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택 1865-1919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조윤택은 1865년경에 평양에서 아버지 조윤화와 어머니 양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세례명으로 마리아를 가진 것으로 보아 조윤택은 한국에서 감리교 신자였던 것 같다. 그는 결혼하여 1897년에 아들 재은을 낳아 평양에서 거주했다.

조윤택은 1903년에 8살 된 아들 재은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다. 홀아비로 적혀 있지만, 아내를 평양에 두고 아들만 데리고 하와이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어 이름은 Cho Youn Tack 또는 Cho Yun Tack 또는 Chow Youn Taik으로 쓰였다.

하와이로 온 지 4년이 되던 1907년에 조윤택이 지방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1908년에 하와이 카운티의 코나에 있던 코나 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그는 1909년까지 약 1년간 섬겼다. 

1910년에 미국 연방정부가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44세의 조윤택은 홀아비로 한국에서 태어난 15살 된 아들 재은과 함께 하와이군도 마우이 카운티의 라하이나 (Lahaina)에서 거주했다. 그해 그는 두 교회를 목회했다. 하나는 라하이나 감리교회였다. 이 교회는 그가 그해 개척한 교회였다. 스톤 한인 캠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인구조사에는 스톤 한인 캠프에는 기혼자와 미혼자 등 여러 한인이 있었다. 37세의 이기운과 34세 된 부인 이최세, 28세 미혼 김태하, 24세 미혼 박삼용, 28세 홀아비 강달주, 34세 홀아비 진종순, 29세  기혼자 이두일, 35세 기혼자 주진옥, 29세 총각 김인흥, 30세 총각 이규삼, 32세 총각 이진만, 28세 총각 조성일, 33세 기혼자 안석연, 35세 기혼자 김천운, 26세 총각 신봉순, 27세 총각 김천화, 25세 총각 이성순, 29세 기혼자 김인강, 32세 총각 임진국, 23세 총각 최금봉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라하이나 감리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그해에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에 기부금을 낸 라하이나 거주 한인이 있었다. 기부한 자들은 안석윤, 최호선, 최건복, 최경숙, 최용호, 전종문, 정치장, 정치헌, 전종순, 한태인, 임봉협, 강봉합, 김처운, 김춘화, 김정숙, 김광선, 김광영, 김경환, 김팽노, 김성기, 김성문, 김태은, 김태영, 김덕만, 김응칠, 김원식, 김영수, 고명근, 나금동, 오재원, 박춘경, 박해관, 박혈률, 박삼용, 박성근, 박동준, 심금남, 신봉순, 성순영, 서상홍, 손덕신, 송치겸, 송치삼, 송 견, 송석만, 양창규, 이치만, 이기원, 이기원 부인, 이경수, 이봉운, 이은구, 이영서, 윤순필이었다. 이들은 많게는 15달러를 기부했고, 적게는 50센트를 기부했다. 이들 대부분이 라하이나 감리교회에 출석한 자들로 보인다.   

