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유경상은 1904년 1월 20일에 강원도 통천에서 출생했다. 그는 20세가 되던 1924년 보광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이듬해까지 근무했다. 교편을 잡던 그는 연희전문대학에 입학하였고 본 대학을 졸업하면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모교인 연희전문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도미
신한민보는 연희전문학교 교수 유경상이 유학차 1937년 6월 9일에 도미했고 천사도 이민국에서 상륙하게 되면 시라큐스대학에서 약 2년간 유학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유경상의 영어 이름은 Kingsley Kyungsang Lyu였다. 그런데 신한민보의 보도와는 다르게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덜햄에 있는 듀크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과정을 마쳤고 1941년에 본 대학교에서 조교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42년 2월 16일에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했다. 그해 7월 23일 자의 신한민보가 그를 듀북대학을 졸업하였다는 보도는 듀크신학교에 대한 오기라고 본다.
유경상은 1942년 가을학기에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대학의 교수가 되어 이듬해까지 일본어와 동양철학을 가르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와이 가와이 한인감리교회
유경상은 1943년에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지방회에 가입하면서 그해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초에 하와이 가와이 지역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아 이곳에 산재한 세 한인감리교회를 목회했다. 유경상이 부임한 지 5개월이 되었을 때 가와이 섬의 가파, 엘리엘리 그리고 긱가하의 세 곳 한인감리교회에서 매 주일 한인동포가 평균 5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은 예배에 참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도와 열심히 교회 일을 도모하였다.
1943년 12월 11일 오전 10시30분에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윌리엄 프라이 박사가 가파 예배당에서 ‘노력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이날 프라이 박사의 영어설교를 유경상이 한국어로 통역하였을 것이다. 예배 후에 계삭회가 있었다. 그날 골로아와 엘리엘리 두 지방을 제외한 각 지방에서 한 두 명의 대표가 모였는데 총 25명이었다.
이날 계삭회에서 예배당 임원을 선정하였다. 가파 예배당 임원으로 조치삼을 권사 겸 재무로, 전소연을 고 김상회의 후임으로 탁사 겸 재무로 선정하였고, 긱가하 예배당 임원으로 이경서를 권사 겸 재무로, 한매리를 탁사 겸 재무로 그리고 박순이를 탁사로 선임하였으며, 엘리엘리 예배당 임원으로 이춘서를 탁사 겸 재무로 그리고 권봉선 부인을 탁사 겸 재무로 선정하였고 가파 예배당 임원에 정원현 의사와 정준영을 탁사로, 이정근을 재무에 선임하였다.
그리고 이날 보고에 따르면 긱가하 동포들이 100여 달러를 헌금하여 목사 사택에 필요한 침대와 기타 가구를 구매하였고, 가파 동포들이 52달러를 헌금하여 예배당을 수리하였고 최종만이 차고를 지었으며 이선벅 부인이 가파 예배당 수리를 위하여 75달러와 속사기 구매비 30여 달러를 헌금하였다.
이날 보고된 바로는 파인애플 농장주인 호너 씨가 목사에게 매년 50달러를 기부하기로 하였다. 긱가하 사탕농장에서 예배당을 새로 수리하던 중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는데 유경상이 가와이 터미널 주인 피칵 씨와 정부에 교섭한 결과 그해 9월 첫 주일부터 엘리엘리에 있던 일본인의 학교를 한인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100여 달러를 들여 교회 자동차를 수리하였으며 프라이 감리사가 청년들의 예배를 위하여 영어 찬송가를 기증하였다.
그리고 1934년 12월까지 들어온 헌금은 가파 교회에서 22달러 50센트, 긱가하 교회에서 19달러 35센터, 엘리엘리 교회에서 18달러, 가파 교회에서 11달러였다. 그해 주보작성에 7달러를 지급했다. 한 해 동안 외국인의 기부도 있었는데 가파 예배당 수리를 위하여 75달러를 헌금한 이선벅 부인 외에도 L.C. 월칵스 여사가 75달러, 메불 월칵스 여사가 75달러 그리고 호너 씨가 150달러였다.
이날 계삭회가 마치면서 프라이 감리사를 모시고 후지 카페에서 8, 9명이 모여 오찬회를 가졌다.
엘리엘리 교회 교인 고 전시문의 부인은 1943년 12월 7일에 적십자회를 통하여 본국에 있는 남동생에게서 ‘다 잘 있다’는 기쁜 소식을 1944년 1월 3일에 받아 전 부인은 안심하며 기뻐하였다. 다른 한편 긱가하 농장 양노원에 있던 조치주는 1943년 12월 13일에 향년 89세에 별세하여 유경상 목사의 사회로 안장하였으니 한 달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
1944년 2월에 보고된 연회와 세계구제금으로 헌금한 사람과 헌금액은 아래와 같았다. 정호영 10달러, 김재용 8달러, 전소연 7달러, 이경서와 이정근과 조치삼과 정준영이 각각 6달러, 구화실과 김행문과 이성화와 이희순과 정원현이 각각 5달러, 정광조와 고운한과 권봉선과 동부인과 문봉섭과 동부인과 최치명이 각각 4달러, 최종만이 3달러 75센트, 김영길과 우갑덕이 각각 3달러, 김용식과 김창호와 김태하와 이봉담과 이익선과 유성호와 양남수와 이춘서와 이춘식과 박근실과 백수남과 아비라또와 우두현과 한매리와 전병구와 전시문 부인과 이주선 부인과 정학수와 최 철과 하태금과 허봉일이 각각 2달러, 강정빈과 박순이와 박 문이 각각 1달러 50센트, 방창엽과 손영찬과 신피터와 한영호가 각각 1달러였다. 위의 명단에서 교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고, 당시에는 헌금액을 명확하게 밝히는 관습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가와이 교회에 부임했던 1943년 여름에 유경상은 이승만의 요청으로 ‘태평양 주보’ 주필을 맡았다. 교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로 가던 그해 9월까지 본 교회에서 목회하였으니 목회기간이 약 6개월이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1944년 하와이 감리교 연회록을 작성한 윌리엄 H. 프라이 감독은 유경상이 가파에 거주하면서 가와이 한인선교부를 맡고 있음을 보고하면서 그해에 그가 안식년을 가졌다고 적었다.
