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박세환 (1879-1950)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박세환은 1879년 9월 4일에 서울에서 출생하여 1897년에 이순이와 결혼했다. 24세가 되던 1903년 4월 11일에 하와이 노동 이민으로 그는 아내 이순이와 함께 하와이에 도착하면서 Park Sai Whan이 되었다. 그들은 하와이섬 올라 농장으로 배속되었다. 이듬해 하와이 올라에서 장녀 레이철이 태어났다. 

하와이에 온 지 5년이 되는 1908년 1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3회 하와이 연회는 박세환을 오아후섬의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와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의 권사로 파송했고,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에 양형Y도 권사로 파송했다. 1909년 3월까지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에는 1년 동안 성인 11명이 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에는 교사와 직원 5명이 등록 학생 20명 중 평균 20명이 출석한 가운데 가르쳤다. 한 해 동안 교인 1명이 별세하는 슬픔을 안은 힘든 노동 상황에서도 1년간 총 10달러를 헌금했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23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2명이었으며, 그리고 예배당 건물과 대지는 500달러에 해당했다. 

그리고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에는 1909년 3월까지 1년 동안 어린이 4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 17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주일학교를 두 곳에 설치하여 교사와 직원 5명을 임명한 가운데 등록 학생 31명이 모두 매주 출석하여 성경을 배웠다. 그리고 1년간 총 27달러를 헌금하였다. 이는 목골니아 한인감리교회가 헌금한 액수보다 약 3배나 되었다. 그달에 학습교인은 30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7명이었다. 그리고 예배당은 한 곳에만 있었고, 건물과 대지는 600달러에 해당했다. 한 해 동안 교인 1명이 별세하여 슬픔을 맞았다. 

1909년 3월에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4회 하와이 연회는 박세환을 황계S와 함께 오아후섬의 에와 한인감리교회의 권사로 임명했다. 1910년 3월까지 1년간 어린이 9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 1명이 세례를 받았다. 주일학교에는 3명의 교사와 직원이 있었고, 53명이 등록했고, 그리고 엡워스 연맹 고등부에 1명이 등록했고, 본 연맹 중등부에 17명이 등록해서 활동했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24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6명이었다. 시가 1,500달러가 되는 예배당에 1년간 수리비로 200달러를 지출하였고 총 25달러를 기부했다. 

1910년에 하와이섬은 이른바 “큰 섬”이었다. 2천 명 이상의 한인들이 흩어져 살았는데 북쪽에 있는 고하라에서 남쪽에 있는 가우에 이르는 해안과 서쪽에 있는 코나에서 동쪽에 있는 하마구아에 이르는 해변을 끼고 어디든 거주했다. 이곳에 박세환을 비롯하여 최진태, 김종수, 장영환, 조성환, 조윤택 그리고 이선일이 충성스럽게 전도하고 목회했다. 한인감리교회 간 거리는 멀고, 길은 험했으며, 한인들이 매우 넓게 흩어져 살았으므로 순회 전도할 수밖에 없었지만, 성공적으로 잘 수행했다. 이 중에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와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 그리고 올나 한인감리교회는 특별히 강했고 공격적으로 전도했다. 하와이 농장의 한 지배인이 몇 주 전에 있었던 저녁 식탁에서 한인 전도자의 사역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고 높이 칭송할 만하다고 말했던 데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해 1910년 3월에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5회 하와이 연회는 박세환을 하와이섬 고할라 구역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는 고할라 한인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다른 두 교회를 순회 방문하였고, 하와이 연회가 고할라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임명한 김성S과 함께 합력했다. 1911년 1월까지 고할라 구역의 세 교회에서 어린이 4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 9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달에 학습 교인은 42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9명이었다. 주일학교를 두 곳에 설치하여 15명의 교사와 직원을 임명하였으며, 영아부까지 포함하여 등록 학생은 45명이었다. 엡워스 연맹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1명이었고, 본 연맹 중등부에 등록한 학생은 24명이었다. 총 28달러를 헌금했다. 그리고 예배당 건물은 세 곳에 있었으며, 세 예배당 건물의 시가는 860달러였는데 한 해 동안 예배당 구입비와 수리비로 560달러를 지급했다. 윌리엄 노트와 김유순과 함께 박세환은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하와이 선교부의 절제위원회 회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1911년 1월에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6회 하와이 연회에서 박세환은 이선일, 조영택, 조한식 그리고 임준호와 함께 집사 목사 과정 2년 차에 들어갔다. 집사 목사 과정 1년 차에는 장영환과 최YC가 있었다. 박세환은 김유순과 윌리엄 노트와 함께 그달에 본 연회에서 절제위원회 보고를 다음과 같이 했다: ‘지난 1년간 하와이에서 다소간 절제 운동이 성공하였다. 비록 정치국민투표 켐페인에서 실패했지만 많은 사람이 이 켐페인을 알았고, 술집을 전멸시켜야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존 G. 우리 경이 워싱턴에서 거주하면서 커티스 빌을 옹호하고 있는데 만약 승인되면 우리에게 하와이 연방 금지법을 갖게 될 것임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를 낙관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마침내 사랑하는 이 땅에서 가장 큰 저주를 제거하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본 연회에서 박세환은 김유순, 이선일 그리고 윌리암 노트와 함께 작년에 이어 하와이 선교부 산하의 절제위원회 회원으로 임명받았다. 

