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안창호(1885-1966)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죽사(竹史) 안창호(安昌鎬)는 1885년에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에서 태어나 1901년에 최병헌 권사의 딸 최배세와 결혼하여 레아, 신아, 철영을 두었다. 1903년에 배재학당을 나와 인천 내리교회 영화학교 교사를 역임했고, 1906년에 공주지방의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어학 선생으로 활동하던 중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천안지방 순회 목사로 파송 받았는데 1915년에 천안읍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윤치호 등과 구국운동 자금조달에 협력하면서 한글을 가르치고 영어를 배우게 하고 이스라엘 민족 역사를 통해 한국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1919년 3월에 천안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공주 형무소에 갇혀 6개월간 고초를 당했다. 출옥한 그는 일본 경찰을 피해 진남포와 사리원 등을 옮겨 가면서 목회를 하던 중 조선 감리교회가 그를 1927년 3월에 하와이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도미한 그해 안창호는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 받아 주일학교와 국어학교를 위해 직접 교재를 만들어 교포 2세의 기독교와 민족 교육에 힘섰다. 교회가 흥왕하여 이듬해 8월에 교인이 200달러를 헌금하고, 감리교 본부에서 800달러를 보조하여 목사실을 건축했다. 그해 12월 25일에 조미구락부 제3회 창립기념식이 일반 회원 등 3, 4백 명이 모인 가운데 와히아와 동회 사무실에서 있었다. 오 운의 주례하에 종일 예식을 했는데 부인들의 창가와 함께 안창호는 박동한과 더불어 연설했다. 그해 본 교회에 2명의 전도사가 있었고, 한 해동안 성인 2명이 세례를 받았고, 유야 10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아동 69명이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인 4명이 학습을 받았고, 교회학교에 35명이 등록하여 평균 30명이 출석했다. 1928년에도 안창호는 와히아와 교회로 파송되었다. 그해 아동 16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71명이 교육받아 세례를 받았으며, 그해 학습교인은 20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3명이었다. 교회학교는 전 해와 같이 35명이 등록하여 평균 30명이 출석하였다. 하와이 대조선 독립단은 여러 해 전에 7,500달러로 와이아와에서 기지를 구매하고, 그해에 와히아와에 국어학교를 개교하였는데 1929년 5월에 등록한 전체 학생수는 약 250명이었고, 지난 5월에 제2회 개교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29년 11월 13일부터 17일까지 호황 누아누 청년회 한인부 주최로 와히아와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하여 가와도 한인감리교회의 현 순이 적합한 설교를 하여 청년은 물론 온 교인이 큰 은혜를 받았다. 오하우섬 각 농촌에 거주하는 소학교와 중학교 학생 90여 명이 그해 12월에 와히아와 교회에서 모여 농촌 학생 연합회를 조직하고, 고문에 와히아와 교회 권사 강영각을 추대했다. 이날 지방회를 설치하고 지방 임원도 선정하였다. 그해 1년간 31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55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7명이 학습교인이 되었다.

와히아와에서는 교민단, 독립단 그리고 동지회에 속한 회원들이 함께 1930년 3월 1일에 삼일절 기념식을 개최했다. 특별히 오하우 각 농장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위의 정치 집단을 내세우지 않고 특별 기념기금을 거두어 영구한 독립기본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와히아와 지방에서는 최선주가 주선하여 매달 일 인당 1달러씩 거두기로 하였고, 이곳의 두 한국학교도 병합하기로 했는데 안창호에 의해서 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 7월에 와히아와 교회의 기둥이며 모든 사업에 큰 노력을 한 김기순이 환갑을 맞아 큰 잔치를 배설하여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창호의 사회로 축하식을 거행하였는데 김기순의 흐뭇한 기쁨이 홍안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해 9월에 오아후 농촌 조선 학생회가 세 지방에서 각각 지방회를 소집하고 지방 회장을 선정하였을 때 와히아와 지방회장은 최월별이 되었고, 와일루아 지방회장은 이모세였고, 와이바우 지방 인도자는 최봉희였다. 다음 달 10월 10일 저녁에 80여 명이 와히아와 기독교회에서 모여 헌법 개정, 회원 모집, 중앙 임원 선정, 일년 계획 등을 하였고, 그해 11월호 한미보 영문보는 주필 강영각의 지도하에 농촌학생회원이 편찬하였다. 그달 19일 저녁에 와히아와 교회에서 200여 명의 교인이 모인 가운데 최근에 호항 교회에 새로 부임한 변홍구 목사 환영회를 크게 개최하였다. 

