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황성택(1891-1968)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황성택은 1891년 6월 10일에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 황성국 부부와 함께 14세가 되던 1904년 6월 1일에 콥틱호를 타고 통역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1912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하와이에서 상항을 거쳐 나성으로 이동했다. 

 

나성 한인장로교회 전도사

 

황성택은 1913년에 나성 한인장로교회에서 민찬호, 유성숙, 박동K, 김영훈과 함께 교회 지도자였고, 담임목사는 A. B. 프리차드 목사였으니 그는 전도사로 보인다. 1913년 11월 19일에 보고한 교회 통계에 따르면 그해 세례 받은 교인이 18명, 유아세례 받은 아기가 2명, 학습 받은 교인이 15명, 평균 예배 참석교인이 26명, 평균 주일학교 출석수가 10명이었다. 교회 나오는 학생 중 대학생이 4명, 고등학생이 6명, 초등학생이 9명, 야학생이 5명이었다. 그해 교회 일반 경비가 801.09달러였는데 선교에도 열심이어서 한국에 보낸 내지선교비가 191.77달러였고 중가주 다뉴바 교회에 35달러를 보냈다. 그해 성탄절 경비가 40달러였다. 그해 11월 18일 잔고가 113.26달러였으니 흑자였다. 

1916년에 중학교 4학년이었던 황성택이 1917년 7월 31일에 하와이에서 세계 제1차 대전 징집서류를 작성한 것으로 보아 그가 하와이로 이주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918년 10월에 다시 나성으로 이주하였고, 1920년 10월 27일에 나성에서 이에스더와 결혼했다.

 

힐스트리트장로교회 재무

 

황성택은 1921년 6월에 간도 참상에 후원했고, 이듬해 1월에는 쿠바 동포 구제에 참여했으며, 1924년 6월에는 유학생 유 덕에게 학자금을 보조하는 등 동포 사랑을 이어갔다. 

그런데 1924년에 나성 한인장로교회가 제직원을 신임하는 신임파와 제직원을 불신임하는 불신임파로 분립되었다. 소위 신임파에는 이살음 목사와 정지영 등이 있었고 그들은 ‘알리부 콜 2번지’의 건물로 이동하여 예배를 드렸다. 황성택은 불신임파에 속했다. 불신임파는 제직원이 없이 지내오다가 1924년 8월 17일 주일에 나성노회 대표 힐 목사를 모시고 ‘초목으로 지은 집은 불에 타되 은, 금,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에 타지 않는다’라는 다소 긴 설교제목의 설교를 들은 후 제직을 선정했다. 이때 황성택이 재무를 맡았다. 그 외의 제직원에 서기 한치관, 간사 김종옥이 있었다. 그날 선임된 제직원이 직원회를 열고 교회의 안전책을 토의한 후 9월 첫 주부터 ‘힐 스트리트 403번지’의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본 건물은 2년 계약으로 매삭에 40달러였는데 본 교회가 15달러를 부담하고 나머지 25달러는 노회가 보조하기로 하였다. 8월 마지막 주일에 한인교회가 41달러를 헌금하였고, 노회가 계약할 때 필요한 첫 달치와 마지막 달치로 50달러를 보조했다. 교인들이 이전에 한 헌금으로 예배당 의자를 마련하였다. 

위의 나성노회 대표 힐 목사가 한인교회의 일치를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자 나성노회는 4인 처단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회 회장인 프리차드 목사가 두 교회 대표를 불렀을 때 황성택은 힐 스트리트 교회 대표로서 한치관과 함께 출석했고, 참석한 알리부 콜 교회대표로는 이살음 목사와 안상학과 이범녕이었다. 그해 10월 12일 두 교회 교인 120여명이 나성에 있는 백인 임마누엘 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노회 처단위원회가 6개항을 발표하였으나 두 교회는 일치되지 못했다. 그 후 힐 스트리트 교회에는 한승곤 목사가 부임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학교도 따로 세워지게 되었다. 힐 스트리트 교회 한국학교는 실행위원에 황성택을 위시하여 한치관, 임지영, 박재형, 한승곤이 선정되었고, 교사는 김창만이었다. 

