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노형달(?-1932)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노형달은 한국에서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전해 받고 10여 년간 양주와 회양과 독바위와 기타 여러 곳에서 교회를 맡아 전도사업을 하였다.

4년간의 노동 계약기간 높은 보수와 다양한 편의를 제공한다는 거짓광고에 1905년 4월 4일에 멕시코의 남부 살리나크루스 항구로 떠나는 영국 소속 ‘일포드’ 화물선에는 천여 명이 승선하였다. 이 가운데 노형달이 있었다. 그해 5월 8일에 멕시코에 도착한 그는 메리다 시내에서 매우 가까운 곳의 초초란 농장에 들어갔다. 

지정된 곳에서 거주해야 하고, 다른 농장에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고, 동포를 만나면 허락 없이 만났다고 가두는 등 완전히 속박을 당하였고, 아침에 조금만 늦게 일어나게 되면 잡아다 구타했다. 혹사를 당하면서도 살인적인 더위에 주일에도 일에만 열중한 터에 노형달에게 신앙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기독교인이었던 최춘택이 1906년 8월에 믿음을 잃고 졸고 있던 김제선을 깨웠고, 때마침 박이성과 이삼봉 등 12, 13세 된 두 어린이가 땅에 엎어져 무수하게 난타를 당하여 유혈이 낭자함에도 주일을 지키겠다고 하여 주일을 지킬 수 있었다.

김제선이 앞장선 가운데 최춘택과 함께 노형달이 전도하였다. 하루에 두, 세 시간만 눈을 붙이고, 밤잠을 자지 않고 밤중에 다른 농장으로 가서 밤이 새도록 전도하다가 새벽이 되면 자기 농장으로 돌아와서 새벽 4시 반에 십장의 점고에 참석하였다. 이렇게 꾸준히 몇 달 동안 전도하여 김윤원, 이근영, 김성민 등 초초란 농장에 있는 동포는 거의 다 믿었고, 다른 농장에서도 믿는 이가 생겨나 교인이 17, 8명에 이르렀다. 

1908년 7월에 김제선이 속전 80페소를 지불하고 농주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어 초초란 농장을 떠났을 때 노형달이 최춘택과 함께 초초란 농장 교회를 섬겼을 것이다. 본 교회가 교회를 위하여 쓴 돈이 530여 달러나 되었으니 월급을 모두 헌금할 정도로 온 교인이 열심이었다. 

김제선이 1908년 7월에 64번가 428호에 집을 마련하고 생업을 이으면서 그해 10월 5일에 그의 집에서 예배드린 후 전도회를 조직하였고, 주일이면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렸다. 자유의 몸이 된 김윤원, 황명수, 방경일, 신광희, 정춘식, 이근영 그리고 조병하 등도 함께 했다. 이후 김제선이 각 농장을 다니며 복음을 열심히 전도하였는데 초초란 농장의 노형달도 함께 했을 것 같다. 이로써 1908년 말에는 교인이 100여 명이 되었다. 

1909년부터 농주들이 한인 노동자에게 외출허가를 주면서 노형달이 메리다 한인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해 초에 예배에 참석하는 수가 70명이 되었고, 3월에는 교인이 300여 명으로 늘어나 그해 4월에 메리다 시내에 한 집을 세내어 예배당을 세웠다. 

유카탄의 한인 노동자가 4년간의 계약이 끝나면서 1909년 5월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근영이 상항의 국민회에 한인의 생존과 보호를 요청하면서 여비조로 50페소를 보냈는데 국민회는 상항의 황사용과 나성의 방화중을 견묵위원으로 파송했고, 상항한인감리교회 청년회는 그들의 여비로 6달러 50센트를 지원하였다. 

그달 9일에 메리다에서 16개 농장에서 온 총대 70여 명이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결성하였고, 지방회 주소는 메리다 64번가 428호였다. 창립회원은 멕시코 한인 노동자의 삼분의 일인 314명이었다. 이때 김제선은 구제원에 선정되었다. 기타 임원에는 회장에 이근영, 부회장에 방경일, 총무 및 재무에 김윤원, 서기에 신광희, 학무원에 황명수, 법무원에 조병하 그리고 평의원에 김구현, 최정식, 이근하, 이국빈, 유진태, 김대선, 김성민, 김태진, 박선일이었다. 그런데 노형달의 이름은 임원 명단에서 찾을 수 없다. 

메리다 지방회가 결성된 지 3일이 되던 1909년 5월 12일에 지방회 회관 내에 메리다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했다. 그해 8월에 메리다 교회직원을 선출할 때 교사에 김제선을 선임했다. 그 외 교회 직원으로 집사에 김윤원, 김성민 그리고 이근영을 선출했다. 교회 직원명단에서도 노형달의 이름은 없었다.

