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이만춘(1873-?)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만춘(李萬春)은 1873년경에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30세가 되던 1903년 11월 5일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홍콩 마루에 승선하여 그해 11월 1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승객 서류에 따르면 홀아비로 적혀 있 어 가족을 한국에 두고 혼자 이국땅을 찾 은것으로보이고읽고쓸수있다고적 혀있는데 아마도 국어를 쓰고 읽을 수 있 다는 말로 들린다. 직업은 농부였고 배 삯을 스스로 마련하였다. 수중에 50달러 를 가지고 있었으며 부러진 뼈가 없이 건 강했다. 당시 이민국에서는 수감 여부, 일부다처론 여부, 무정부주의자 여부 등 을 물었는데 그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 만춘은 오아후 섬 카파아(Kapaa) 농장에 정착하였다. 그의 영어 이름은 Ye Man Choon이나 Yi Man Choon이나 Yee Man Choon으로 쓰였다.

호놀룰루 한인전도회 창립 교인

안중수와 우병길이 하와이 미국북감 리교 감독이었던 조지 L. 피어슨 목사를 찾아가 오아후섬 호놀룰루에서 한인전 도회를 조직한 때가 1903년 11월이었다. 본 전도회의 창립교인이 20명이었는데 이만춘이 20명 창립교인 중 한 사람이었 다. 당시 그는 학습교인이었다. 등록한 지 이듬해가 되던 1904년 5월 13일에 그 는본교회에서조지L.피어슨목사로부 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만춘은 오아후섬 에와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로 이명하였다. 1905년에 민찬호 목사가 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하였고, 당시 본 교회는 33명의 재적교인 에30여명이매주출석하였다.그후본 교회는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가 되었 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다.

오아후 섬 에와한인감리교회

이만춘은 1905에 가와이섬 가파농장 에서 오아후섬 에와농장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그는 에와한인감리교회로 이명 했다. 그해 4월에 예배당이 건축되면서 본 예배당은 호놀룰루교회에 이어 두 번

째 예배당이 된다.
안정수, 윤병구, 홍승하 등이 참여하여

1903년 8월에 호놀룰루에서 설립한 신민 회가 구국을 위한 동족단결과 민지계발 그리고 국정쇄신을 목적하였는데 대한 제국을 정복하려는 반역집단이라는 오 해가 일어나 이듬해 4월에 해체하였다. 신민회 해체 이듬해인 1905년 5월 3일에 정원명, 김성권, 윤병구, 김규섭, 강영소 가 친목회를 조직할 때 이만춘도 가담했

30세에 하와이로 이주 호놀룰루한인전도회 창립 20인중 일인
교회 전도사사역 외 한인 동포사회와 한인 아동교육에도 열심

다. 회장은 정원명이었고, 서기는 백일규 였다. 본 친목회는 항일운동과 일화배척 그리고 동족상애를 목적하였다.

두달후인그해7월에에바친목회는 미주공립협회와 연합으로 윤병구를 대 표로 하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 있 는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공부하던 이승 만을 통역으로 임명하여 미국 뉴햄프셔 에서 열린 ‘러시아, 일본 강화회의’에 한 국문제를 제출하기로 하였고, 그해 8월 10일에 윤병구와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방문하여 ‘러시아, 일본 강화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12월에 개최한 제1회 미국북 감리교 하와이연회는 김영식을 본 교회 담임목사로 임명했다. 1904년 본 교회는 56명의 교인이 재적하였는데, 김영식 목 사가 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던 1905 년 12월에는 재적교인은 135명이었지만 매주 200여 명이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김 목사는 본 교회를 1906년까 지 섬겼다.

에와농장의 어떤 동포들이 “주색잡기 의 장으로 가서 시간을 낭비한다”는 한 탄하는 글을 '공립신보'에 남긴 다음해 본 친목회는 1906년 5월 1일부터 속쇄판으 로 '친목회보'를 발행하여 사회기강을 바 로잡으려는 결의가 역력했다. 그해에 이 만춘은 정원명과 함께 동포들을 따뜻하

 

게 권면하며 한인사회의 진정한 정신적 인도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1906년 9월 19일 자 공립신보에 따르면,

"하와이 에와 농장에 유하는 김익용 씨가 본사에 편지하기를 본인이 근본 피 류 없더니 금년 정월에 에와농장으로 와 서유한지칠팔삭동안에이만춘,정원 명 양 씨의 진심으로 권면하는 말씀을 듣고 감동하여 회개한 것이 많삽고 또한 본인만 아니라 수백 명 동포가 진보됨이 날로 새롭기에 기쁨 마음을 측량할 수 없어 귀사에 앙고하오니 정, 이 양씨의 열성을 표창하시기 바란다하였더라."

