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호항 도착 승객 명단’에 따르면 김행근(Kim Hyeng Keun)은 1
김리봉(김형근)의 1910년 인구조사
865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나 가양리에서 거주했다. 가양리는 세 곳에 있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가양리 그리고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가양리다. 그가 거주했다는 가양리는 이 세 곳 중 한 곳일 것이다.
위의 ‘호항 도착 승객 명단’에 따르면 김행근은 39세이던 1904년 11월 2일에 퍼시픽 메일 선박 회사 소속의 만추리아 선박을 이용하여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홀아비로 11세의 딸 보비와 6세의 딸 이분과 9세의 아들 계봉의 세 자녀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당시 지참금은 최고가 50달러였는데 그는 50달러를 지참하였고, 세 자녀는 각각 20여 달러를 지참하였으며, 건강 상태는 모두 양호했다.
교회 사역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교역자 명단’에 나타나는 김형근(Hyong Keun Kim)이 위의 ‘호항 도착 승객 명단’의 김행근으로 보인다. 김형근의 교회 사역은 1907년 3월부터다. 그가 하와이에 온 지 3년이 되던 해다. 그는 ‘북쪽의 정원 섬’으로 알려진 가와이섬의 엘리엘리교회와 골로아교회 등 두 교회를 담임했다. 이듬해 1월 보고에 따르면 엘리엘리 교회에는 학습교인이 53명이었고, 세례교인이 32명이었으며, 유아세례교인은 19명이었고, 주일학교가 세 곳에 있었는데 10명의 교직원이 80명의 학생을 지도했으며, 자체 교회와 사택이 있었고, 이 두 건물의 값은 각각 150달러였으며 이들 두 건물을 수리하는데 135달러를 지급했다. 그런데 그해 그는 김이제가 섬기던 같은 섬에 있는 막가벨리교회의 권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1월에 김이제가 김형근이 담임하던 위의 두 교회에 파송되었고, 김형근은 김이제가 담임한 엘리엘리교회에 권사로 파송 받아 섬겼다.
1909년 3월에 김형근이 다시 위의 가와이 섬의 엘리엘리교회와 골로아교회로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엘리엘리교회는 신실한 교회로 알려졌고, 엡윗 청년회가 활발했으며, 주일학교가 재미있었다. 한인 노동자의 거주상황이 꾸준히 개선되면서 농장 지배인은 김형근의 교회 사역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해에 김형근은 지방 전도사 1년 차 훈련생으로서 받은 80점은 9명의 지방 전도사 중 중간성적이었다. 그해에 위의 두 교회에는 권사가 없었다.
그런데 1910년에 실시한 미국 연방정부 인구조사에 따르면 44세의 김리붕(Kim Le Pung)이 하와이 가와이 섬 엘리엘리에 있던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했다.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교역자 명단에 1910년 엘리엘리교회 담임목사는 김형근(Kim Hyong Keun)이었으므로 김형근의 다른 이름이 김리붕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추측은 두 가지 점에서 더 분명해진다. 1910년 미국 연방정부 인구조사에 기재되어 있는 김리붕(Kim Le Pung)이 1904년에 하와이로 입국한 홀아비로 적혀 있어 ‘호항 도착 승객 명단’의 김행근(Kim Hyeng Keun)과 입국 연도와 결혼 상태가 같다. 그리고 두 자녀에 대한 영어 알파벳이 소리 나는 대로 기재자가 적당히 적었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두 자녀인 17세의 아들 Kim P. Ke와 14세의 딸 Kim Abuen이 ‘호항 도착 승객 명단’에 적혀 있는 아들 Kim Kei Pong과 딸 YeBoon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김형근의 17세의 첫째 딸 김보비가 1910년 인구조사에 기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딸은 타주에 거주하였거나 결혼하였을 것이다. 35세의 한번태가 김형근의 집에 하숙하였으므로 거주자 수는 여전히 네 명이었다.
그리고 김리붕(김형근)과 그의 두 자녀와 하숙생의 이름 등 4명의 이름이 본 지역의 인구조사서의 첫 장에서 제일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대로 적힌 것으로 보아 그들이 제일 먼저 와서 인구조사에 응했다. 그들이 첫 번째 인구조사 응답자였음이 흥미롭다.