1930년에 2명의 전도사와 함께 안창호는 와히아와 교회를 섬겼다. 한 해 동안 5명의 어린이가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 2명이 세례를 받았고, 7명이 학습을 받았으며, 어린이 57명이 세례를 받았다. 교회학교 교사 5명 아래 등록한 학생은 60명이었고, 평균 50명이 출석하였다. 이듬해 1931년 3월에 와히아와 감리교회와 와히아와 기독교회가 연합하여 와히아와 기독교회 예배당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공동회 회장 오 운의 사회로 강영각이 영어로 취지를 설명한 후 안창호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서 박동완의 연설, 최창덕의 기도, 두 교회 여학생 합창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는 와히아와 감리교회에서 농촌 학생회원 200여 명과 학부형이 모여 특별 순서를 진행하였다. 회장 최호성의 사회로 안창호는 민찬호, 최창덕과 함께 삼일 정신에 대하여 연설하였으며, 고문 강영각은 회원들에게 책임 있게 살기를 권면하였고, 음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하였으며, 이날 활동사진까지 촬영하였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예배당 건축 낙성식이 마침내 그해 8월 9일 오후 2시에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있었다. 폭이 60척, 길이가 40척이며, 한편에는 주일학교와 국어학교로 사용할 방이 두 간이며, 또 한 편에는 예배실이 있었다. 교인이 헌금한 총 1,100달러 중 교인 네 명이 100달러를 헌금했고, 총회가 3,000달러를 보조하였다. 신축 예배당을 보는 사람마다 하와이에 있는 한인 예배당 중에 제일 아름답다고 칭송하여 이를 듣는 교인은 매우 기뻐했다. 그해 전도사 2명과 본 교회를 섬기면서 한 해 동안 세례를 받은 어린이가 37명이었고, 성인은 39명이었고, 안창호는 하와이 연회 내지선교/교회확장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안창호는 김 구의 특무공작에 찬성하여 하와이 애국단이 1931년 11월에 1,000달러를 후원할 때 협력했다.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에 동경 한복판에서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세계에 과시했다. 1932년 4월에는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개최한 일본 천황 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에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중국 장제스는 윤봉길 의거에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감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게 되었다. 그해 5월에 상하이에서 건너온 현 순으로부터 윤봉길 의사의 홍커구 공원 의거를 들은 후 후원회를 조직하여 매년 12달러를 출연하기로 했다.

1933년 3월 1일에 와히아와 지방 동포 약 400명이 상동리 예배당에 모여 삼일절 행사가 있었다. 개회한 후 애국가를 부른 뒤 안창호가 기도했다. 이어서 주석 임성우의 취지 설명, 최창덕의 독립선언서 낭독, 배영 국어학교 생도의 창가, 오 운의 연설, 감리교 국어 생도의 창가, 강영각의 ‘만주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하의 영어 연설, 조미구락부원의 창가가 순서대로 있은 다음 안창호가 연설하였고, 최선주가 독립기념모집 소개가 있었다. 그달에 본 교회 에벳 청년회는 많은 진보가 있는 가운데 그달 12일에 하울나 해변에서 소창회를 배설하고 70여 남녀 청년이 모였다. 그달에 최승옥의 차남 길벗과 손진수의 장녀 탄실의 약혼식이 있었다. 다음 달 4월에는 맹정호 부부가 환국하고, 여러 달 전에 환국하였던 안경문에 이어 그의 부인과 딸 또라가 수달 전에 환국하여 섭섭하였는데 그해 5월에 안창호도 조선에 여행 가서 8월에 귀국했다. 그해 안창호는 전도사 1명과 동역하면서 어린이 10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나 성인에게는 세례를 주지 못했지만, 성인 5명이 새로 교회에 출석했다.

 

“김 구의 특무공작에 찬성하여 하와이 애국단이 후원할 때 협력”

 

1934년 4월에 호항 교회에서 이명한 황도인 부부가 연로한 몸을 이끌고 교인들을 심방하여 교회가 더욱 흥왕하게 되어 감사하였다. 이듬해 9월에 5년 전에 도미하여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박야곱이 아버지 박인규을 방문하여 기뻤고,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병섭 부인을 위해 환영회를 배설하고 환영하였다. 그해 안창호는 전도사 2명과 함께 교회를 섬기면서 어린이 14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어린이 세례자수가 65명이었고, 성인 교인이 87명이었으며, 성인 5명이 다른 교회로 이명하였다. 