1926년 6월 13일 주일날에 산유(야외예배)가 있었다. “갑세다 산유를!”이라는 제목으로 신한민보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12시 30분에 교회에서 모여서 함께 이동하였는데 자동차가 없는 분도 염려하지 말고 오시라고 광고하면서 각기 점심뿐만 아니라 음료수도 지참할 것을 당부했다. 이날 산유 위원에 황성택 말고도 김혜란, 이영수, 박경신이 있었다.

 

나성한인장로교회 전도사, 나성한인감리교회 재무 유사 등 헌신

1949년 귀국 한국복음선교회 조직 6.25전쟁고아 돕고 교회개척

 

나성 한인감리교회

 

1926년 8월 19일에 상항 부쉬스트리트 감리교회에서 미국 남감리교 연환회가 있었다. 이 회의에 힐 스트리트 장로교회가 교단 가입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청원 위원장에 한승곤 목사였고, 위원에 김성권과 이영수였는데 황성택은 재무 및 서기였다. 이날 동양인 전도회를 창설하면서 힐 스트리트 장로교회의 가입을 허락하고 남가주까지 한인선교를 확장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는 북가주와 하와이는 감리교가, 남가주는 장로교가 동양인 선교를 담당하기로 체결한 양 교단의 체결한 협정을 반하는 결의로 보인다. 다음 달 12일 주일 오후 3시에 나성 한인감리교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황성택은 김성권, 박재형, 이영수와 더불어 유사로 선임되었고, 그 외 목사에 한승곤, 주일학교 교장에 박경신, 평신도 대표에 임정수가 선임되었다. 신한민보는 이로써 나성에는 세 한인교회가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듬해인 1927년 5월 본 교회는 한인 30여 호가 모여 사는 나성 서남쪽 중앙인 웨스트 37가 1548번지의 주택을 구매하여 예배당으로 개조했다. 주일이면 예배당으로 쓰고 주중에는 국어학교로 쓰고 밤에는 친목 모임을 운영했다. 본 예배당 관리인으로 황성택이 최능익과 함께 선정되었다. 그리고 권찰로 박경심과 이성례 부인을 선임하여 심방토록 했다. 

그해 11월경에 황성택은 부인과 함께 부친의 건강이 위독하다는 부음을 받고 귀국하던 길에 일본에서 부친 부고를 들었으니 안타까움은 형언할 수 없다. 1년간 한국에서 머무른 후 1928년 11월에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도미했다. 

그런데 1930년 10월 12일에 나성 한인예수교회의 버들롱 한인 예배당에서 감리사 데이비쓰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나성 한인예수교회가 미국 남감리교회로 변경되었고, 이에 나성 한인예수교회의 담임이었던 황사용 목사를 담임목사로 파송하고, 계삭회가 열릴 때까지 나성한인 예수교회 임원을 유사로 두기로 하였다. 그들은 황성택 외에도 강영승, 김성권, 곽림대, 임정수, 박재형, 박경신이었다. 

‘로벗슨 한인연합감리교회 80년사’는 나성 한인예수교회가 1924년 10월 14일에 나성 한인장로교회에서 독립한 자유교회이고 본 자유교회의 예배당이 버드롱 스트리트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 1926년에 미국 남감리교에 가입한 나성 한인감리교회에 대한 연구가 별도로 필요하다. 

1931년 1월 4일에 계삭회로 모여 감리사 데이비쓰 목사의 사회로 임원을 선정했다. 황성택은 유사로 선임되었다. 목사에 황사용, 지방전도사에 강영승, 임성택, 김 강, 평신도 대표에 최능익, 주일학교 교장에 김해반, 유사에 황성택 외에도 임정수, 곽림대, 박재형, 윤으로사, 박경신이 있었다. 

