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유순(金裕淳)은 1882년 12월 17일에 황해도 안악 신천에서 김영식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 한문을 수학했고 1904년에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청년 시대에 상계의 참 이치를 깨달아 중생하고 몸을 교회에 던져 널리 복음을 전하였다.”
하와이
김유순은 24세가 되던 “1906년에 하와이 한인교회의 청함을 입어 하와이에 와서 6년간 전도에 종사하였다.” 그는 지방전도사로서 1906년에 오아후섬의 에와교회를 섬겼다. 1907년 3월 보고에 따르면 에와교회의 학습교인이 71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7명이었으며, 유아세례 교인은 11명이었고, 주일학교 교직원 12명이 120명의 학생을 지도하였으며, 예배당의 가격은 1,500달러였다. 본 교회는 그의 아버지 김영식 목사가 목회한 교회다.
김유순은 이듬해인 1907년에는 에와교회 외에도 와이아나교회도 목회하였다. 에와교회에서는 이선I와 김윤C 등 두 명의 권사와 협력했고, 와이아나교회에서는 조윤T 권사와 조한S 권사가 합력했다. 1908년 1월 보고에 따르면 에와교회는 전년도와 비교해 학습교인이 17명이 줄었는데 세례교인은 10명이 늘었으며, 유아세례교인은 7명이 줄었다. 주일학교는 작년과 비교해 교직원이 6명이나 줄었고, 학생은 119명이었다. 이해의 총 헌금액은 35달러였다. 한국인의 이동은 연례적이므로 숫자의 의미는 별로 없다.
와이아나교회의 경우 19명의 학습교인에 24명의 세례교인 그리고 4명의 유아세례교인이 있었고, 5명의 주일학교 교직원이 49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그런데 지난 한 해 동안 한 사람이 소천하는 비극이 있었다. 와이아나교회는 오하우섬의 한인교회 중 유일하게 예배당이 없었는데 농장 지배인의 큰 도움으로 몇 달 동안 교인들이 분발하여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81달러를 헌금했다. 그런데 일반 헌금은 총 5달러에 불과했다.
두 교회를 목회하면서도 1907년에 김유순이 하와이 지방회 성수주일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K. 앤자이와 W. 노트와 더불어 그는 주일에 많은 기독교인이 농장에서 일하게 되어 영적 성장이 크게 저하하였다고 보고했다. 그해 고종황제 생신을 맞아 교인들은 예배당에 모여 고종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고 온 교인이 사진을 찍어 기념했다.
이듬해 1월에 하와이 지방회가 리버 스트리트에 있던 일본인 교회에서 있었다. 이해에 그는 와이파후교회, 와히아와교회 그리고 아이에아교회로 파송되었다. 1909년 보고에 따르면 와아파후교회에는 학습교인이 19명, 세례교인이 9명이 있었고, 두 곳에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는데 6명의 교직원이 29명의 학생이 등록한 가운데 평균적으로 25명이 출석했으며, 총 헌금액은 60달러였고, 예배당 가격은 600달러였다. 와히아와교회에서는 김윤C권사와 협력했다.
1909년에도 위와 같은 세 교회에서 사역했다. 1910년 3월 보고에 따르면 전년도와 비교해 와이파후교회는 학습교인은 18명이 늘었고, 세례교인은 12명이 늘었다. 그리고 유아세례교인은 4명이었고, 두 곳에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는데 교직원은 한 명이 적었지만 학생은 25명이 더 등록하였으며 15명이 엡윗 청년회를 조직했고, 총 헌금액은 전해에 비해 44달러가 적은 16달러였으며 예배당 가격은 동일했다.
위의 세 교회에서 목회하면서도 김유순은 1908년과 1909년에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존 W. 와드맨 목사가 교장이었던 한인기숙학교에서 교사, 도서 에이전트 그리고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했다. 1909년의 첫 졸업생 6명 중 양유찬은 그 후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김유순이 1910년에는 아무 사역을 맡지 않았고, 이듬해 1911년에 호항 밀스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김유순이 1911년에 미국 나성으로 건너가서 지금의 바이올라대학으로 알려진 로스앤젤레스성경학교(BIOLA)에 입학하였다. 공부한 지 1년이 되던 1912년 7월에 그는 본 성경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지 두 달 후인 그해 9월에 김유순이 목사로 안수 받았다.
바이올라대학 졸업 목사안수 받고 4년간 경성 순회목사로 사역
드류신학교 첫 한인학생...1920년 귀국, 목회하다 6.25 때 납북
경성지방 순회 목사
1913년 8월 15일 자 신한민보는 ‘김씨 환국’이라는 제하에서 “로스앤젤레스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김유순 목사는 특별히 성신의 인도함을 받아 한국에 돌아가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수월 전에 상항을 떠나 하와이로 행하였더니 그곳에서 동포에게 여러 가지 유익한 일을 많이 행하고, 금월 1일 천양환(Tenyo) 선편에 귀국하였다더라”고 보도했다.
