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하와이섬 여러 교회에서 평신도 전도사로 순회선교 사역
감리교 목사로 목회와 학교장으로 섬기다 신병으로 별세
이선일은 1867년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동곡리에서 연안 이씨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0년 미국 연방정부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는 1875년에 박순덕(Pak Sun Dok)과 결혼한 후 평양 상수구 밖에서 거주했다. 그의 호적표에 의하면 그의 직업이 유(儒)로 되어 있어 유학자였거나 서당 선생으로 보인다고 한다.
호놀룰루
이선일은 1905년 4월 27일에 일본 고베에서 퍼시픽 메일 선박회사 소속 시베리아 선박으로 그해 5월 8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당시 그는 40세였다. 공자가 40세에 이르러 세상일에 미혹되지 아니하였다는데 이선일도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였다. 그는 38세 된 아내, 11살의 이승필 그리고 3살 된 이승신 등 아들 3명과 함께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에 왔다. 19살 된 아들은 성인이었으므로 별개 여권을 받았고, 출가한 두 딸은 동행하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1906년 1월부터 시작되는 출납부에 채소, 두부 등을 판매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었고, 또 채소나 과자를 누가, 얼마나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어 이선일이 어느 농장 매점에서 사무원으로 취직하였거나 직접 상점을 운영하였을 것으로 보는 하와이 한인 이민사 연구가 이덕희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해에 인천 내리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며 하와이 노동이민을 추천한 조지 H. 존스(조원시) 선교사가 펀취볼 스트리트 선상에 있던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고 방문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는 민찬호, 현 순, 김이제, 홍치범 등의 목회자가 있었고, 이선일은 중간 줄 맨 오른쪽에 있었고, 막내아들 이승신은 모자를 쓰고 앞줄에 앉았다. 이승신은 보스턴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2년간 개업하다가 심장마비로 요절하여 이선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지방 전도사
이선일은 1907년에 평신도 지역 전도사로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의 하와이 선교부에 등록했다. 그해 하와이 선교부는 그를 그가 개척한 하와이섬 호녹가이지교회로 파송하였고, 이로써 그의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1월 보고에 따르면 호녹가이지교회에는 학습교인이 3명이었고, 세례교인이 6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는 직원과 교사가 2명이었고 학생은 15명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이민생활가운데서도 4달러를 연회에 상납했는데 해외선교비로 2달러, 교육비로 2달러, 부인 내지선교비로 1달러, 연회비로 1달러였다. 그가 목회했던 호녹가이지교회는 오늘날 호노가연합감리교회로 변신하여 2021년에 114주년을 맞았다.
이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연습회’를 조직하고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힘썼는데 특별히 교육에 열심히 있어 의무교육을 하기로 하고, 매달 5달러를 학교로 기부하였다. 이들 기부자는 이석현, 박성환, 차재환, 박성군, 이춘근, 유기준, 김기순, 강만근, 서치운, 최진조, 한성용, 김보겸, 이창하, 권성재, 김광현, 김창상 등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이선일은 1908년 1월에는 하와이섬의 코하라교회로 파송받았다. 파송 받은 때의 코하라교회에 학습교인 40명과 세례교인 27명이 있었고,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는데 각각 교사가 한 명씩 있었고 학생수는 30명이었다. 1년간 섬긴 후인 1909년 3월에는 학습교인이 34명으로 줄었고, 세례교인도 13명으로 줄었으나 지난 1년간 8명이 세례를 받았고, 주일학교는 세 곳에 있었는데 직원과 교사는 총 5명이었고, 학생은 총 30명이었다. 그리고 예배당이 두 곳에 있었고 이들 싯가는 300달러였으며, 한 해 동안에 예배당과 사택을 위한 건물 관리비로 150달러를 사용했다. 그리고 16달러를 연회에 상납했는데 해외선교비로 1달러, 내지 선교비로 5달러, 주일학교를 위한 선교비로 3달러, 일반 교육비로 1달러, 주일학교비로 3달러, 자유인 보조비로 1달러, 미국 성서공회비로 1달러, 부인 내지선교비로 1달러였다.