1910년 인구조사에서 볼 때 김형근이 엘리엘리에서 거주하면서 그곳 엘리엘리교회를 목회하였고, 인근 골로아교회를 순회하면서 목회하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1910년 연회록에 따르면 한인교회의 총 권사수가 27명이었고, 이중 가와이 섬에 5명의 권사가 있었다. 1910년 당시 가와이 섬에는 김형근의 두 교회를 포함하여 김영식이 다섯 교회를, 김이제가 두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김형근의 두 교회에 적어도 한 명의 권사는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 미국연방인구조사에 나오는 한인들을 살피면 김형근이 목회하던 엘리엘리교회와 골로아교회의 교인을 알 수 있다. 엘리엘리에 거주한 한인가정으로는 44세의 김형근의 가정(17세 아들 계봉, 14세 딸 이쁜) 외에도 31세의 공양조(31세)의 가정(21세 부인 공강정, 2세 딸 명선, 3달 딸 한영), 27세의 김봉곡의 가정(29세 부인 김김정, 6세 아들 수선, 쌍둥이로 보이는 2세 아들 모세와 딸 해나), 44세 박사봉의 가정(37세 부인 박 씨, 12세 아들 태술), 35세 박원긍의 가정(35세 부인 박 씨, 12세 딸 명설, 9세 딸 순금, 1살 아들 마태), 53세 전호영의 가정(27세 부인 전정박, 9세 아들 이조, 4세 딸 숙이, 1세 딸 경숙), 그리고 37세 주영남의 가정(30세 부인 박씨)으로 총 8가정이었다.
그리고 총각이거나 홀아비는 김박원(28세), 박섬채(38세), 박연설(50세), 박전배(29세), 박정원(38세), 성명첨(32세), 심영홍(37세), 영채근(38세), 이명식(45세), 이솔선(47세), 이후동(27세), 이천설(47세), 정V선(31세), 정서문(26세), 정영암(30세), 주원경(53세), 추이완(30세), 하선P(26세), 하최민(27세), 하태겸(44세), 한번태(35세) 등 21명이었다.
그러므로 엘리엘리에 거주하는 한인은 성인 남자가 29명, 성인 여자가 7명, 어린이가 14명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모두 교회에 출석했다면 성인 교인은 36명, 주일학교 어린이는 14명이 되어 총 50명이 된다.
그리고 골로아에 거주한 한인은 45세 김성밤의 가정(35세 부인 김 씨, 16세 아들 방릉, 3세 아들 만길, 9달 아들 차길), 48세 김채건의 가정(32세 부인 헬렌, 9세 아들 커보스트, 7세 아들 계산, 4세 아들 태길, 2세 딸 카야오키), 54세 김칠경의 가정(62세 부인 함 씨, 21세 아들 칠성), 39세 민후신의 가정(41세 부인 유 씨, 19세 아들 이남, 8세 딸 사필, 3세 아들 앤넘), 34세 박 씨의 가정(9세 아들 태박, 7세 아들 태산), 46세 성광성의 가정(30세 부인 루시, 11세 아들 송흥, 9세 딸 박곰, 4세 아들 도마, 1.5세 딸 마리아), 38세 소장순의 가정(36세 부인 루이스, 2세 딸 메이, 2달 딸 데이지), 34세 이기영의 가정(30세 부인 마티, 7세 딸 도티, 2세 아들 제임스), 37세 이종관의 가정(26세 부인 이 씨, 12세 아들 호선) 등 9가정이었다.
총각이거나 홀아비는 강히추(30세), 권도인(22세), 김 씨(65세), 김경식(34세), 김관일(37세), 김광은(35세), 김달임(39세), 김덕새(30세), 김덕환(47세), 김돈철(29세), 김동수(36세), 김만설(40세), 김성운(51세), 김성진(22세), 김세화(34세), 김시롱(30세), 김영구(37세), 김양배(27세), 김용주(36세), 김용필(31세), 김친조(29세), 김항낙(33세), 김항식(67세), 김현숙(31세), 김형곤(55세), 문방석(31세), 박기봉(29세), 박영기(38세), 박정북(17세), 백방화(21세), 소성운(30세), 신진수(45세), 양양소(28세), 연성오(31세), 우정조(34세), 우항모(44세), 윤태원(38세), 은진종(30세), 이성릉(28세), 이성심(25세), 이성해(36세), 이순방(28세), 이순선(34세), 이완일(25세), 이윤오(37세), 이정김(26세), 이천일(31세), 인부김(55세), 전유박(19세), 정성명(31세), 정익환(24세), 조경천(27세), 조만호(29세), 주형경(31세), 차완식(47세), 최기서(32세), 최기영(39세), 한용성(24세), 한진운(34세), 함완석(23세), 함양염(31세), 호규지(42세) 등 62명이었다.
