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1931년 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 한국선교회 조직 조국복음화 도와
1913년 대한부인회 조직 등 한인사회 돕기 활발 하와이역사에 남아
문또라는 1876년 8월 8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1894년부터 감리교회에 다니다가 1896년에 평양 남산재감리교회에서 윌리엄 A. 노블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때 또라(Dora)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때 김또라였다. 정 씨와 결혼하여 딸 윌라를 낳았다. 윌라는 딸의 세례명이었다. 딸 윌라를 낳았고, 제물포에서 거주하면서 문또라는 남편을 여위었던 것 같다.
문또라는 1903년에 8살 된 딸 정윌라를 데리고 하와이 이민단에 합류하여 닙본 마루에 올랐다. 하와이로 가는 여정에서 멀미로 고생하는 한인들에게 그녀는 전도했다. 그해 9월 28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해 한 해만 16차 선편에 1,133명의 한인노동자가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듬해 1월에 하와이로 온 문홍석을 만나 재혼했고 3남2녀를 낳았다.
30세로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마우이섬에 온 최용운이 읊은 시를 서광운이 ‘미주한인70년사’에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강남에 노든 속에/춘풍우선 만리하니/이친척 기분묘의 슬픔을 뉘 알리오/새 울어 눈물 보지 못하고/꽃 웃어도 소리듣지 못하니/좋은 것 뉘가 알고/슬픔인들 뉘가 알랴.” 이 감상은 문또라에게도 같았을 것이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지 2달이 채 되지 못한 1903년 11월 3일에 호놀룰루에 있던 한인들이 통역으로 온 안정수 권사와 우별길을 대표로 뽑고 그곳 미국 북감리교회 감리사 조지 L. 피어슨 목사와 교섭하여 한인감리교 선교회를 조직하고 리버 호텔 스트리트에 집을 얻어 그달 10일에 인천 내리교회 조지 존즈 선교사가 파송한 홍승하 전도사의 인도로 첫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 문또라도 함께 하였다.
한인감리교 선교회는 1904년 3월에 엠마 길과 스쿨 길이 만나는 모퉁이에 큰 집을 월세로 얻어 이전하였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활동했던 존 W. 워드만 감리사가 부임한 이듬해인 1905년 4월에 한인감리교 선교회가 한인감리교회로 승격할 때 문또라도 그 교회에 있었다. 1년 만에 병을 얻어 홍승하가 부득이 귀국하게 되자 그해 7월에 제2대 목사로 부임한 민찬호가 6년간 교회 목회와 문화 활동과 사회활동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는데 문또라는 민찬호의 작은 버팀목이 되었다. 민찬호가 1911년 3월에 남가주 대학 신학부로 유학의 길을 떠나자 그달에 홍치범 목사가 제3대 목사로 취임하여 이듬해부터 3년간 약 7000달러의 건축비로 예배당 신축을 하였을 때 문또라는 교회를 세워나갔다. 1916년 1월에 제일한인감리교회로 교회 명칭을 변경한 가운데 그해 2월에 4대 목사로 송헌주 목사가 부임하여 2년간 사역할 때도 그녀는 그 교회에 있었다. 1918년 3월에 제5대 방화중 목사가 취임한 지 4개월에 한인기독교회가 분열되어 나갔을 때 문또라는 제일한인감리교회를 지켰다. 1920년 4월에 황사용 목사가 제일한인감리교회 제6대 담임자로 부임하여 1922년 1월에 새 교회 헌당예배를 드릴 때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헌당예배를 드린 이듬해인 1923년 10월에 40여 명 남녀노소가 모여 제일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 모여 엡엣청년회를 개최했다. 이날 임원을 선정했는데 문또라는 교제국에 선임되었고, 딸 정월라는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 외 임원에는 전도국에 이윤호, 학문국에 정봉만, 인제국에 조제언, 회계국에 홍영태, 통신국에 강영각이었다. 이듬해 10월에 엡엣청년회는 회원 연령을 연장하여 남녀교인 중 15세에서 35세까지로 하였고, 고문부를 따로 두어 청년회 발전에 계책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최두욱, 황혜수와 함께 문또라도 선임되었다. 이해 딸 정월라는 재무로 선출되었다.
