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리종관(李鍾寬)은 1872년경에 서울 연동에서 태어났다. 가족을 한국에 두고 그는 혼자서 1905년 3월 10일에 차이나 선박을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의 영어 이름은 Chong Kwan Ye였다.
리종관은 1919년 2월에 하와이 지방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외 임원으로는 부회장에 손창희, 총무에 김광재, 서기 및 재무에 김영우, 학무원에 이승만, 법무원에 서상홍, 구제원에 정윤필, 근무원에 손덕인, 농상부원에 신성일 그리고 대표원에 안현경, 윤계상, 류상기였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1919년 10월에 민찬호가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는데 리종관은 본 교회 부목사로 섬겼다.
2년 뒤 1921년 7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옹호하며 대동단결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대한동지회를 창립했다. 이때 민찬호, 안현경 등과 함께 리종관도 동참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인 1922년 10월 19일자의 신한민보는 “하와이에 한인기독교 회당을 새로 건축하는 바 리종관씨의 주장으로 한인 목수가 역사한다는데 이달 중순에 필역하기로 예정한다더라”고 보도했다. 그해 11월에 새 예배당 헌당예배를 드린 후 2주가 되던 때에 부인보조회가 조직되었다. 다음 달 3일에 회집한 부인보조회에서 리종관이 앞으로 어떻게 하든 돈을 모아 교회당 건축 빚을 갚아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회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음식을 만들어 팔아 건축 빚 마련을 결정했다. 이 부인보조회 모임에 그가 참석한 것으로 보아 그가 부인보조회 고문으로 보인다.
리종관은 민찬호가 사임하던 1929년까지 10년간 본 교회에서 시무했다. 그해 한인기독교회 연합체인 ‘중앙한인기독교회’가 하와이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되었고, 1931년에 ‘한인선교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해 리종관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대표로 이지연, 조석진, 민한옥, 박인숙과 함께 한인선교부 연회에 참석했다. 이 연회에서 리종관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평신도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외로는 서기에 최성대, 재무에 민한옥, 임원에 강영복, 서기문, 최백렬, 황원태, 정인수 그리고 김윤배였다. 또한 그는 김성기, 안시흡, 민한옥, 민찬호, 조석진, 백낙현, 이승만, 김성기, 최성대 등과 함께 한인 선교부 9인 이사원의 이사로 선임되었는데 9인 이사원은 1/3이 목사이고 2/3은 평신도로 구성했다. 그리고 그는 한인선교부 재무를 맡았고, 안시흡과 함께 장정개조위원이었다. 그해 리종관은 정인수와 함께 대한인동지회 호놀룰루 이사로 선임되어 교회운동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다.
이용직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직에서 떠나던 1931년부터 리종관은 강태희와 감리교회에서 퇴직한 김이제와 제일한인감리교회 임두화의 세 목사와 본 교회 서정일, 안현경, 정운서, 정인수, 조석진, 차신호 등 평신도 지도자와 함께 본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였다. 김형식이 본 교회 담임목사로 1934년 6월에 부임하였으니 리종관의 설교 목사직은 햇수로는 3년이 된다.
김형식이 담임목사로 취임하기 3개월 전인 그해 3월에 리종관은 각 교회 목사와 인도자를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목사실에 초청하여 좋은 음식을 나누며 친목한 후 그날 저녁에 청년 대회와 그 사업의 필요를 토의했다. 여러 목사가 간단하게 의견을 말한 후 강영각이 청년 사업에 대한 계속 방침을 설명하였을 때 대부분 깊은 동정과 찬성을 표했다. 이날 참석한 사람은 소집한 리종관과 청년 사업을 설명한 강영각 이외에도 김이제, 박종수, 임두화, 안창호, 방종환, 민찬호, 안현경, 조석진 그리고 정인수였다.
