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최창덕(1892/3-1977)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1923년 와일루아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한글학교서도 가르쳐

한인기독교회 한인선교부 총부장, 와히아와한인기독교회 주일학교 교장

한중동맹단 조직시 서기로 피선 독립운동 참여,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

 

최창덕은 서울 당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1892년 9월 25일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1893년 11월 14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영어이름은 Chang Duk Choy로 썼다. 그런데 ‘신한민보’ 1921년 10월 6일자에 하와이에 거주하던 최재덕이 최창덕으로 이름을 고친다는 광고를 내면서 ‘창덕으로 행세하오니 지구간 조량해 달라고 한 이 사람이 동명이인인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는 1915년에 시민권을 취득했다.

 

와일루아 한인기독교회

 

최창덕은 1923년에 오아후 섬에 있는 와일루아한인기독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해 한글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을 역임했고 교사 1명이 2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그해 7월에 하와이 감리교회 한인부에서 어학교과서 편찬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위원장에 김이제, 서기에 이원순, 재무에 로진국이었고 위원에 최창덕 외에도 이태성, 염달욱, 현 순이 있었다.

오아후 섬의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였던 박동완 목사의 초청으로 1924년에 최창덕 목사는 와히아와교회가 운영하던 한글학교에서 시간제로 가르쳤다. 그해 11월 23일 오전 11시 반에 와일루아교회에서 김상연의 장남 요한과 박성문의 차녀 세디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날 최창덕이 주례했다. 예식을 마친 후에 참례한 100여 명은 김상연의 자택에서 배설한 잔치음식을 나누며 즐겼다. 그달 27일 저녁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연례와 같이 일반 교우는 자기 정성대로 감사하는 물건을 드렸는데 음식이 그중에 제일 많고 돈으로도 바쳤고 닭으로도 바쳐 형형색색 보기도 좋았거니와 예배를 드린 후에 상 위에 진열하였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일용할 양식을 이처럼 후히 주신 은혜를 더욱 감사하며 기념하였다.  

최창덕이 민찬호와 더불어 1925년에 한인기독교회 한인선교부 총부장으로 활동했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평신도 연회가 1926년 1월 초에 회장 최창덕의 사회 하에 호놀룰루교회에 있었다. 이날 호항교회 민찬호, 힐로교회 이명우, 학갈나우교회 안시흡, 마위교회 장 붕이 모였다. 그해 하와이 한인교민단 총단장 선거에서 최창덕과 김영우가 후보로 나왔는데 김영우는 도미했으므로 자연히 최창덕이 피선되었다. 

그해 최창덕이 한인기독교회 한인선교부 연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김성기, 안영찬, 이명우, 김영기, 최홍위, 전경준, 민찬호와 더불어 한인선교부 이사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해에 민찬호는 한인선교부 총부장이었다. 그해 1월 4일부터 10일까지 연회가 열리는 동안 매일 아침 기도회가 있었고 성만찬도 있었으며, 그달 10일에는 감옥과 병원에 있는 한인을 찾아 위로했다. 한인선교부는 각 교회 남자교인이 3달러, 여자교인이 2달러의 연회비로 운영되었고 ‘한인기독교보’는 별도 후원으로 운영되었다. 

최창덕은 그해에 하와이 대한인 교민단 총단장에 선임되었고, 1928년에 재선되었다. 그해 2월에 조소앙 등 하와이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대한민족통일촉성회’를 조직했다. 회장은 조소앙의 형인 조용하가, 서기는 한인교민단 총단장이었던 최창덕이 맡았다. 그해 9월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주최로 국치기념회가 누아누 청년체육실에서 각 단체 대표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있었다. 흥미 있는 순서는 없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애국연설이 많았다. 이날 최창덕의 사회 하에 신지수가 기도하고 안원규가 개회사를 말한 후 조용하가 나라 만국역사를 진술하였으며 안정송 부인이 ‘망국한’이란 주제로 연설한 후 이상초가 ‘조선민족의 장래’라는 문제로 장황하게 웅변했다. 활동은 미약했지만 ‘대한민족통일촉성회’는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운동 전개에 하나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1929년 1월에 하와이한인기독교평신도 제11차 연환회가 본 교당에서 있었다. 회장 최창덕과 서기 신중현의 사회 하에 여덟 명의 지방 목사가 모여 교회에 관한 긴요한 사건을 원만히 처리했다.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1930년에 최창덕은 와히아와에서 거주하면서 양복 수선업에 종사했다. 그해 6월에 농촌학생대회가 열렸다. 1년 전에 강영각의 주선으로 조직된 농촌학생회는 그동안 각 방면으로 진보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연중대회를 와히아와 지방에서 소집했다. 90명 회원이 각 농장에서 모여 오후 4시에 개회하고 6시까지 연회로 모였고, 6시부터 졸업식 만찬회로 모였으며, 8시에 유희가 있었다. 일반 학생들에게 장쾌한 가상을 준비하여 당지 동포들은 50원을 거두어 대회 경비에 사용했다. 이 모임에서 최창덕을 비롯하여 황혜수, 강영복, 박동완, 안창호, 이동빈이 권면하는 말씀을 전달했고, 농촌학생회 음악대도 참석하여 청아한 음악으로 큰 흥미를 끼쳤다.

