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정인표(1888-?)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정인표는 1888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19살 때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 요꼬하마에서 캐나다 밴쿠버로 가는 시나노 마루 선박에 의지해 태평양을 건너 1907년 1월 9일에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내렸다. 그런데 캐나다 서부 해안 벤쿠버에 도착하여 경찰관의 주선으로 잡화점에 취업하면서 초등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상항 한인감리교회

 

정인표는 상항으로 이주하였다. 상항에 한인이 있기는 1903년부터다. 그해 9월 23일에 안창호, 이대위 등 10여 명의 정치 망명인과 유학생 그리고 소수의 한국인 상인들이 친목회를 조직하고 교인 숙소를 순회하면서 기도회를 시작하고 예배를 드렸다. 2년 후인 1905년 7월에 미국 북감리교회 태평양 일본 선교를 담당했던 헐버트 B. 존슨 박사가 전도회를 조직하고 문경호 전도사를 파송하여 예배를 드렸으며, 정인표가 도미하기 2달 전인 1906년 12월에 미국 남감리교가 한인 선교를 맡았고 태평양지역 동양인 선교지방 감리사이자 내한 선교사였던 이 덕으로 알려진 클라렌스 F. 리드 목사가 캘리포니아 스트리트 2350번지에 상항 한국인 교회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알았던 유학생인 양주삼 전도사를 파송하여 한국인 목회를 시작하였다. 위의 교회 건물은 3층으로 1층은 식당이었고, 2층은 예배당이었으며, 3층은 숙소였는데 이곳에 야학을 설치하고 밤에 영어를 가르쳤다. 정인표는 바로 이 3층 숙소에 기숙하였을 것이고 야학에서 영어를 공부하였을 것으로 본다.

정인표의 이름이 알려지기는 1907년 6월 21일 자의 공립신보에서다. 그달 15일 토요일에 상항 공립협회 회관에서 토론회가 있었는데 그는 임치정과 이병억과 함께 ‘기회 만세계’라는 문제로 연설을 하였고, 참석 회원의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이전에 공립협회에 가입한 것 같다. 다음 달 15일 토요일에도 그가 본 회관에서 전성덕과 함께 ‘나라의 강함이 군사로만 되지 않고 학사로만 돼 있다’는 가부 문제로 연설했다. 이러한 활동이 있었던 후인 그해 8월에 그가 공립협회 상항지방회 경찰원으로 선임되었다. 그와 함께 임원으로 선정된 자는 회장 최유섭, 서기 신영구, 사법부 조성학, 구제부 박용하 그리고 응접부 김길연과 박리선이었다.

1907년 7월 7일 주일에는 상항 한인감리교회에서 독일 명사 비스마르크의 사적을 연설하였으니 본 교회에 등록하고 청년회에 가입한 것이 분명하다. 이날 오대영은 ‘국가와 개인적 관계’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삭도 한인감리교회 예배인도자

 

1907년 8월에 정인표가 김유택과 윤경학과 함께 새크라멘토(삭도)가 기후가 적당하고 인심이 좋아 그해 10월에 삭도에 공립회관이 설립되는 대로 학생을 모집하여 공부하기를 꾀하더니 그달에 삭도로 이주했다. 그달 4일에 공립신보에 그의 “우리 청년은 기회를 잃지 말고 공부를 힘쓸 일”이라는 아래와 같은 기고문이 실렸다. 이 글에서 1905년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넘긴 을사늑약 이후의 한국인 크리스천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대저 국가라 칭함은 인민과 토지를 통칭함이라. 비록 토지는 있을지라도 산림천택에 기름짐이 없으면 국가의 부강을 이루지 못할 것이오. 또 인민은 있을지라도 사농공상의 직업이 없으면 그 토지를 보존치 못할지라. 그런즉 사업이라 하는 것이 국가에 관계됨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중요하뇨. 슬프다! 우리 본국을 바라보니 산림천택에 기름진 것은 세계 각국 중에 제일 될만하다 하겠으나 사농공상 사업 중에는 한 가지도 완전함이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를 보존하겠다 바라리오. 금일에 우리나라가 그같이 절박한 세운을 당한 까닭은 우리 인민이 기회를 좇아 분발 진취함이 부족한 연고라. 

우리 청년들은 내지에 있거나 외국에 있거나 시국에 절박한 것을 원통이 여기며 분개한 마음으로 촌음을 시경하여 공부에 열심하고 주의하는 것이 참 한국 청년의 급히 힘쓸 것이라. 이때를 당하여 장성한 자는 긴급한 실지 사무에 종사할 것이로되 연치가 아직 어린 자는 불가불 순식간이라도 허비치 말고 공부를 열심히 연구하여서 사농공상 중에 자격대로 성취하면 그 가운데 병정도 있을 것이요, 학사도 있을 것이요, 애국지사도 있을 것이요, 대장도 있을 것이요, 대신도 있을 것이요, 각색 모양 사람이 다 있어 완전한 국민을 이룰 터이니 그때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뉘가 빼앗으며 뉘가 침범하리오. 슬프다! 우리나라 독립을 찾을 자가 누구뇨. 우리 청년이 아니뇨. 우리나라를 부강케 할 자가 누구뇨? 우리 청년이 아니뇨. 우리나라를 위하여 싸움할 자가 누구뇨? 우리 청년이 아니뇨.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할 자가 누구뇨? 또한, 우리 청년이 아닌가. 우리가 이같이 중대한 책임을 맡았고, 또 이같이 귀한 청년의 기회를 당하였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기운과 시국을 원통이 여기는 열심과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으로 공부를 더욱 부지런이하여 우리의 목적을 속성하기를 바라고 두어마디 기록 하노이다.