1934년 7월에 ‘한인기독교보’가 속간되었는데 리종관은 “축, 기독교회보 속간”을 기고했다. 아래의 그의 기고문에서 시대를 읽은 선각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1919-1929년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부목사, 1931-1934 설교목사로 사역
1921년 대한동지회 창립, 독립운동...한인선교부 이사원 제2 부이사장 역임
반갑고도 즐겁도다. 기독교회보의 갱생함이여. 어둔 밤은 지나가고 밝은 낮이 옴이로다. 엄동이 넘어감이여. 양춘이 돌아오도다. 초목과 군성이 즐겨함이여. 화기가 우주에 창일하도다. 닫혔던 굳은 말을 용맹이 깨쳐 열고, 북악 같이 성수를 들어 남산수로 축하한다. 어찌하여서 그대의 이름이 기독교회보이뇨? 나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니 그대가 짊어지고 여는 목적과 주의를 먼저 알고, 나의 신조와 일치하나 하여 그대의 갱신을 더욱 열광적으로 찬양하며 기뻐하는 바이다.
묻노니 그대의 목적이 무엇이뇨? 신령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써 유년, 장년, 노년의 영적 교양과 훈련이다. 유년에게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종교적 지식으로 교양을 시키는 가정교사로, 장년에게는 자기 인격을 완성하여 어두운 사회의 지도가 되어 산 위에 세운 산성 같고, 등대에 켠 등불과 같이 어렵고 곤란한 중에서 성공을 목표 삼고 다름질하는 용사를 기르는 양성자, 노년에게는 사회로 더불어 싸우다가 인상의 고통에 패전하여 마음이 묻혀서 슬퍼하며 소망이 끊어져 탄식하며 신음과 고통으로 그날그날을 허송하는 이들에게 상한 마음을 위로하여 잃은 소망을 다시 얻어 영원불멸하는 진리의 새 생활을 걸어가게 하는 지도자로 또는 한 주의로는 희생, 사회, 과학의 봉사와 천명함에 힘쓰리라.
사람마다 남이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하고 섬겨주어 무한한 영광과 기쁨을 얻기를 바라고 원한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그런 분수에 없는 욕망을 가진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그 모든 것을 피하려고 하며 부득이 그 존경을 받게 되면 더욱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려 오셨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는 죄인들을 위하여 생명까지 희생하셨으니 그대는 우리 교우를 섬기는 희생적 생활의 표본이 되며, 사회를 떠나서는 살 사람이 없다. 마치 물을 떠나서는 생선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즉 그 사회에서 살려면 주의가 있어서 그 사회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도록 함이 우리 사람의 의무이오, 더욱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그런즉 사회의 소금이 되어서 완악한 저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박애주의로 감화시키는 기독교 사회주의가 되며 지금은 과학 만능의 시대이다. 언제든지 그러할 것이오. 또한 이 세상에선 절대로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 지혜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리석은 자에게 나타내신다. 지혜로운 체하던 사람들은 홍수에 빠져 죽어서 어리석은 자취를 남겼고, 어리석게 여기던 노아는 방주를 타고 구원을 얻어 지혜로운 자취를 남겼다. 지식이 많은 지질학자는 동경과 횡빈을 몇 초 동안에 초토로 화할 줄을 몰랐으니 과학의 만능도 하나님 앞에는 저의 어리석음을 자랑할 뿐이다. 그런즉 과학적 이론과 증거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증명하려는 어리석은 과학자에게 진리를 천명시켜주는 계명 운동자 되기를 바라고 축하하는 바이다.
그대의 탄생하는 이 시기와 처지가 어렵고 위태한 시기임을 잘 알 것이다. 동설이 아무리 냉혹하고 삭풍이 얼마나 열렬할지라도 청송과 녹죽이 저를 변치 아니함같이 비록 시기가 불리할지라도 백절불굴하는 견확한 입지로써 꾸준히 이기고 나가면 양춘가절이 옮이 의심이 없을 것이오. 속담에 부모의 유산이 없는 자는 큰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자기의 노력과 활동으로 이루는 자수 성공과 같이 비록 가난한 우리 사회에 날지라도 정성과 진심으로써 쉬지 않고 노력하고 활동하면 그 앞길은 양양하여 성공의 영관을 쓸 때가 있을 것이다. 탈 없이 자라나고 거침없이 걸어가자. 곱게곱게 잘 길러주리라.