그해 11월에 와히아와에 있던 한인감리교회와 한인기독교회가 연합으로 추수감사절 행사를 준비하고 밤에 모여 아름답게 예배를 드렸다. 그해 12월에 호항기독교회는 위태한 지경에 있었으나 박동완 목사가 주장하는 와이아와기독교회는 전보다 더 확장된 모양이었다. 최창덕이 민찬호와 홍치범와 함께 교회 일에 협력하기 때문이었다.

1931년 최창덕은 김성기, 안시흡, 이종관, 민한옥, 민찬호, 조석진, 백낙현, 이승만, 김성기, 최성대 등과 함께 한인선교부 9인 이사원이었다. 9인 이사원은 1/3이 목사이고 2/3은 평신도로 구성했다. 그해 삼일절 기념식은 와히아와 지방에 있던 두 한인교회가 연합하여 한인기독교회 예배당에서 있었다. 공동회 회장이었던 오 운이 개회를 선언한 후 강영각이 영어로 취지 설명을 하였고, 안창호 목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박동완 목사와 안창호 목사가 연설한 후 최창덕이 기도했다. 이날 창가는 두 교회 여학생들이 연합으로 했다. 그날 저녁에 농촌학생회에서도 삼일절 기념식을 미국감리교회에서 200명의 학생과 학부모가 모인 가운데 개최했다. 회장 최호성의 사회로 개회된 이날 기념식에서 최창덕은 민찬호와 안창호와 함께 ‘삼일정신’에 대한 문제로 연설했다. 고문 강영각은 일반 회원들에게 책임 있는 권면을 하였으며, 음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하였다. 이날 있었던 삼일절 기념식은 활동사진으로 촬영하였다. 최창덕은 민찬호와 홍치범와 함께 와히아와기독교회의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좌·우측 임원들과 수차 교섭하였으나 그해 11월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1932년 6월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치안유지 방해죄로 피납되는 사건이 한국에서 발생했다. 이에 로스앤젤레스와 기타 각처 동포가 기부하였는데 최창덕은 10달러를 기부했다. 

이듬해 3월 1일 저녁 7시 30분에 와히아와 지방 동포 약 400명이 상동리 예배당에서 모여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다. 개회한 후 애국가를 합창하였으며 안창호가 기도하였고 사회자 임성우가 취지를 설명한 후에 최창덕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 후 국어학교 학생 배 영이 창가를 하였고 오 운이 연설하였으며 감리교회 국어학교 학생이 창가를 하였고 강영각이 영어로 ‘만주 문제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연설하였으며, 구락부원이었던 조 미가 창가를 하였고, 안창호가 연설하였으며, 최선주가 독립 기념금 모집을 소개했다.

신한민보는 1933년 4월 6일에 하와이군도 각처에 산재한 미주 대학출신 33명의 성명과 학위와 직업을 소개했다. 최창덕은 신학을 공부하고 자기 사업을 하고 있었고, 그 외는 이승만 철학박사 정치사업, 민찬호 문학사 교회사업, 양 윤과 강영복과 김유택과 신상근 의학박사 의사 영업, 정원현과 하수명과 박영호와 김요한 치과의사, 강영각 문학사 교육사업, 김찬제 건축학 건축업, 이영우 신학사 자기 사업, 정의조 문학사 청년회 서기, 안순남 문학사 교육, 류진석 문학사 자기 사업, 이용직 문학사 교회 사업, 김현구 문학사 사회사업, 한영찬 문학사 교육, 정성복 문학사 자기 사업, 서기운 제약과 제약업, 김영기 문학사 토지매매업, 양재영 공학 공장, 이조지 기계학 공장, 정문성 문학사 자기 사업, 김노디 문학사 교육, 황혜수 문학사 여자 청년회, 정애니 문학사 서기, 조프로라 문학사 교회일, 김이스벨 문학사 교육, 이세라 문학사 교육, 양정숙 문학사 살림이었다.