 

1907년 삭도한인감리교회 예배인도자로 4개월간 사역

1918년 12월 미국 부인과 결혼 후 한인사회와 떨어져

 

그달 13일 삭도지방회는 정인표를 학무에 지명했다. 그의 막역한 친구 김유택은 서기였다.

삭도 한인감리교회가 창립되기는 1907년 10월 13일 주일이었다. 정인표는 김유택과 함께 이날 삭도한인감리교회 예배인도자로 부임했다. 1907년 10월 18일 자의 공립신보는 본 교회 창립의 정황을 아래와 같이 보도한다. 

“새크라멘토에 한인 회당이 설치된 것은 전 호에 기재하였거니와 금월 13일 오후 3시에 처음으로 미션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한인 참석한 이가 21인이오, 미국 손님이 18인이며, 감리사 이 덕 박사가 요한복음 15장 4절 뜻으로 영어 강도하고 양주삼씨가 한어로 번역함에 전 회가 대단 감동하였으며, 감리교회 부인전도회 회장되는 부인도 기쁜 것을 표하여 연설하였다하며, 불구에 한인 전도사도 정하며 야학도 설시한다는데 아직은 정인표, 김유택씨가 인도한다더라.” 

미국 남감리교회 태평양지역 동양인 선교 지방 감리사 리드 박사와 상항 한인감리교회에 파송된 양주삼 전도사의 지도하에서 정인표는 김유택과 함께 예배를 인도하며 목회하였다. 정인표가 삭도 지방회 학무가 되던 날에 더불어 선출된 회장 김경함, 부회장 신순만, 서기 김유택, 회계 윤경학, 경찰 임애종, 사법부 김중한과 우경식, 응접부 김윤태와 손동선, 사무원 김윤택 그리고 간사 우경식은 삭도 한인감리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같은 날 공립신보에 보도한 ‘삭도 야학’에서“서양 교사를 청하야 영어와 작문을 진실히 교수한다더라”고 보도하였다. 교회 사역에는 야학뿐만 아니라 토론회도 있었다. 같은 날에 양주삼 전도사가 다시 삭도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했으니 그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이날 양주삼의 방문에 황사용이 동행하여 삭도로 이주했으며, 새로 회원이 된 신영구와 함께 위의 3명을 위한 환영회가 있었다. 위의 황사용과 신영구가 본 교회에 출석하였을 것이다. 

1908년 1월 7일에 정인표가 삭도지방회 학무를 사임한 것으로 보아 삭도 한인감리교회 예배 인도자직도 사임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정인표의 교회사역은 1907년 10월부터 1908년 1월까지 약 4개월간이었다.

1908년 1월에 정인표는 상항으로 이주했고, 양주삼 전도사가 목회하던 상항 한인감리교회에 다시 등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4월 18일 토요일에 그는 상항에 거주하던 정한소의 병세가 위중함을 확인하고 그를 직접 데리고 86마일(138.4km)이나 떨어진 삭도로 갔고, 병이 위중하여 병원에 가지 못하고 한인 여관에서 치료하도록 했다. 그 후 그는 삭도 공립병원에 입원하였지만, 다음 달 11일에 이 땅을 하직하였다. 상항과 삭도의 한인들이 모금한 39달러 중 장비 22달러, 매장지 11달러, 표목가 75센트, 조화 75센트, 교통비와 체제비 4달러 50센트가 들었다고 장례식을 인도한 양주삼 전도사가 공립신보에 보고했다. 이날 학생 신분이었던 정인표는 50센트를 조의금으로 드렸고, 이러한 관계로 삭도는 목회의 연장선에 있었다. 

 

론돈에서 시카고까지

 

정인표는 1908년 9월에 박리선과 함께 켄터키주의 론돈에 있던 수베네트 교육대학에 입학했다. 그달 23일 자의 공립신보는 “어떤 서인 친구가 가신처에 소개하여 생소한 탄식이 없게 하였으며, 양 씨의 결심은 학업을 성취하고야 환국하고저 한다더라”고 그들의 의지를 보도했다. 본 대학은 미국 남감리교에 소속된 2년제 대학이었다. 

그런데 1910년 7월에 정인표가 결핵에 걸렸는데, 그달 27일 자의 신한민보는 다음과 같이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유학하는 정인표씨는 연래에 공부를 독실히 하더니 불행히 폐병에 걸려 현금 병원에서 치료 중인데 본래 학생의 신세라 수중에 있는 돈은 없고 불행한 병은 졸지에 고치기 난하여 그 곤난한 정형은 니루 형언할 수 없다하니 듯기에 긍측하더라.” 그런데 다음 달 8월 10일 자의 신한민보에 따르면 “...근일 통신을 거한 즉 의원의 진찰을 받은즉슨 폐염은 아닌고로... 병이 쾌복할 기망이 있는데 칼리포니아에 있는 동포들이 구제금을 보내어 그의 약비를 써가노라고 감사한 뜻을 많이” 말했다. 

정인표는 캔터키 론돈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 어느 대학원에 진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행적은 신한민보를 통해 두 번 알려졌다. 시카고로 이주한 이듬해인 1911년 12월 2일에 대한인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학무로 선정됐고, 1918년 12월 4일에 미국 부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고 시카고에서 거주했다. 당시 외국인과 결혼한 한인으로는 김성수, 김 경, 박대인, 김기술, 박봉령, 김창호, 전태호 그리고 황용성이 있었다. 그 후 그는 한인사회를 떠나 살았던 모양이다.   

damien.sohn@gmail.com

07.17.2021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