1907년에 이만춘이 가담한 에와 친목 회는 광무황제 탄신기념행사를 마련하 였다. 게재한 사진에 나오는 대부분 사람 은 에와교회 교인일 것이고, 이중에 이만 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해 12월에 에와교회에 김영식 목사 의 후임으로 김유순 목사가 부임하여 1908년까지 섬겼으며 1909년에 오응순 목사가 부임하였다.

국구해리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이만춘은 1909년에 하와이 섬 국구해 리(Kukuihaele)의 농장에 거주했다. 당시하와이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에 조선총독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고, 체포되어 재 판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4개월간 안중근 의사의재판을 위하여 후원금을 모금했다. 이때 이만춘은 1달러를 기부했다. 총 1,595명 의 한국인이 2,921달러를 후원했는데 하 와이 한인 이민연구가 이덕희에 따르면 이 금액은 2001년의 돈 가치로 환산하면 60,000달러에 해당했다.

1910년에 하와이섬 국구해리 한인감 리교회가 조직되었고 그해 최진태 목사 가 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국구해리에서 남동쪽으로 10km 떨어 진 호녹가이지(Honokaa)교회와 호녹가 이지에서 해변을 따라 남동쪽으로 37.7km 더 가면 나오는 파팔노아 (Papaaloa)교회까지 섬겼다. 그리고 1911 년에 김영식 목사가 본 교회에 부임하였 고, 호녹가이지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1910년과 1911년의 하와이 전화번호부 에 따르면 이만춘이 하와이 섬 국구해리 에 있던 국구해리 한인감리교회 목사였 다. 아마도 그가 최진태 목사와 김영식 목사가다른교회를방문할때본교회 의예배를인도하는등목회를한지방 전도사로 보인다.

하와이 국구해리 한인감리교회는 1915년에 박새환 목사가 부임하여 호노 가이지교회까지 섬겼는데, 1916년에는 그가 섬긴 지역이 호노가이지 지역교회 로 되었다가 1917년 이후에는 국구해리교회가 자취를 감추었다.

오아후 목골니아 한인학교

그런데 1910년 3월에 모인 하와이 선 교부 회의록에는 이만춘이 오아후섬의 목골니아에 있던 한인학교 교장으로 소 개되고 있다. 당시 하와이 군도에는 11개 의 한인학교가 있었고, 오하후섬에는 목 골니아 외에도 에와에 한인학교가 있었으며 이 한인학교는 에와한인감리교회 를 담임한 이선일이 교장이었다. 1911년 에도 이만춘이 오아후 목골니아 한인학 교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하갈나우 상동 한인기독교회 전도사

이만춘은 하와이 섬 하갈나우(Hakalau) 의 농장으로 이주했다. 하갈나우는 국구 해리에서 남동쪽으로 56.5km 떨어진 해안 도시다. 이만춘 전도사는 1934년 이전에 다년간 하와이 섬 하갈나우(Hakalau) 상동 한인기독교회를 섬겼다.

이만춘은 교회뿐만 아니라 한인 동포사 회와 한인 아동교육에도 열심이었다. 1934년 6월 11일에 본 교회를 방문한 박동 완 목사의 주례로 밤에 예배를 드리고 한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해 10월에 한인기독교보에 기고한 박동완 목사의 순 회방문기에서 본 교회를 엿볼 수 있다.

"5, 6년 동안 중앙부에서 각 지방교회 를 순회 시찰하지 못하다가 중앙이사국 장 대리의 자격으로 박동완이 1934년에 순행 전도여행을 떠났다. 때는 6월 8일 오후 4시다.... 11일, 힐로 한인기독교회 장 붕 목사와 동반하여 하갈나우 상동에 갔다. 자동차에서 내려서 3마일가량이나 걸어가는데 전에 한번 갔었으나 길을 알 지못하여새로난넓은길만좇아서산 북다이까지 가서 물은즉 잘못 지나 올라 갔다. 도로 3마장 가량이나 내려와서 좁 은 길을 바로 찾았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험하 여 찾는 자가 적으니라 하는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하였다. 동중에 들어가니 여러 분들이 의외같이 반가워하며 맞아준다. 밤에 예배하고 한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 다. 이곳은 이만춘이 다년 교회와 사회 또는 교육에 동중 동포들의 뜻을 아울러 많은 노력과 활동을 쉬지 않는 바이다."

그런데 동아일보 1933년 12월 19일 자 에 이만춘이 나온다. 경의선 백마 역전에 있는 예수교 정심교회에서는 설립자 이 만춘과 김학연 양 씨의 기념비 제막식을 그달 14일에 동 교회당 내에서 성대히 거 행하였다. 백마 정심교회를 찾을 수 있으 면동일인물인지를찾게될것이다.이 렇듯그의이름은더이상쉽게찾을수 가 없다.

damien.sohn@gmail.com

0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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