1909년에는 이선일이 지난해에 섬겼던 하와이섬의 코하라교회 외에도 유니온밀교회와 율리교회도 맡았으므로 흩어진 교회를 순회전도하였다. 1년 동안 섬긴 때인 1910년 3월에 코하라 교회는 학습 교인 34명과 세례 교인 16명이 있었고, 지난 한 해 동안 5명이 세례를 받았고, 한 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주일학교는 두 곳에 있었는데 직원과 교사가 5명에 총 25명이 등록했고, 엡워스 연맹에 15명이 가입하였다. 어려운 교회재정 사정에서도 해외선교비로 25달러와 부인 내지 선교비로 1달러를 연회에 상납하여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해 3월 하와이 선교부 보고에 따르면 이선일은 100점 만점에 89점을 맞아 평신도 전도사직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선일은 1910년 3월에 오아후 섬의 에와 교회와 와일내(Waianae)교회로 파송 받았다. 그가 부임하던 때 에와교회에 24명의 학습교인과 16명의 세례교인이 있었고, 주일학교에는 직원과 교사가 3명이었고, 학생은 53명이었다. 그해 에와 교회에는 김화I이 권사로 재직했다. 예배당은 당시 시가로 1,000달러였다. 또한 그는 에와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선일은 존 M. 마틴 목사와 김유순 목사와 함께 하와이 선교부 절제위원회에 소속되었는데 위원회에 속하기는 처음이었다. 그해 절제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주류 판매 반대연맹’은 점점 성공적이었고, 그 영향은 좋았으며, 연맹회장 존 G. 울리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 곧 주류 판매 승인 여부에 대한 투표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본 위원회는 투표를 의와 불의의 세력 간의 싸움으로 간주하고 주류 판매 금지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점이 폐쇄되고 음주가 영원히 멈춰지길 소망하면서 주류 판매 금지법이 선교사역을 가장 크게 도울 것으로 보았다.
이해 안중근 의사 재판비용을 위하여 에와 지역의 한인들이 기부하였는데 기부자 명단 중에 에와 교회 교인이 다수일 것으로 본다. 기부자는 안장록, 최천규, 최희권, 장흥삼, 조봉원, 조봉걸, 전창운, 전성오, 정극선, 정원명, 한태경, 황성모, 임춘경, 김창오, 김학봉, 김학수, 김화일, 김기두, 김경낙, 김난수, 김봉룡, 김상운, 김석현, 김덕윤, 민찬옥, 오상원, 배윤오, 박치룡, 박화실, 박덕순, 신치봉, 신삼복, 서태호, 도기영, 이창환, 이준익, 이경수, 이복근, 이사선, 이시화, 이성운, 이태제, 이대흥, 이용화, 엄준필, 윤태영이었다.
이선일은 1911년 3월에도 에와교회와 와일내교회를 섬겼다. 그해에도 에와교회에 김화I이 권사로 활동했다. 이듬해 3월 보고에 따르면 학습교인이 29명으로 늘었고, 세례교인도 23명으로 늘었으며, 지난 한 해 동안에 5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2명이 세례를 받았다. 한글학교에 교사와 직원이 3명이었고 아기를 포함하여 학생은 19명이었다. 엡워스 연맹에 16명이 등록했다. 예배당은 1,500달러로 평가되었고, 본 교회는 내지선교비로 20달러, 일반교육비로 2달러, 주일학교비로 2달러, 자유인보조비로 1달러를 선교부에 보내 25달러를 상납했다. 그해 그는 에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선일은 1912년 3월에 목사 후보자 과정에 등록했다. 이해에 그는 가와이 섬의 막가웰리교회와 긱가하교회로 파송 받았다. 막가웰리교회에서는 남새윤 권사와 함께 동역했다. 그리고 그해 그는 엘리엘리교회와 골로아교회에 파송한 전도사를 지도했다. 엘리엘리교회에는 설윤호 권사가 있었고, 골로아교회에는 정인수 권사와 오응택 권사가 있었다.