문또라는 황사용 목사 후임으로 1923년에 부임한 제7대 현 순 목사를 도왔으며, 현 순 목사가 가와이섬으로 파송되면서 1926년에 후임으로 온 제8대 홍한식 목사의 목회에 힘이 되었고, 홍한식 목사가 와이파후교회로 파송되면서 1930년 10월에 드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변홍규 목사가 제9대 담임자로 부임하였다. 그해 11월 6일자 신한민보는 ‘새 목사 온 후에 열성’이라는 제하의 글을 보도했는데 문또라의 열성도 이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신한민보가 보도한 대로 그해 12월에는 호항에 비바람이 크게 불었지만 교회를 섬기던 문또라의 열성을 꺽지 못했을 것이다.
변홍규 목사가 부임한 이듬해인 1931년 새해부터 호놀룰루에는 동지회와 교민단 간에 감정이 극도에 달한 가운데 고소하여 재판까지 가는 소동 가운데 문또라가 안정송과 함께 그해 하와이 연회에서 전도사(Local Preacher)로 임명받았다. 그래서 변홍규 목사와 함께 문또라는 교인들을 심방하면서 하나 된 동포사랑을 꾀했을 것이다. 그해 9월에 1918년 12월에 분열하여 나간 한인기독교회와 연합 소창회를 개최하여 12년 만에 하나가 된 데에는 문또라의 노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신한민보는 1931년 9월 17일에 ‘하와이–양 교회 처음으로 연합 소창회’라는 제하의 글을 기꺼이 보도했다.
문또라는 1932년에 한국선교회를 조직하였다. 등록한 회원들이 낸 월정헌금을 모아 한국에 있는 가난한 교회 목회자와 그들의 가족을 돕는데 앞장섰다.
변홍규 목사가 1933년 만주선교를 위해 떠나자 임두화 목사가 1933년 7월에 제10대 제일한인감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9월에 본 교회에서 계삭회가 개최되었을 때 문또라는 박종수, 김이제, 송치순, 안정송, 송아더와 함께 전도사로 재임명되어 임두회 목사의 목회에 큰 힘이 되었다.
1937년 12월 계삭회에서 문또라는 안원규, 김보배, 박에스더, 권도인, 황사근, 이정두, 김신일, 이금우, 박헬렌과 함께 제일한인감리교회 유사로 임명받아 교회 살림을 도왔다. 1945년 4월에 임두화 목사가 한국으로 파송되고 그해 7월에 정의조 목사가 제11대 담임 목회자로 부임하면서 교회의 일선에서 물러났을 것 같다.
문또라는 교회 사역 외에도 한인사회를 위하여 일했다.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오면서 황마리아와 함께 1913년 4월에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하와이 한인부인회 조직의 처음이었다. 자녀의 국어교육을 장려하고, 가정 일용 사물의 일제물품을 배척하며, 교회와 사회단체를 후원하며, 재난동포구제에 노력하였다. 이듬해 가와이와 골로아에 지회를 설립하여 대한인부인회를 확장하면서 그해 5월에 한국에서 선교하던 노블 선교사를 통해 서간도에서 재난을 당한 동포를 위하여 구제금 300달러를 보냈고, 그로부터 6년간 국내외 재난 동포 구제사업에 노력하였다. 1918년 6월에 호놀룰루 릴리하에 위치한 구세군 예배당에서 통상회로 모여 한동안 하지 못했던 회무를 처리하고 250달러를 한국 내지의 토지를 구매하여 내지 전도비의 기본을 삼기로 했다. 문또라는 본회 회계를 역임한 바 있었다.