1938년 5월경에 주일학교 학생이 4, 50명에 달하였고, 청년들의 예배 참여가 늘어가므로 종래의 예배당 건축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배당 건축 기성위원에 황성택 외에도 임 폴, 김 x, 안필립, 이애마, 안수산, 이마리아, 윤으로사, 김필권, 황사용, 최능익으로 정하고 진행방침을 연구 토의키로 했다. 총예산은 15,000달러로 하고 전무책임자로 회장에 전경무, 영문서기에 이마리아, 국문 서기에 최능익, 재무에 황성택과 임폴로 하고, 건축예산위원에 김필권, 황성택, 최능익으로 선정했다. 

1938년 3월 24일 자 신한민보는 1938년 1월 25일에 황성택은 송자넷과 결혼식을 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들의 시민권 신청서류에는 1937년 6월 10일에 남가주 산타아나에서 결혼하였다고 적었다. 

1939년 3월 2일 자의 신한민보에 보도된 ‘나성한인감리교회 계삭회 결의안’은 다섯 항목이었다. 1. 본 교회 재무로 이경선 목사를 더 선정함, 2. 신축할 예배당 기기를 속히 매수키로 결의하고 이를 실행할 위원은 닥터 나인, 닥터 데비스, 황사용, 황성택, 전경무 5인으로 선정함. 3. 본국에서 일본 위정자가 그리스도 교인에게 귀신 즉 신사참배를 강제로 시키며 온갖 핍박을 행하는 사실을 들어 천하만국 그리스도 교인에게 선전키로 함. 4. 이상 선전공작을 재미한인 각 교회 연합 명의로 실행케 하기를 결의함. 5. 이런 합 공작을 성취하기 위하여 본교회를 대표한 실행위원으로 황사용, 최능익 양씨를 신임함. 위에서 황성택은 신축 예배당 기기 매수 실행 위원 중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1940년도 나성한인감리교회 임원이 1939년 10월 26일 자의 신한민보에 발표되었다. 목사 황사용, 부목사 이경선, 전도사 이창희, 권사, 김혜원과 최능익, 재무 유사에 황성택의 부인인 황자냇과 이경선 목사, 소유물보관 유사에 임 폴과 데비스 그리고 김광우, 속장에 임성택, 김관우, 황성택, 이마리아, 서기에 최능익, 영문서기에 황성택, 예배당 건축위원에 이창희, 김관우, 황성택, 이마리아, 최능익, 주일학교 교장에 이베티, 찬양대위원에 임메블과 이경선과 최능익, 청년부 위원에 김 인과 김숙자 이한나, 윤영애, 이매리, 최봉윤이었다. 

1942년 1월 황성택은 재미한국인 구제회를 조직하고 소록도 나환자를 후원했다.

 

황성택 목사

 

기존의 사역을 정리하고 1949년 11월에 황성택은 아내 송자넷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그해 서울 정릉교회를 개척하였고, 흥국형제단을 창립한 유재기 목사의 갑작스런 소천으로 황성택이 흥국형제단의 총재로 취임하여 농촌계몽 운동과 구제와 전도에 매진하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그해 9월에 황성택 부부는 도미하였다. 나성에서 모금한 후 황성택 부부는 귀국하여 1951년 8월 15일에 부산에서 한국복음선교회를 조직하고, 6.25전쟁고아를 위한 이사벨보육원을 설립하고, 이듬해 소년농장을 조성하고, 양정복음교회(현 양정중앙교회)를 개척했다. 1963년에 보육원을 경기도 시흥으로 이전하여 수풀원을 운영하고, 이듬해 복음학원을 설립하고 1965년에 부산 보육원 부지위에 황성택 부부는 신동혁 목사 부부와 함께 이사벨 중고등학교를 건립하였다. 1950년 초 나성에 거주한 이사벨 데이비스가 첫 아이를 낳았으나 반신마비가 되었는데 치료를 위해 받은 보험금을 한국복음선교회에 기부하였으므로 그녀의 봉사정신을 기려 그녀의 이름을 따 보육원과 학교 이름으로 사용했다.

황성택은 1968년 1월 18일에 향년 77세로 소천했다. 아내 황자넷은 1982년도에 향년 79세로 소천하였다. 묘비에는 각각 목사와 선교사로 직함을 표기했다.      

damien.sohn@gmail.com

0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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