 1936년 난징에서 환갑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김 구는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안창호에게 이순신의 시 한 구절을 써서 유묵을 보냈다: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네.” 그해 안창호는 전도사 2명과 함께 와히아와 교회를 섬겼고, 한 해동안 어린이 12명이 세례를 받았고, 학습교인은 85명이었으며, 학습 교육을 받고 있는 어린이가 85명이었고, 고등 엡윗 청년회원이 20명인 반면에 초, 중등 엡윗 청년회원은 15명이었다. 그리고 예배당과 예배당 대지는 700달라인 반면에 사택과 사택 대지는 두배가 되는 1,500달러였다.

1940년 5월에 아와이, 오아후, 와이아와에서 백범 김 구의 통일전선에 동참하기 위해 애국단을 설립하여 한국 독립당 하와이 지부로 기관명을 바꾸어 원동에서 특무공작을 경제적으로 부담했을 때 안창호도 협력했다. 그해 전도사 1명과 안창호가 섬긴 와히아와 교회의 등록 교인은 209명이었고, 타지에서 거주한 교인은 5명이었으며, 2명이 다른 교회로 이명했다. 이듬해 9월과 10월에는 교인 간에 희비가 엇갈렸다. 김병섭의 부인 마리아와 이모세가 입원 수술한 후 퇴원하여 가족은 물론 온 교회가 크게 기뻐했고, 변애수가 호항 퀸스 병원에서 정신 질병 치료 약을 개발한 후 18개월간 유학차 도미하였으며, 위옥순은 대학에서 체육을 공부하기 위하여 도미했다. 공립학교교사 위또라가 생선 뼈가 목에 걸려 병원을 찾는 등 고생했고, 이관실은 일하다가 우연히 팔다리가 불안하더니 혈증이 생겨 향년 78세로 별세했으며, 전천서도 오랜 노환으로 향년 81세로 소천했다. 위야곱은 득녀했으며, 장바이올릿과 변사무엘은 맹장으로 입원 수술하였다. 그해 9월에 부인보조회는 전도실 문이 낡아 새로 문을 달았고, 속장 한경선 주택에서 교회 탁사부 임원 등이 모여 희락관 건축을 계획하고 그 자리에서 1,000여 달러를 작정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헌금하여 1,550여 달러가 모였다. 그해 어린이 4명이 세례를 받았고, 세례받은 어린이가 113명이었으며, 등록한 세례 교인은 215명이었다. 교회학교 교사 6명이 평균 85명을 가르쳤는데 등록한 수는 그보다 많아 114명이었다. 

1942년 1월에 민간방위청 사기부 산하 10인 하와이 한인실행위원회가 조직될 때 안창호는 성공회 신부 조광원 등과 함께 회원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1944년에 와히아와 교회에는 세례교인이 235명이었고, 그해 세례받은 사람은 8명이었으며, 3명이 이명갔거나 사망하였으며, 주일학교 학생 51명 중 청소년이 43명이었다. 그해 10월에 부인 보조회가 태평양 전쟁에 출정한 군인을 위하여 예배당 안에 별기를 만들어 걸기로 하였는데 다음 달에 한경선의 장남 영교가 독일에 출전하여 입원 치료차 도미했으나 차도가 있어 안심했고, 이듬해 25일에 1년간 출전한 엄디모데, 김제임스, 이태옥, 양영호, 함은의, 이종군이 건강하게 돌아와 큰 기쁨이었다. 한국이 해방된 이듬해 2월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하와이 9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안창호가 서울을 방문하고 6개월간 체류하면서 민족 사랑을 이었다. 

1947년 3월에 안창호는 호놀룰루 교회 부목사로 파송 받았다가 1957년 2월에 은퇴했으나 1962년 6월에 연로한 가운데서도 임시 한어부 부목사가 되었다. 1966년 12월 30일에 호놀룰루에서 향년 81세로 소천하고 고향 남양주 선친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서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02년에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하와이 한인 이민 역사 연구가 안형주는 안창호의 손자가 된다.

damien.sohn@gmail.com

05.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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