귀국한 1913년에 김유순은 경성지방 순회 목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사경회 인도자가 되어 이듬해 1914년 “3월 23일부터 10일 동안 평양 남산재 교당에서... 매일 밤에 평균 800여 명이 모여... 은혜를 받았으며 당일 기도회와 성경강론회를 행한 후에 전도사 1인을 더 두기로 작정하고... 심히 가난한 자는 밥 지어 먹던 옹달솥까지 팔아 드린 고로 당일 연조가 3백수십원에 달하였다하며... 새로 믿기로 작정한 교인이 300여 명”이었다. 그해 8월 13일 자 신한민보는 ‘도덕상 열심’이라는 제하에서 “로스앤젤레스와 롬폭에 있는 동포들은... 김유순 씨의 봉급을 도와주며 장차 전도 사무를 확장하기 위하여 교우들이 고본금을 모집한다는데 벌써 고본에 응한 자가 13, 4인에 달하였는데 그 고본금은 매고에 25달러로 작정하였으나... 자본을 많이 얻은 후에 내지에 전도를 매득하여 전도 사무의 기초와 교육의 기관을 만들겠다더라”고 보도했다.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전도
김유순이 1917년 11월 상순에 도미하였다. 도미하던 길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동경 한인기독청년회는 11월 5일 하오 7시에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 그를 관곡이 대접하였는데 그가 동경 한인 기독청년들을 향해 복음에 굳게 서라고 전도하였을 것이다.
김유순은 그달 11월 15일에 요코하마에서 출발하여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그곳 각 교회에서 전도하였다. 그해 다음 달인 12월 13일 자 신한민보는 ‘김유순 목사 하와이를 지냄, 미국에 공부 가는 길에’라는 제하에서 “하와이 국민보를 의지하건데 5년 전 하나님의 사명을 받들고 한국 내지에 들어가 수화 중에 침윤한 동포의 영혼을 건짐에 힘을 다하던 김유순 목사는 미국으로 공부 가는 길에 잠시 하와이에 배를 멈추었으므로 하와이 총회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1월 30일 총회관 안에 큰 환영회를 열어 4개년 간 신앙계에 분투를 시험하고 돌아온 김 목사를 반갑게 맞아 그 연설을 듣고 총총히 떠나는 정을 의로 하였다더라”라고 적었다. 그리고 1918년 9월 12일의 신한민보는 작년 11월에 다시 하와이로 건너와서 각 교회를 순행하였다고 보도했다. 그의 순행 전도는 이듬해 9월까지 약 9개월간 계속되었다.
김유순은 1918년 9월 4일에 유학생 9명과 부인 및 여아 2명 등 11명과 함께 난킹 선편으로 하와이에서 출발하여 상항에 도착했다. 그달 12일 자 신한민보는 ‘김유순 목사를 맞음, 공경할 복음의 사명’에서 “복음의 사명을 받들고 내외의 동포 신앙계의 한 큰 권위를 베푸는 김유순 목사의 도미는 별항에 게재한 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는 9월 7일 하오 8시 30분에 환영회를 열고 씨를 맞아 좋은 말을 주기를 청하매 씨는 내지와 하와이에서 부흥회를 일으키어 힘있게 전도하는 사정을 대강 진술하고 나중 동포 장래에 대하여 가로되 ‘나는 간 곳마다 이와 같이 말하였소. 우리는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씁시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일이 있고 복이 돌아올 것이오. 좋은 사람이 되기를 더욱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쓰시오. 좋은 사람을 모아 좋은 사회를 조직한 연후에 우리가 오늘 경우를 면하리라’하였다더라”고 썼다.
좋은 사람이란 좋은 말씀 곧 복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1918년 9월 12일 자 신한민보에 의하면 김유순이 중가주 다뉴바와 로스앤젤레스를 지나갔으니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음을 알게 된다.
나라 사랑
김유순은 1918년에 뉴저지 드루신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나라 사랑은 1919년의 3월 25일자 신한민보에서 잘 드러난다: “김유순 목사의 편지가 본 총회에 도착하였는데 씨가 뉴욕타임스에 기재한 우리의 독립선언과 우리 학생 수백 명이 왜놈의 악독한 형벌을 당하는 전보를 여러 학생들에게 말하였더니 이 학생들이 일치가결로 미국 각처 대학교에 통전하며 연합통신사를 경유하여 한국 학생들과 교우들에게 위로하는 전보를 보내고, 각 학교에 광포하여 공동기도를 하게하며, 또한 만국에 호소하여 불의한 법률 하에 있는 한국인민을 보호케 하자 공결하였는데 이 학교의 교수되는 선생들이 만류하여 중지하였사오니 이는 국제상 사정을 말미암음이나 씨는 피가 끓고 살이 떨림을 이길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해 6월에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미이미교회 선교 100년 기념회에 남녀 아동 등 재미한인대표 2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김유순도 있었다. 그들은 연극을 준비하고, 한국 미술품을 진열하여 한국을 소개하였고, 그달 25일 저녁에 그곳 시티클럽에서 한국 참상을 친히 목도하고 귀국한 미국인 S.A. 벡 선교사와 정한경을 청하여 삼일운동 이후 한국 시국에 대한 연설이 있었다. 그해 7월 유학생 신분이었던 김유순은 대한민국 적십자회에 의무금 2달러 50센트를 기부하며 나라사랑에 힘을 보탰다.
김유순은 1920년까지 2년간 드류신학교에서 공부하여 한국 유학생으로 최초라는 명예를 얻었다. 그해 귀국한 그는 순회 부흥목사로 활동하다가 평양 남산현교회, 충남 홍성교회, 해주교회, 천안읍교회, 백천교회, 서울 만리현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면서 지방감리사로도 활동했다. 1929년 6월에 호항 한인감리교회에서 뉴욕 콜럼비아 신학생 변 씨가 못 가게 되어 본국서 김유순 목사나 조희염 학사 중 한 분을 초빙할 계획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하와이에 가지 않았다. 서울 북아현교회에서 시무할 때인 1949년에 감리교의 제9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는데, 이듬해 6.25동란 때 교회를 지키고 있다가 공산군에 납북된 후 그의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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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