하와이 한인 이민사 연구소장 이덕희는 2000년에도 조윤택이 설립한 라하이나 감리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898년에 일본인 모토조 아카자와 목사가 세운 일본인 교회를 모체로 하는 라하이나 감리교회가 오늘날에도 있는데 조윤택이 설립한 라하이나 감리교회가 이 일본 교회에 흡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윤택이 1910년에 사역한 다른 교회는 같은 카운티에 있는 가나팔이(Kanaapali) 한인 감리교회였다. 1911년 7월 26일자 신한민보가 하와이 가나팔이 지방회장 서상흥이 우연히 낙상하여 라하이나 병원에서 치료하는 중인데 그곳 동포들이 회의하여 손승운 씨를 서 씨의 간호원으로 택정하였다고 보도했다. 신한민보가 소개한 서상흥과 손승운이 가나팔이 감리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안중근 의사 기부금 명단에 가나팔이에 거주한 한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손바우, 손승운, 이춘경, 이중순, 이기현, 이명준, 이 남, 이두현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가나팔이 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1911년에 조윤택은 마우이섬의 하나 (Hana) 교회와 기파후루 (Kipahulu) 교회로 파송되어 이들 교회를 섬겼다. 그가 떠나던 1912년 3월에 하나 교회에는 21명의 학습 교인과 19명의 세례 교인이 있었고, 지난 한 해 동안 1명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고, 1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달에 주일학교에는 2명의 직원과 교사가 15명을 가르쳤고, 엡워스 청년회에는 15명이 등록하였다. 500달러에 해당하는 예배당과 250달러에 해당하는 사택이 있었는데 지난 한 해 동안 이들 건물을 수리하느라 40달러를 지출했다. 이런 교회 형편에서 조윤택이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해 6월 24일에 신한민보가 ‘특별한 성심’이라는 제하에서 박원백에 대한 아래의 기사를 내보냈다. “하와이 마위 하나에 거루하는 박원백 씨는 본래 열성이 과인하여 공익사업에 힘을 아끼지 않는 지사라. 박 씨는 연전부터 미주 상항 지방회에 입회하고 의무를 각근히 하며, 신한민보사를 세울 때에도 고본을 담당한 터인데 향자에 작금 2년 의무금과 회금과 신문 대금을 병하여 수 십 원을 한 끈에 보내었다 하니 박 씨의 특별한 열성은 과연 사람마다 본받을 일이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와이 동포의 경제 상태를 헤아리건대 폭양 염천 수수밭 속에서 한 달을 줄곧 땀을 흘려도 20원을 남기기가 어려운 터인데 이같이 과수한 금전을 보냄은 비록 자기의 마땅한 의무라 할지로되 특별한 열성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니, 우리 만 여명 회원이 모두 박 씨의 걸음에 떨어지지 않을 지경이면 오늘 그 무슨 일을 못 할까 근심할 것이오.” 박원백이 기파후루 교회 교인이었을 것 같다.

1912년 3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제7회 캘리포니아 연회 산하 하와이 선교부 연회가 개최되었다. 하와이에 약 6,000명의 한인이 거주했고, 가와이에 다섯 교회, 마우이에 세 교회, 오아후에 여섯 교회 그리고 하와이에 여덟 교회가 있어 한인 감리교회는 22개였으며, 가와이에 20개 전도소, 마우이에 15개 전도 소, 오아후에 12개 전도 소, 하와이에 26개 전도 소가 있어 모두 73개가 전도 소가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조한식과 이선일 그리고 일본인 T. 타카노와 N. 야마다와 함께 조윤택은 집사 목사가 되는 첫 해 과정을 마쳤다. 그달에 그는 R. 주르부첸과 E. 토키마사와 함께 공제 관계 해결위원회 회원으로 선정됐다. 

그달에 조윤택은 하와이섬에 있는 하갈나우 교회와 힐로 교회와 올나 교회로 파송받았다. 그가 파송받았을 때 하갈나우 교회에는 학습 교인 12명, 세례교인 8명이 있었고, 유아세례교인 1명이 있었으며, 주일 학교에는 4명의 직원과 교사가 23명의 학생을 지도했으며, 엡워스 청년회에 24명이 활동했고, 김이근이 권사로 동역했고, 200달러 가격의 예배당이 있었고, 지난 한 해 동안 5달러를 예배당과 사택에 지급했다. 

조윤택이 파송받았을 때 올나 교회에는 22명의 학습 교인과 35명의 세례 교인과 3명의 유아 세례교인이 있었고, 세 곳에 주일학교가 있어 5명의 직원과 교사가 53명을 지도했고, 엡워스 청년회에 15명이 있었으며, 이정(중)도가 권사로 활동했고, 250달러 가격의 예배당이 있었으며 지난 1년간 예배당과 사택에 37달러를 지불했다. 