1934년 8월에 하와이 6천 동포 가운데 애국심이 가장 풍부하기로 이름난 최병선이 국민회 부활운동을 적극적으로 정신과 재정으로 돕고 있었는데 동지회 인사들을 포함하여 호놀룰루의 한인사회의 신사 50여 명을 자택이 있는 아이아 농장에 초청했다. 음식을 대접하며 어찌하면 사회를 붙잡아 민족의 행복을 기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여러 명이 의미심장한 연설을 하였다. 연설한 자 중에 이정건, 박종수, 안창호, 박동완, 홍한식, 조병요, 강영각, 이태성, 오 운, 최선주, 최창덕, 안원규, 민찬호, 조석진, 홍치범, 김경옥, 정원명, 김윤배와 함께 리종관도 있었다.
1935년 1월에 한인기독교회 중앙이사국을 호선했다. 이날 리종관은 서무와 서기 그리고 재무부 부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날 선출된 자로는 국장에 박동완, 선교부장에 민찬호, 부원에 박동완, 교육부장에 김형식, 부원에 최성대, 재무부장에 정윤서, 사회부장에 안형경과 부원에 정윤서였다. 그리고 이사 9인을 선정하였는데 이사로 선임된 리종관의 임기는 이승만과 최성대와 함께 1936년까지였다.
1936년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는 김형식이었고, 리종관은 교회직원이긴 하였으나 퇴역(은퇴)목사였다. 그 외 교회직원으로 전도사에 조석진, 집사에 이재연과 차신호 그리고 여집사에 윤세라, 안득은과 안숙자가 있었다. 그리고 청년 면려회 회장에 월터남, 소년 면려회 회장에 해리김이었다. 재무부에 여러 직원이 있었는데 부장에 손창희, 서기에 문인화, 회계에 박주범 그리고 위원에 황원태, H.E 최. 제임스 심 박사, 공영복, C.S.공, N.S.박이 있었다.
그해 3월에 하와이 한인예수교연합회는 이른바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가 한국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사실을 널리 세계에 폭로하는 선전 사무를 확대하기 위하여 미순 메모리얼 홀에서 특별 대회를 개최하고 장래 사무진행에 관하여 토의한 후 이사원을 선정하였다. 이사원에는 정원명, 이태성, 손창희, 조경천, 이정건, 안현경과 함께 리종관도 포함되었다.
리종관은 1938년 한인선교부 이사원의 제2 부이사장이었다. 그해 부장은 이승만이었고, 제1 부이사장은 박동완이었다.
1940년의 호놀룰루 담임목사는 김형식이었고, 리종관은 김이제와 함께 휴직 목사였다. 그리고 전도사로 손승운과 안득은이 있었다. 기타 직원으로는 주일학교와 영어예배 교장에 이동빈 목사, 부사에 김학성과 김노듸, 탁사에 이원순, 강영복, 양유찬, 이재연과 문인화, 재무에 최성대, 박주범과 손승운, 집사에 안숙자, 안득은, 윤세라, 백인숙, 심영신, 조매륜, 전영족, 김유실, 이복수, 민함나, 정순이, 이영옥, 양로원장에 김노듸, 국어학교 교장에 김영기, 부인 보조회 회장에 조매륜, 상애보조회 회장에 송메리, 평신도회 회장에 김광재, 그리고 서기에 김유실이었다.
1941년 3월 23일 주일 주보에 따르면 한국어 아침 예배에서 리종관이 기도하는 순서를 담당했다. 당시 담임목사는 김창순이었는데 이날 주보에 담당자의 소요 시간이 적혀 있었다. 이날 그가 해야 할 기도는 5분간이었고, 김창순 목사의 설교는 15분간이었으며, 안현경 전도사의 광고는 5분간이었다. 그때의 기도가 3분 정도로 지정하는 오늘날의 기도보다는 길었고, 그때의 설교는 20분에서 25분을 할당하는 오늘날의 설교보다 짧았다.
리종관이 1942년에 한인선교부 이사 임기가 끝나면서 교회 사역을 더 이상 하지 않은 것 같다. 한동안 대한인동지회의 임원으로 활동하지 않던 리종관이 1943년에 이원순 이사장의 체제에서 안현경, 박주범, 서정일, 서기춘, 배일진, 민근호, 홍진표, 도진호, 이명우, 정영옥, 김영기와 함께 이사로 활동했다. 이후 그의 이름을 찾기 힘들다. 그는 리진실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damien.sohn@gmail.com
02.1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