1913년에는 이선일이 위의 두 교회와 함께 엘리엘리교회와 골로아교회를 섬겼다. 이선일이 1914년에는 위의 네 교회뿐만 아니라 골로아 학교도 맡았다.
교회 목사
이선일은 1915년에 감리교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은 그해 그는 가와이 섬에 있던 막가웰리교회와 긱가하교회를 섬겼으며 골로아 학교를 맡았다.
이선일은 1916년 2월에 작년에 맡았던 가와이 섬의 막가웰리교회와 골로아 한인학교를 맡았고, 작년의 긱가하교회 대신에 골로아교회로 파송 받았다. 그런데 그해에는 남새Y 전도사가 막가웰리교회 지방 전도사로 임명이 되었고, 고석C가 콜로아교회 지방 전도사로 수고했으며, 골로아교회에 김종군이 권사로 활동했다. 그가 파송 받던 해에 두 교회를 합쳐 2명의 학습교인과 14명의 유아세례교인과 23명의 세례교인이 있었고, 교회에 출석하던 자가 73명이었으며, 각각 주일학교가 있었고 총 9명의 교사가 학생 75명을 가르쳤다. 엡워스 연맹에 가입한 자가 18명이었다. 이해에 두 교회가 연회에 낸 상납금은 44달러였다. 그리고 조지 패티와 Y. 미우라와 함께 이선일이 하와이 선교부의 절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해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지배인과 사탕수수밭의 외국 노동자와 한인 노동자가 기부한 550달러로 막가웰리에 한인들을 위한 학교 건물을 건축했다.
1917년 3월에 임준호와 조연택과 함께 이선일이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와 같이 두 교회를 섬겼다. 1년간 섬긴 막가웰리교회에는 유아세례 교인 4명과 학습교인 5명이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3명이었는데 학생 수는 보고가 되지 않았다. 예배당 부지와 건물은 500달러에 해당했고, 1년간 건물에 든 비용은 3달러였다. 연회에 26달러를 상납했으며, 이중 훈련비가 24달러였고, 기타가 12달러였다. 김진호가 막가웰리교회에서 권사로 활동했다. 골로하교회는 세례교인 7명과 유아세례교인 11명이 있었고, 한 해 동안 학습을 받은 자가 4명이었고, 학습 공부하는 자가 22명이었으며, 이해 등록교인은 50여 명이었다. 예배당 시가는 1,000달러였고, 그해 건물관리비로 50달러를 소요했으며, 훈련비로 연회에 상납한 금액은 20달러였다. 그리고 하와이 선교부의 절제위원회에서 조지 패티와 Y. 미우라와 함께 이선일이 활동했다.
이선일은 1918년에 자진하여 교회사역을 하지 않더니, 이듬해 1919년에는 신병으로 교회 사역에서 물러났고, 3년 후인 1922년에 은퇴했다. 1928년 2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부 제23회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그는 그해 7월 7일 새벽 5시에 호놀룰루에서 향년 63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튿날 오후 2시에 호놀룰루 한인제일감리교회에서 홍한식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이 있었다. 윌리엄 H. 프라이 감독은 한인들은 그를 아주 존경했고, 최고의 학자로 인정했다며 한인 교인들에게 그는 품위 있는 복음 사역자였고, 친절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동정적이었으며 항상 신실했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면서 농장관리와 그를 아는 백인들도 한결같이 그를 가우이 섬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에게 조용하고 선한 영향력을 펼친 목회자로 평가하였고 그에게 감사했다고 적었다.
1928년 8월 9일자 신한민보는 ‘이선일씨 목사 장서’라는 제하에서 “미감리교 목사로 10여 년 시무하던 이선일 목사는 노병으로 인하여 여러 달 신음하다가 마침내 7월 7일에 세상을 이별한 바 동 교회 예배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한 지 3일 후에 추도회를 하였다더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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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