방화중은 학교 등록을 위해 1909년 6월에 나성으로 돌아갔지만 황사용은 이듬해 1월까지 10개월 동안 한인 노동자의 법적 사항을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카탄 인근과 깜빼체 주의 농장들을 방문하면서 전도하였으니 메리다 교회에 큰 유익을 끼쳤다. 상항 한인감리교회는 메리다 교회와 계속 밀접한 관련을 유지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헌금했다. 

그런데 노형달은 감리교회와 관련을 가지지 않은 독립교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섬겼다. 서양교회의 후원이 없이 한인들의 독립교회이었으므로 전도사의 월봉이 없었다. 그는 단순히 의무적 봉사를 하였다. 그해 멕시코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한인들이 메리다를 떠나면서 그의 교회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1909년 11월에 메리다 노하칼 경찰소 사찰이었던 23세의 박행기가 별세하였고, 다음달 5일에는 한성 남서룡동에서 태어난 43세의 이준화도 세상을 떠나 별세의 슬픔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달에 이곳의 황면주가 그전의 과실을 회개하고 단체의 회원이 되기를 원하여 호유하고 동정을 보더니 얼마 못되어 동포 50인을 “유인하여 불의한 지방으로 가고자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메리다 지방회는 한인 경찰을 책정하여 황면주를 잡아 심문하였는데 그가 한인 내정을 정탐하는 일본 사람과 잠통한 사건이 탄로 났다. 그달 6일에 본 지방회는 임시회를 열고 그의 죄상을 설명한 후에 그를 봉토하니 하나하나 죄를 자복 받아 본 지방회 지방재판소에 보내 2개월 징역을 받게 했다. 그런데 황면주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두 명이 있었다. 15원 벌금에 처한 이근하 외에도 노형달이 있었다. 그는 17원 벌금에 처했다. 위의 황면주나 이근하가 노형달이 섬기던 독립교회의 교인이었고, 함께 했던 50여 명 중에 그의 독립교회 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벌금형을 받았던 노형달이 1911년에 메리다 지방회 구제원으로 선임되었으므로 그의 공인으로서의 평판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역자로서의 구제하는 마음을 인정받아 구제원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해 3월에 그가 메리다 지방회 구제원을 사면하였고, 그 대신에 방경일이 선정되었다. 오학기나 지방으로 이동하던 그해 11월까지 약 2년간 목회했다.

1911년 11월 17일에 메리다에 있던 동포 수백 명이 오학기나 지방으로 이동할 때 노형달도 함께 했다. 오학기나로 간 동포는 지방회를 신설하고 임원을 선정했을 때 노형달은 구제원에 선출되었다. 그날 선임된 직원에는 회자에 서현우, 부회장에 이종대, 총무에 이원석, 서기에 이기종, 법무에 최정식, 학무에 방경일, 외교에 황면주, 사찰에 임상준, 평의원에 이근영, 이국빈, 차용환, 방영화, 하오성, 대의원에 서병두, 유진태가 있었다. 노형달은 이곳에서 독립교회를 조직했다. 이들 지방회 임원 중에는 독립교회에 참석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듬해인 1912년 6월 오학기나 지방회는 구제원 노형달이 구제원을 사면하여 변윤행을 선정했다. 이날 총무 이환응도 사면하여 신봉권으로, 평의원 이홍식도 사면하여 김용수로 선출했다. 2년 후인 1914년 5월에 오학기나 지방회가 회무처리에 편리하기를 위하여 평의원 7인을 선정했는데 이기종, 고희민, 김성민, 강홍신, 이원석, 고희명과 함께 노형달이 선임되었다. 평의원으로 선임될 정도로 그가 대표성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게 된다.

그해 7월에 노형달은 2원 50전의 국민 의무금을 냈다. 이날 낸 명단은 장봉오, 서춘동, 방경일, 김봉룡, 엄주환, 김기수, 김명수, 이응섭, 이기종, 고명국, 서문경, 류순명, 문치호, 이광선, 김성식, 정자용, 이병권, 조여삼, 김광윤, 김철명, 강문형, 이병하, 이원석, 김성민, 김치운, 변윤행, 황인선, 김명치, 서병두, 최동완, 김기칠, 고의민, 이재경, 서병학, 김영화, 서원식, 김흥서, 이병헌, 서 윤, 이종태, 김봉섭, 김성택, 김덕수, 박용규, 최대현, 김영수, 김창현, 박순학, 윤은섭, 양명곤, 강흥식, 이상익, 이흥식, 문석근, 박운경, 장영식 그리고 이종헌이었다. 이들 중에서 그의 독립교회 교인을 찾을 수 있을 것같다. 메리다로 다시 돌아가던 1915년까지 그의 독립교회 목회는 4년간이다.