가정과 총각 또는 홀아비를 합치면 성인 남자가 71명, 성인 여자가 8명, 자녀가 22명이다. 그런데 자녀 중 20대가 한 명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모두 교회에 출석했다면 성인 교인은 성인 남녀와 20대 자녀 한 명을 포함하여 80명이 되고, 주일학교 학생수는 20대의 자녀 1명을 제외하면 총 21명이 된다. 그러므로 총 교인수는 101명이 된다.
1910년 3월에 김형근은 엘리엘리교회와 골로아교회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이해에도 그는 지방 전도사 1년차였다. 이듬해 3월 보고에 따르면 엘리엘리교회의 학습교인은 26명이었고, 세례교인은 41명이었으며 유아세례교인은 9명이었다. 본 교회는 내지선교와 교회 확장선교를 위해 11달러, 일반교육을 위해 1달러, 주일학교를 위해 1달러 등 총 13달러를 연회에 보냈다.
1912년 3월의 하와이 연회록에 따르면 김형근은 장Y.W.와 최Y.C.와 함께 1912년에 지방 전도사의 1년급 학생이었다. 그해 그는 김광현, 최운숙, 김채성, 이관묵 그리고 박정수와 더불어 지방 전도사증을 갱신했다. 1912년에 출간한 제3권 제8호의 ‘대도’에 따르면 골노아교회 전도사가 김형근이었다. 그해 본 교회임원은 권사에 정인수와 오응택이었으며, 속장에 김정근과 안형견과 박종운이었고, 주일학교 선생에 이종관이었으며, 유사(재정 담당 집사)에 박운경과 박경화이었다.
김형근의 교회사역은 전도사로서 3년과 권사로서 1년으로 총 4년이 된다.
도미 3년 후부터 하와이 가와이섬 두 교회 사역...행근, 리붕으로도 기재
한인학교에도 파송 받아 소학교, 야학교, 국어학교(육영학교)에서도 사역
학교 사역
김형근은 교회뿐만 아니라 학교도 담당했다. 그는 1910년 3월에 가와이섬의 엘리엘리와 골로아에 있는 한인학교로 파송을 받았다. 이듬해인 1911년 3월에는 가와이섬의 엘리엘리에 있던 한인학교로 파송받았고, 1913년 3월과 1914년 3월에도 같은 학교에 파송 받았다.
1908년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연회록에 따르면 소학교와 야학교와 국어학교 등 세 학교가 있었다. 1909년에 발간한 현 순의 ‘포와유람기’에 따르면 하와이에 한국 소학교 제도를 좇아서 자녀들을 교육하는 한인공립소학교가 있었는데 “누구누구의 구별 없이 의무적으로 교육을 실시하므로 한인 남녀아동들도 이 학교에 통학하여 영어를 능통히 하게 되었는데 혹은 일어, 영어에 통하는 아동들도 많아졌다.”
1913년과 1914년에도 엘리엘리와 골로아에 이런 소학교가 있었다면 김형근이 이 소학교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10년 인구조사에서 엘리엘리에 거주하는 어린이가 14명이었으므로 학생수가 10여 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현 순의 ‘포와유람기’에 야학교가 1908년에 10곳에 있었고 영어, 국한문, 산수 등을 가르쳤다. 1913년과 1914년에도 엘리엘리에 야학교가 있어 김형근이 야학교를 담당했을 것이다. 1910년의 인구조사에서 남녀 성인이 총 36명이었는데 야학교의 학생수가 족히 30여 명이 되었을 것이다.
국어학교는 1907년 11월에 가와이섬 엘리엘리 지방에 설립한 육영학교로 보인다. 1905년부터 각 지방 교회마다 국어학교를 설립하고 매일 몇 시간씩 한글을 가르쳤는데 김형근이 육영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쳤을 것이다. 1910년 인구조사를 참조하면 육영학교의 학생수가 10여 명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김형근의 학교사역은 총 5년간이다.
김형근의 이후 행적은 ‘하와이 한인감리교회 교역자 명단’에서는 찾지 못한다.
damien.sohn@gmail.com
12.1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