R.M. 스콰이어가 작성한 1943년과 1944년의 하와이 선교연회 통계에 따르면 총 세례수는 82명이었고 비거주 교인이 5명이었으며 전출되거나 사망한 교인수가 3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은 19명이었다. 예배당에 소요된 비용이 165달러에 예배당 운용비가 597달러였는데 이는 특별 헌금에서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계봉사 등 해외선교비로 40달러를 사용했으니 유경상의 사례비 연봉이 94달러였는데 그해 한 해 사례비의 거의 반에 해당했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유경상은 태평양 주보에서 만난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의 손노듸의 소개로 1944년 9월 12일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45년 1월 7일 주보는 당시 교회 형편을 보여준다. 한글과 영어의 이중언어로 되어 있었는데 영문은 타자하였고 한글은 손으로 썼으며, 제17호라고 적어 유 목사가 부임한 후부터 17번째 주일임을 표시하였다. 풍금 반주자는 박금녀였다. 이날 그는 빌립보서 3:13-16을 본문으로 하여 ‘목적 있는 생활 The Life of Purpose’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예배 후에 신년 첫 임원회가 있었고, 2차 세계대전말 대한부인구제회(적십자사)가 주동이 된 적십자사를 위한 붕대 접기 시간도 있었다. 그해 1월 1일부터 한 주간 신년기도회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이판 한인들에게 찬송가와 성경 그리고 손풍금을 보낸다는 소식도 읽을 수 있다.
1946년 부활절 예배는 500여 명의 청년과 300여 명의 노인이 참석한 가운데 선교부 주일로 모였는데 유경상은 ‘정신적 부활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설교했다. 이날 유아세례를 받은 자가 40여 명이었고, 성인 1명이 세례를 받았다. 예배 후 점심을 먹은 후 주일학교 학생들이 ‘닭알’ 경주를 하였다. 이날 헌금은 451달러 74센트였다.
1946년 5월 9일부터 유경상은 한인교보(Korean Crusaders)를 발간했다. 그는 ‘한인교보를 창간하면서!’라는 제하에서 “본보를 발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한인기독교도가 미포 각처에 수천 명이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소식을 통할 길이 없으므로 하와이에서 되는 일을 미국에서 모르고 미국에서 되는 일을 호항에서 모르게 되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마귀는 미포한인기독교인을...푸치며 거짓선전에 진력하여 마치 기독교회가 잔멸하는 것처럼 꾀하는 중에 있다. 믿음이 연약한 교우들은 사탄의 시험에 흔듦에서 진가를 분별치 못하고 선악을 구분치 못하는 것이 딱하다. 그러므로 이런 교보를 통하여 각처 교우들이 이전보다 더 긴말하여 힘을 한데 합하여 이 세상 마귀들을 파멸하고 지상 천국을 속성하는데 일조가 될까 한다....사이비교인들을 경성하여 우리 한인 구령사업에 경종이 되며 계명성이 되기를 자기하는 바이다.” 곧 하와이 각처에 산재한 한인기독교회 교인과의 소식 나눔, 한인 구령 사업의 경종, 계명성이 됨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가 직접 손으로 쓴 2, 3쪽을 복사하여 무료로 배부하였다.
1946년 5월 22일자 한인교보에 ‘교회 충성의 필요’라는 제하의 글이 있다. 유경상의 글로 보이는데 교회충성은 일만 가지 충성의 근본인데 이는 형식보다도 본질을 위주 하는 것이라 적고, 사회 충성은 자기의 영예와 이욕으로 충성심이 좌우되기 쉬우므로 교회에 충성하는 자가 끝까지 사회에도 충성한다고 적었다.
그해 6월 5일자 한인교보에는 ‘심령을 개조하자’라는 사설이 있다. 심령생활이 모든 생활의 중추가 되어 지배력이 되는 까닭으로 심령개조가 있고 난 후에 개인구원도 사회구원도 국가건설도 된다고 적었다. 1945년 말부터 목사 지지자와 반대자 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가운데 나온 글로 보인다.
1946년 6월 16일 평신도 회의가 모여 유경상의 사면을 결정하고 7월 31일까지 시무하도록 했으나 목사 지지파와 반대파 등 두 파로 갈라선 교인 사이에서 그는 목회를 계속했다.
1948년 4월 25일에는 교회 주최로 최근 한국에서 결혼하고 돌아온 교인의 자제 부부와 한국에서 온 유학생을 위한 만찬이 있었다. 미군정 하에 한인 2세들이 한국에 주둔할 때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본 교회 교인으로는 13가정이나 있었고, 본 교회에 출석하던 유학생은 10명이었다.
이승만이 추천한 김태묵 목사가 유경상에 이어 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던 때가 1948년 10월이므로 그때까지 유경상이 목회했다. 이로써 그의 목회는 3년 9개월로 보면 된다.
교회 목회를 떠난 유경상은 하와이 대학에서 1년을 가르쳤고 1950년에 호놀룰루의 잭슨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76년 7월 25일에 향년 7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미국 매릴랜드주 프린스 조지 카운티 브렌트우드에 있는 포트 린컨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아내 한상희에게서 딸 매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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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