1919년 3월에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한인부인회를 해소하고 그해 4월에 대한인부인구제회를 조직하여 각 섬의 부인회를 합동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독립운동가의 가족과 자녀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
호놀룰루에 있는 모모 인사들이 동포의 사업과 생산력이 박약함을 개탄하고 1924년 11월에 공제사를 조직하고 근검저축, 식산흥업, 기술장려, 직 소개, 환란상구 등을 목적했다. 회장에 문또라가 선임되었고, 그 외 임원으로는 총무에 정봉관, 재무에 김찬제가 있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거주하던 유지인사들이 1928년 3월에 민족통일을 촉성할 목적으로 대한민족통일촉성회를 조직하였다. 호항의 이승만과 김태석, 학갈라우의 박성환, 마리후의 이만정, 하나의 주룡한, 과이야의 홍치범 등이 축하문을 보낸 가운데 임원을 선출했다. 회장에 조용하, 서기에 최창덕이었고, 위원에 문또라 외에 김영기, 김윤배, 김유실, 김유택, 이상호, 이복기, 이원준, 이태성, 이성신, 류계상, 민찬호, 박상하, 박인양, 신국겸, 손덕인, 안현경, 안원규, 양유찬, 정인수, 정운서, 조광원, 조병요, 황혜수, 홍한식, 김경준, 정원명이 있었다.
1930년 10월에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국제적인 범태평양 여자대회에 한국인으로 이원순이 관여했는데 문또라도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일한인감리교회 대동국어학교가 1938년 5월에 방학하면서 교직원과 함께 등록한 학생 52명이 착석한 가운데 방학식을 거행했다. 일동이 조선국가를 부르고 209장 찬송가를 부른 후 문또라가 기도했다. 이후 순서는 성경낭독, 피아노 독주, 대강놀이, 노래, 언문의 제정, 대산놀이, 합창, 독서(국어낭독), 격언암송, 공자역사, 우스운 이야기, 상품수여식, 진급생 광고, 졸업증서 수여, 기부인 광고, 219장 찬송, 축복기도로 이어져 다과회를 한 후 폐회했다. 이날 이영생, 서정호, 차재균이 졸업했다.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세계 제2차 대전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그달에 나성에서는 ‘한인국방경위대’가 조직되고, 이듬해 1월에 민간방위청의 의도로 하와이 ‘한인위원회’가 조직되는 가운데 문또라는 교회 부인회를 동원하여 목요일마다 군복수리 등 잡업을 담당하며 미국적십자사의 일을 도왔다.
1945년 7월 18일자 ‘국민보’에 의하면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창립 제2회 기념식이 1945년 7월에 호놀룰루에서 있었다. 위원장 김리재의 개회사에 이어 총무 현 순이 ‘기연과 진흥’이라는 연설을 한 후 임원을 선정했다. 위원장에 현 순, 총무에 홍치범, 조직부장에 박상하, 선전부장에 민찬호, 재무부장에 손창희, 정신부장에 신을노, 기록서기에 전형균, 재무 신세라, 감찰원에 천진화, 김리재 그리고 김영선이었고, 문또라는 사교부장이었다.
일본이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래 거의 4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미국이 승전하였다. 그날 승전 예배를 드리며 문또라는 온 교인들과 함께 하나님께 크게 감사드렸다.
임시정부 위원회의 재조직에 대한 긴급 전보를 받고 자세히 살핀 후에 고충을 잘 인식하면서 민찬호, 현 순, 김창순, 김의병, 양흥화, 이홍화, 오창빈, 김영순, 신참오, 신사라와 함께 문또라도 이름을 올려 제의서를 임시정부 주석 김 구와 부주석 김규식 및 국무위원회 앞으로 제의를 보냈다.
문또라는 1971년 2월 6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향년 9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인근 누아누 기념공원에 안장됐다. 2017년 3월 ‘하와이 매거진’은 하와이 역사에서 가정 영향력 있었던 부인 명단에 문또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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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