그달에 박세환은 작년에 이어 하와이섬의 고하라 구역의 구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하와이 선교부가 고하라 한인감리교회 권사에 임명한 박낙H와 함께 박세환은 고하라 한인감리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유니온 밀과 하위에 있는 한인 노동자를 순회 전도하며 이 두 곳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를 섬겼다. 

박세환은 1915년에 하와이섬의 호녹가이지와 국구헤리가 위치한 구역의 구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선교회가 파송한 두 명의 전도사와 함께 사역하면서 1916년 2월까지 1년간 성인 11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6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학습을 받은 28명의 어린이가 세례를 받았고, 11명이 학습을 받았다. 1년 후인 1916년 2월에 학습 교인이 11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45명이었다. 안타깝게도 교인 한 명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두 교회를 위하여 주일학교를 네 곳에 개설하여 21명의 교사와 직원을 두었고, 등록 학생은 62명이었으며, 엡워스 연맹 고등부에 30명이 등록하였다. 1916년 2월에 예배당 건물과 대지의 시가는 650달러였다.

 

1910년 하와이섬 고할라 구역 선교사로 파송

1916년 윌슨 S. 루이스 감독으로부터 집사 목사로 안수

1950년 1월 22일 박세환은 향년 71세로 하나님의 부름 받음

 

1916년 2월에 모인 하와이 연회는 박세환이 80점을 맞아 4년 과정의 집사 목사 과정을 마쳤음을 보고했고, 그달 20일 오후 2시에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이관묵, 김재성, 조한식, 가메노수기 다나가, 오시미 미우라 그리고 코르넬로 C. 라미레즈와 함께 박세환은 하와이 선교부 윌슨 S. 루이스 감독으로부터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그날 홍한식은 장로 목사로 안수받았다. 박세환은 김종수와 이관묵 등과 함께 정규 과정에서 순회 선교사가 되었고, 장로 목사 과정 1년 차에 들어갔다. 그달에 그는 작년에 이어 하와이섬의 호녹가이지 구역의 한인 선교사로 파송 받아 그달에 연회가 임명한 변성운과 고덕화 구역 권사와 합력했다.

박세환은 작년에 이어 1917년에도 하와이섬 호녹가이지 구역의 구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18년 2월까지 1년간 성인 2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어린이 10명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으며, 학습 받은 어린이 10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9명에게 학습을 주었다. 1918년 2월에 학습교인은 40명이었고, 세례교인은 3명이었다. 주일학교를 두 곳에 설치하여 11명의 교사와 직원을 두었고, 등록한 학생은 30명이었고, 엡워스 연맹에 20명이 등록하여 활동했다. 1918년 2월 시가가 650달러인 예배당에 1년간 125달러를 사용하여 수리하였다. 교인들의 훈련을 위하여 40달러를 사용했고, 578달러로 자선활동을 펼쳤다.

1918년 3월에 제13회 하와이 연회가 모였다. 연회 마지막 날 박세환은 이관묵과 가메노수키 다나가와 함께 윌리엄 H. 프라이 감독과 리온 L. 루프부로 목사로부터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고 순회 선교사가 되어 다시 하와이섬의 호녹가이지 구역 선교사로 파송받았고, 하와이 연회는 호녹가이지 구역에 평신도 전도사로 황인W와 이난C를 임명했고, 정한흥, 변성완, 박조범, 이승옥, 최승약을 권사로 지명했다.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그는 P.A. 알비아르, 일본인 Z. 히로다, L.L. 루프부로와 함께 연회 성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필리핀에 있는 C.C. 라미레즈와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박세환은 홍한식 외 3명의 한인 목사와 J. 모리모도 목사외 2명의 일본인 목사 그리고 L.L. 루프부로와 함께 조사 위원회에 소속되었다. 그해 10월에 박세환은 세계 제1차전쟁 징병서류를 제출했다. 그가 적은 신상기록에 따르면 중간 체구에 장신이었다고 하나 168cm였고, 검은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지녔다.

1919년 3월에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4회 하와이 연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리온 L. 루프부로가 박세환이 캘리포니아 연회에 보낸 목사직 사면에 관한 편지를 읽었다. 박세환은 목회를 위하여 더 많은 준비를 하길 원했고, 사역이 더 이상 진전되기 전에 빚을 갚길 원했다. 그래서 하와이 연회 관계 위원회는 캘리포니아 연회가 그의 사면을 허락하고, 더 나아가 캘리포니아 연회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하와이 선교부는 그에게 차기 선교지를 임명하지 않기를 추천했다. 그의 사역에 감사하는 캘리포니아 연회가 보낸 편지를 읽은 후 더 나은 사역을 계속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박세환은 1930년 이전에 하와이섬 호놀룰루로 이주하여 왈터 정 사무실에 근무하다가 세탁업에 종사했다가 1940년에 한국을 방문한 후 은퇴한 것 같다. 동족상쟁의 6.25동란이 발발하기 5개월 전인 1950년 1월 22일에 박세환은 향년 71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부인 이순이와의 사이에 새라, 왈터, 리처드 등이 있었다.

amien.sohn@gmail.com

06.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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