 

한인 감리교회와 관련 없이 독립교회 조직, 전도사 사역

오학기나 지방회 평의원으로 활동 1915년 다시 메리다로

 

1915년에 노형달은 오학기나에서 메리다로 다시 이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도 독립교회를 조직하고 섬겼을 것이다. 그해 12월에 선정한 명년도 메리다 지방회 임원에 노형달은 법무원이었다. 그 외 회장에 허 완, 부회장에 김경문, 총무에 서문경, 서기에 이기종, 재무에 김경문, 학무원에 강흥식, 구제원에 이기종, 외교에 오필선, 대의원에 김성민, 사찰에 박희성과 김성준이었다. 그리고 신나다 경찰소 법무 노형달이 사면하여 김용수가 대신하였고, 공석인 사찰은 김도치와 김갑봉으로 선택했다. 이듬해 말에 메리다에는 남자 248명, 여자 101명 (본토인 부인 42명), 소년 85명(본토 부인 소생 16명), 소녀 79명(본토 소생 16명)으로 총 513명이었으며, 유카탄, 감베체 등지에 200여명이 있었다. 명년도 평의원에 유진태, 이병원, 구여성, 김현기, 방경일, 이기종, 김영성과 함께 노형달이 선임되었다. 

노형달은 1917년에 해동학교 유지를 위하여 1원을 기부했다. 그 외 기부한 자는 정덕천, 강명원, 김기홍, 김재흥, 김삼여, 전경운, 공인덕, 이영순, 김명순, 김경문, 김인옥, 김기창, 이기선, 이경희, 오용호, 안영식, 강춘보, 백한성, 김윤여, 임병일, 이운환, 김상옥 정학용, 서정식, 김용서, 이세창, 김영성, 박창운, 장치현, 허제호, 이재성, 윤기서, 이봉춘, 안창식, 최덕수, 박순학, 김승민, 진광익, 양재은, 안잉용, 김성천, 최문순, 한국삼, 구여성, 양성일, 오원근, 김대복, 김성문, 배기화, 장석환, 정관수, 안동식, 김순여, 차용환, 박창식, 김근필, 홍익삼, 이돈의, 이승준, 오태환, 이기종, 최인구, 김승서, 김용수, 박일로, 이상운, 박상호, 김상복, 김준일, 하승천, 류인택, 김학철, 김영화, 이용순, 권덕순, 김태식, 서문경, 고명국, 이우식, 최  륜, 이원순, 라영원, 이돈하, 강흥식, 류진태, 최영진, 박두현, 박덕엽, 한명학, 이희택, 배태관, 김억석, 권치선, 박승준, 도창식, 김동수, 김상준, 참순재, 김덕순, 김승호, 이치운, 박춘삼, 양귀서, 장석호, 김천문, 박수남, 강재몽, 김정식, 이삼여, 조태화, 조길남, 박근배, 최춘택, 김영성 부인, 서문경 부인, 박경일 부인 권덕순 부인, 장윤익, 김창영, 최성호, 김광호, 김종완, 이순경, 변윤행, 서병두, 한종원이 있었다. 이 명단에서 독립교회 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해 4월에 유카탄 진성학교에 5원을 기부했고, 그해 11월에는 국민 의무금을 냈고, 이듬 해 8월에도 국민의무금을 냈으며, 1923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 대표 경비를 후원했다. 

1923년 5월 3일자의 신한민보가 ‘메리다 한인교회’라는 제하에서 “멕시코 메리다에 있는 한인교회는 연래로 재미있게 치리하여 오던 바 그 나라 혁명란을 인하여 재정상 공황으로 폐지되다시피 되었더니 최근에 와서는 당지 동포들이 이를 부흥시키려고 극력하는 고로 불원간에 이 교회가 다시 서게 될 희망이 있다하였더라”고 적었다. 이 교회가 메리다 한인감리교회로 보이나 노형달의 독립교회도 이런 상태에 있지 않았다 싶다. 그해 11월에 지방회장 김동순이 소집한 메리다 지방회에서 명년도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학무에 노형달이 선임되었고, 내지 수제 구제금을 낸 다음 달인 이듬해 2월에 학무였던 노형달이 사임을 청원하였다. 1927년에 인구세를 냈고, 1932년에도 인구세와 더불어 재만 동포 구제금도 냈다. 

신한민보는 1932년 12월 15일자에 노형달은 지난 28년간 한인(독립)교회에서 전도사로 복음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그가 병을 얻어 입원 치료하던 3월까지라고 본다. 두 달 후 5월에 모인 메리다 지방회는 치료비를 모금하여 부회장 노형달을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6개월 후인 11월 20일 오전 9시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별세 전 3일에 지방회장 유진태와 서기 이기삼에게 “너무도 형제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도리어 미안한 마음이 있으며, 또한 세상을 이별할 날이 불원한 즉 죽은 후에 감당한 부비를 사랑하는 형제에게 끼치지 말고 그전 북미실업주식회사에 주금 낸 것이 식리금을 병하여 묵화로 7백원인데... 1푼도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총회장 백일규 씨께 교섭하여 메리다 지방회에서 연종에 총회에 납부될 돈 중에서 환전하여 나의 감장한 부비를 보태여 쓰게 하소서” 하였다. 

damien.sohn@gmail.com

09.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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