민단 주최로 밀러가 총단관에서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치 기념식이 있었다. 단장 손덕인의 사회로 변홍규가 기도하고, 홍한식, 서진수, 마주홍과 함께 박종수도 연설했다. 이후 미감리교회 부인 찬송대의 창가와 이용직의 축사가 있었다.

그해 9월에 강영각이 미주 대륙을 다녀온 후 청년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행하려고 할 때 박종수가 협력했다. 김유택의 주택에서 모여 임시 임원과 이사원을 선정했는데 회장에 이용직, 서기에 강영각, 재무에 한길수, 사교원에 김유택을 선정했고, 이사원에 이사라, 김이빌, 이동빈, 조광원, 홍한식, 이한식, 정의조와 함께 박종수가 선임받아 그달 19일에 누아누 청년회관에서 박종수 등 150여 명이 한인소년동맹단을 조직하고, 15세 이상 30세까지는 전회원으로, 40세까지는 찬성회원으로, 그 이상은 찬성원이라 칭하여 조국 정신 고취, 친목으로 청년 단합 경영, 사회적 수양을 실현하여 재미 한족의 장래를 목적했다. 1년 예산을 300달러를 지정하고, 그 자리에서 100여 달러를 모금했다.

박종수의 선교사역은 1933년 9월에 개최한 호항 교회 계삭회에서 재개됐다. 임두화 담임목사는 박종수를 김이제, 송치순, 문또라, 안정송, 송아더와 함께 본처 전도사로 천거하였고, 또한 송정윤 등과 함께 유사로도 선정했다. 그해 12월 22일 금요일 저녁에 성탄축하식이 있었다. 이때 시의 사회로 주악이 있은 뒤 일동이 찬송가를 부른 후 박종수가 기도했다. 이어서 홍순원의 환영사, 유치반의 ‘별’ 노래 합창, 암송과 노래 등의 순서가 있었다. 이듬해 1월에 프라이 감리사의 사회로 개최한 호항 교회 계삭회는 박종수를 김이제와 함께 본처 목사로 결정하였다. 당시 전화번호부는 그의 직업을 경비원으로 소개했다. 1935년에 본처 목사였던 박종수가 본 교회 대동국어학교 교장으로 피선되어 교사 차정님이 사면하여 당분간 임정렬이 교사로 시무토록 했다. 1935년 11월에 호항 교회 계삭회에서 박종수가 유사로 선정되어 회계를 맡았다가 1936년이나 1937년에 있은 계삭회에서 다시 본처 목사로 선임되었다. 하와이 동역 목회자들과의 유대를 위하여 1937년 2월에 호항 교회 임두화 목사가 점심을 초대했을 때 박종수가 임준호, 홍한식, 현 순, 안창호, 이관묵, 정의조, 최용기, 고덕화와 함께 참석했다. 그해 12월에 호항 교회 계삭회에서 박종수는 본처 목사로서 사역 보고서를 제출했다.

1938년 5월에 호항 교회가 운영하는 대동국어학교 방학식이 있었다. 일동의 조선 국가 합창, 209장 찬송, 문또라의 기도, 전미리암의 성경낭독, 이영생의 피아노 독주, 2반 학생의 대강놀이, 1반 학생의 노래, 서호신의 언문의 제정, 3반 학생의 대산놀이, 생도 일동 합창, 권에스더의 국어 독서 낭독, 4반 학생의 격언 암송, 이영생의 공자 역사, 한나오미의 우스운 이야기, 상품 수여식, 진급생 광고, 졸업증서 수여, 기부인 광고, 219장 찬송에 이어 박종수가 축복 기도를 한 후 다과회로 이어졌다. 이날 이성생, 서정호 그리고 차재균이 졸업증서를 받았다. 

호항 교회는 1940년에 교인수가 300명을 넘어 새로운 교회 건축을 계획하고 교회신축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장에 안원규, 부위원장에 박관두, 재무부장에 박헬렌, 위원에 한형신, 정위라, 권희경, 임두화, 프라이 감독과 함께 박종수가 선정되었다. 휴직 목사였던 박종수는 1943년 9월에 프라이 감독의 부탁을 받고 라나이 교회에 임시 담임목사로 가서 1944년 1월까지 약 4개월간 섬긴 후 그해 3월에 나온 한인교회보에 ‘라이나 교회에 대한 감상’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본 교회 부인들이 열심과 사랑으로 본인을 관대하여 생전에 잊을 수가 없다며 모든 형제자매가 주님 은총 중 건강하고 끝까지 믿음을 더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를 담임목사가 파송되지 않아 라나이 농장에서 근무하던 박안드레가 임시 담임목사가 되었다.  

1944년 2월호 한인교회보에 박종수의 ‘의인 욥의 전기를 살펴보자’라는 글을 기고했다. 전 호에 이어서 게재된 글을 아래에 소개한다. “... 욥이 그 세 친구로 더불어 변론하고 엘리후의 책망을 받은 후에... 욥이 자기를 겸손이 하여... 자복하니 여호와께서... 욥에게 복을 다시 주시고... 이에 욥이 면양이 일만 사천이오, 약대가 육천이요, 소가 일천이요, 암나귀가 일천이 있고, 아들 7형제와 딸 3형제를 낳았으니... 전국 중에 욥의 딸과 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볼 수가 없더라. 욥이 저들에게 산업주기로 그 남형들과 같이 주고 그 후에 욥이 140세를 향수하고 손자 4대를 보고 죽으니라. 이 욥의 역사를 보시는 형제자매시여,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의롭고 부족함이 없다 하여 시험을 받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욥과 같이 행복한 생활을 하리다.” 

박종수는 그해 11월과 12월의 한인교 회보에 ‘성서의 원인’이라는 제하의 글을 게재하였다. 마지막 단원에서 그는 “성서 66권의 사상은… 첫째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둘째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가르치고, 셋째는 죄를 가르치고, 넷째는 구원을 곧 그리스도를 가르침이다. 성서의 예언은… 세 가지로 성취되었으니 첫째,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 둘째, 이방인에 관한 예언, 셋째,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다…. 인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정치, 경제, 철학, 과학이 아니고 법률이나 사상이 아니고 오직 성서뿐이다.”라고 권면하였다. 

박종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14일에 향년 73세에 호놀룰루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곳 오아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amien.sohn@gmail.com

07.0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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