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임준기(1883-1954)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임준기(林俊基)는 1883년 9월 11일에 한국 평양 인근 용강에서 태어났다. 1925년 8월에 상항대학 전기과에서 공부한 임정기가 그의 동생이다. 임준기는 1899년 11월 18일에 고향 사람인 임광명과 결혼한 후 22세가 되던 1905년 5월에 하와이 노동이민자의 대열에 합류하여 아내와 딸 보배(마조리)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발하여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고, 곧 상항을 거쳐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리버사이드에서 모친상 소식을 들었던 1906년 6월 말에 아들 존이 태어나 희비가 엇갈렸다. 

 

나성한인장로교회 인도자

 

미국 북장로교 나성센트럴장로교회는 1906년에 580명의 교인을 가진 대형교회로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본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오거스터스 B. 프리차드 목사는 나성에 한인감리교회가 있었지만 나성이 넓어 이곳에 거주하던 100여 명의 한인이 한곳에 모이기가 힘든 점을 감안하여 나성한인장로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임준기가 장원근과 황사용과 함께 나성한인장로교회 예배 인도자로 선임되었다. 

임준기는 장원근과 황사용과 함께 프리차드 목사가 시무하던 나성 센트럴장로교회의 방 하나를 얻어 한인예배를 시작했다. 한인 30여 명이 한 주일에 두 번 모여 예배드렸다. 예배뿐만 아니라 야학을 설치하여 센트럴장로교회 교인을 교사로 초빙하여 15명가량의 한인이 매일 밤에 모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07년 1월 7일 자 공립신보에서 당시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나성한인장로교회 예배 인도, 나성센트럴장로교회 한인예배 시작

상항공립협회 시작 공립신보 발간,윌로우스지방회 조직 등 애국 

 

 

“로스앤젤레스는 캘리포니아 지방에서 제일 큰 도시요 또한 우리 동포 100여 명이 거류하는 곳이라. 연전부터 한 미이미교회가 있어 주일마다 모여 예배하거니와 그곳(나성)은 지방이 넓고 또한 많은 교우가 한 곳에 모이기가 불편하므로 여러 교인들이 염려하매 상천의 도우심으로 지난 동지날부터 또 한 교회가 조직되었는데 미국장로교회 목사 프리차드씨가 우리 한인 교우들을 사랑하여 자기의 예배당 한 방을 빌려 한 주일에 두 번씩 한인끼리 예배하게 하였으며 또한 그 교정에서 밤마다 야학교를 열고 일심으로 한인을 가르치는데 야학생이 15명가량이요 예배하는 교인이 30여 명에 가까운데 그 한인교회를 인도하는 이는 장원근, 임준기, 황사용 삼 씨라더라.”

 

임준기의 목회기간 최초의 환자는 김해준과 이태범이었다. 그들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907년 1월 초에 상항에서 나성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박영순이 경영하던 여관에서 머물면서 치료한 지 20여 일이 되었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동안 가진 돈을 다 써버린 바람에 수중에 한 푼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상항지방회가 그들에게 3달러를 기부했고, 나성지방회도 3달러를 그들에게 기부했다. 그 후 김해준은 차도가 있었으나 이태범은 병세가 위중하여 공립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을 섬긴 임준기의 목회를 상상할 만하다.

1907년 1월 2일에 학교가 개학하면서 확인한바 한인 학생이 14명이었고, 한인 야학생이 11명이었다. 이 중에 여러 명이 본 교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그해 3월에 김형관, 한주선, 김경선, 박응빈, 허 학, 최봉술, 이경준, 정창렬, 구두식, 박성준, 오봉두, 김춘만, 이현승, 이경조, 양사익, 이인식 등 16명이 나성으로 이주하였다. 이 중에도 얼마는 임준기가 섬기던 장로교회에 출석했을 법하다.

1907년 5월 11일에 공립협회 총회장 송석준을 위한 추도식을 열고, 그가 한인사회를 위하여 열심히 활동했던 시종을 기렸는데 공립협회 일반 회원들은 망극 애통하였다. 이튿날 오후 2시에 나성 뒷산에서 하관예배가 있었을 때 70여 명이 참석하였고, 백인이 남녀 8명이었으며, 마차 15채가 뒷산까지 이동했다. 장례식에 부조한 명단에 ‘나성교회’ 이름으로 부조한 백경태, 염세우, 이관식, 조태윤, 한형식, 이종찬 등 6명이 본 교회 교인으로 보인다. 