조윤택이 올라 교회를 섬기기 3개월 전인 1911년 12월에 올나 구리반에 거주하는 이정수의 아들 요한이 있었다. 10세 어린이인 요한은 그곳 공립학교 학생으로 하루는 학교로 가는 길에 친구들과 동행하는데 그중에 포르투갈 아이가 지금 너의 나라가 없고 일본에 속하였으니 너도 일본인이라 하였다. 요한이 분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격한 말로 꾸짖어 나는 일본 아이가 아니오 당당한 대한의 아이라. 나의 마음에 있는 대한을 네가 어찌 모르느냐 하고 큰 소리로 말했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 도착하는 대로 즉시 교장에게 호소하였다. 교장이 올나 지방 재판장과 경찰을 학교로 불러들인 후 학생을 모아 일장 연설한 다음에 채찍을 요한에게 주며 이다음에는 어떤 아이든지 그같이 무례한 행동이 있거든 이 채찍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항복이 나오도록 하라 하였다. 기자는 어린이 요한이 나라를 위하여 천하에 불법한 자를 호령함이 어찌 그리 기쁘며 장한가라며 감탄하면서 저 수염이 창날 같고 몸이 7척이나 되어도 국가의 관념이 없으면 어찌 다박머리 요한에게 부끄럽지 않으리오 하며 개탄했다. 이어서 기자는  채찍을 주는 교장은 과연 어진 스승이라 할지니 그 선생이 있어야 그 재가가 있다 할지로다 하였다. 이정수와 아들 요한이 올나 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1913년 10월에 신한민보사에 기부금을 낸 하와이 올나에 거주하던 자는 최운기, 이기홍, 이완근, 노태현, 김병순, 방흥돈이었는데 이들도 올나 교회 교인으로 보인다. 그해 12월에 올나 지방회도 기부금을 내었으니 이곳에 지방회가 있었던 것 같다.

힐로 감리교회에서는 백낙현이 권사로 파송받아 조윤택은 그와 함께 동역했다. 조윤택이 부임하기 1달 전인 1912년 2월에 이곳에 거주하던 류석기가 스페인 여자와 결혼하였다는 보도가 상항에서 발간되던 대도가 보도하였는데 조윤택이 그해 3월에 부임하면서 심방하였을 것이다. 

1913년 2월과 3월에 걸쳐 일주일간 하와이 선교부 연회가 개최되었다. 조윤택은 K. 안자이, S. 토다, 조한식, 임C.H., 이선일과 함께 집사 목사 2년 과정에 등록했다. 이 연회는 조윤택을 하와이섬에 있는 힐로 (Hilo) 교회와 올나 (Olaa) 교회와 부나 (Puna) 교회로 파송했다. 힐로 교회와 올나 교회는 작년에 이어 계속 사역하게 되었으나 작년에 사역한 하갈나우 교회 대신에 그해는 부나 교회를 맡았다. 그런데 힐로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을 위하여 J.W. 와르너 목사가 선교 목사로 파송되었다. 그해 힐로에는 12개의 전도소가 있었으므로 조윤택의 발걸음은 쉴틈이 없었다.

1914년에는 하와이섬에 있는 힐로 (Hilo), 푸나 (Puna), 하갈나우 (Hakalau)에 있던 한인교회로 조윤택이 파송받았다. 이듬해 조윤택이 리온 L. 루프부로 감독에게서 장로 목사가 되면서 오아후 섬에 있는 가하루우 (Kahaluu) 교회로 파송되었다. 1년 후 조윤택은 오아후(Oahu) 섬의 와일누아 (Waialua) 교회로 전임했다. 1917년에 조윤택은 오아후 섬의 바람이 부나 아름다운 와일누아 (Waialua) 교회로 파송받았다. 이곳에는 작은 한인 캠프가 있었다. 그는 이 교회에서 1919년까지 약 3년간 사역하였다. 1919년에는 오아후섬에 있던 가후구 교회도 맡아 사역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아 1918년 10월 이후 1년 이상 의사를 찾았던 조윤택은 1919년 12월 13일에 와일누아에서 향년 55세로 소천했다. 12년간의 목회 기간 중 짧게 웃음을 보이며 꺾이지 않는 동양적 예의를 가졌던 그는 주위의 많은 한인에게 고결한 기억을 남겼다. 아들 조재연은 아버지를 화장하여 한국으로 보내기를 원했는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damien.sohn@gmail.com

05.0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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