그해 8월 19일 밤에 와히아와한인기독교회 교인 50명이 와일누아 공원에서 미주로 유학갈 홍쩸쓰를 전송하는 소창 순서를 마련했다. 동 교회 담임목사 박동완이 전별사를 담당했고, 최창덕은 이동빈과 최선주와 함께 권면했으며, 이에 홍쩸쓰는 답사하였다.

그해 성탄절을 맞아 와히아와기독교회는 400명 농촌 교우들이 모여 최창덕의 사회로 주일학생들이 준비한 성탄순서를 진행했다. 이날 이곳의 한인감리교회는 500명이 모여 청년들이 저작한 ‘큰 구세주’라는 연극을 시험하였는데 대성황을 이루었다.

1934년 삼일절 기념식은 와히아와 지방에 있는 두 한인교회가 연합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최선주의 사회로 박동완 목사가 기도한 후 강영각이 영어로 연설했으며, 안창호 목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삼일기념금 수봉이 있은 후 박기탄과 이마주린과 전숙경과 위디도가 연설했으며, 두 교회 찬양대의 찬양과 구락부 찬양대의 찬양이 있었다.  

하와이 6,000동포 가운데 애국심이 가장 많은 최병선이 국민회 부활운동을 전력으로 정신과 재정으로 돕고 있었는데 그해 8월에 동지회 인사들을 포함하여 호놀룰루의 한인사회 인사 50여 명을 자신의 아이아 농장에 초청했다. 음식을 대접하며 ‘사회를 붙잡아 민족의 행복을 지도할 수 있을가?’라는 문제를 놓고 여러 명이 의미심장한 연설을 하였다. 연설한 자 중에 이정건, 박종수, 안창호, 박동완, 홍한식, 조병요, 강영각, 이태성, 오 운, 최선주, 안원규, 민찬호, 조석진, 홍치범, 김경옥, 정원명, 김윤배, 이종관과 함께 최창덕도 있었다.

와히아와는 하와이군도 중에서 호놀룰루 다음으로 한인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한인사회나 교회가 날로 힘있게 발전하며 청년사회의 진보가 한인사회에 큰 희망을 주었다. 1년 전에 강영각의 주선으로 조직된 청년연합회는 한인감리교회와 한인기독교회의 청년을 통합하여 민족적 발전과 행복을 도모하였는데 회원이 100명에 이르렀다. 1935년 6월에 회장에 문덕만, 부회장에 위디도, 서기에 김릴리, 재무에 김버니스였고, 고문은 강영각이었다. 최창덕도 여러 가지 면에서 동참했을 것이다.

최창덕은 1938년에 박동완 목사가 담임목사로서 시무하는 와히아와한인기독교회의 주일학교 교장을 맡았다. 당시 주일학교 학생수는 120여 명이었다. 본 교회에는 유아세례자 121명과 성인 세례자 47명을 포함하여 교인 수는 200여 명이었다. 그리고 국어학교 학생은 50여 명이 있었고, 국어학교의 1년 전 지출 예산은 556달러 28센트였다. 예배당과 그 부지는 4,500달러에 해당했다. 

그해 8월에 최창덕은 동지회와 국민회의 합동을 위해 노력했다. 이듬해인 1939년 2월에 하와이에서 ‘한중동맹단’이 조직될 때 그는 서기로 피선되었다. 

1940년에 최창덕은 라디오 부속품 상점에서 지배인으로 활동했고 그의 부인은 양복수선을 하면서도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가 1942년 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2년 4월에 최창덕은 징집서류를 제출했다. 당시 그는 와히아와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징집서류에 따르면 48세였던 그는 168cm의 키에 체중은 65kg이었고 얼굴에는 검은 점이 여럿 있었다. 

최창덕은 1977년 12월에 하나님의 부름에 응했다. 한국정부는 2014년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03.0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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