1907년 6월 21일 자 공립신보는 ‘장교신설’이라는 제하에서 “로쓰앤길리쓰 미국 댱로교회에셔 한인교우를 위하야 새로 미슌을 설립하였는데 조사 방화듕씨가 쥬쟝한다더라”고 보도했다. 이로써 임준기의 나성 한인연합장로교회 사역은 1906년 12월부터 1907년 6월까지 약 6개월이었다. 본 교회는 오늘날의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된다.

그런데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는 나성한인장로교회의 창립에 관한 다른 정보를 주고 있다. 1906년 초에 상항에 있던 방화중 전도사가 나성에 거주할 때 평양신학교 교장 마포삼열 목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방 전도사를 만났고, 이들이 미국 북장로교 나성노회를 방문하여 본 노회의 주선으로 프리차드 목사가 주관하여 나성 시내 벙커힐 2층 사가를 얻어 1906년 5월 10일 주일에 18명이 모여 창립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는 노회가 주관한 나성한인장로교회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고 보인다.

임준기의 나라 사랑은 특별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5년 4월에 도산 안창호, 송석준, 이 강, 정재관과 함께 1903년 9월에 조직한 상항친목회를 확대하여 공립협회를 창립하였고, 공립협회의 공식 신문인 ‘공립신보’ 창간에 협력했다. 1907년 1월에 그는 을사늑약을 통하여 일제의 보호국 체제하에 있는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비밀 경사대인 대한신민회를 창립했다. 고종이 이상설, 이위종, 이 준을 특사로 보내던 그해 7월에 임준기는 나성지방회 회장으로서 위영민, 강영대, 정등엽을 특별위원으로 선정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권 보호를 추진했다. 

 

엎랜드 장로교회

 

나성에 있던 임준기가 공립협회 사무원으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였을 때 방화중이 순회 전도사로서 섬기던 하변한인장로교회에 출석했다. 1909년에 그곳에서 임준기의 가정에 아들 피터가 태어났다. 

대한인국민회 엎랜드지방회를 돕던 김종걸이 귀국하자 임준기가 1911년 초여름에 엎랜드로 이주하였고, 그는 방화중이 순회전도사로 돕던 엎랜드한인장로교회에 등록하였다. 그해 6월 4일에 임준기의 가정에 딸 헤이즐이 태어났다. 엎랜드에 거주하였지, 임준기는 그해 10월에 인근에 위치한 클레아몬트의 한인지방회 회원이 되었고, 그달 14일에 클레아몬트 예배당 겸 학생양성소 낙성식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 본 지방회 학무 겸 대의원에 선정되었다. 

지난 3, 4년 동안 백인 사회에 쌓아둔 임준기의 신임으로 엎랜드에는 한인 노동자가 70여 명이나 되었다. 1914년 10월 7일에 임준기의 딸 임헤이즐이 민찬호 순회 전도사의 인도로 클레아몬트 한인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 2월 7일에 임준기의 부인 임광명이 백인 엎랜드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15년 봄에 임준기가 김인수, 박영순 그리고 현승렬과 함께 네바다 로간의 100에이커에서 참외 농사를 하였는데 그해 6월 6일에 딸을 출산했고, 9월에는 부인이 낙상하는 사고가 있어 희비가 엇갈린 해였다. 

1915년 11월 말 보고에 따르면 엎랜드 한인장로교회에 무보수 사역자가 2명이나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중의 한 명이 임준기일 수 있다. 그해 세례교인은 37명이었고, 평균 주일예배 출석수는 16명이었으며, 평균 주일학교 출석수는 22명이었고, 한해 총 헌금액은 57달러 67센트였다. 이듬해 6월에 엎랜드에서 딸 헬렌이 태어났다. 1920년 3월 15일에 백인 엎랜드장로교회는 임준기 부부를 위시하여 한인 52명을 교적부에서 지웠으므로 그 이전에 엎랜드를 떠났던 것이 분명하다.

 

윌로즈 감리교회 

 

1919년 4월, 임시정부 조직 경축회가 북가주의 맥스웰에서 있었을 때 임준기가 지방회 회장이었으므로 그의 맥스웰 이주는 그 이전이다. 그 후 그는 윌로즈로 이주했고, 1920년 2월 21일 오후 8시에 윌로우스 지방회를 조직하면서 그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4월에 아들 리차드가 태어났고, 그해 9월 26일에 임준기는 그의 부인과 딸 보배와 아들 존이 백인교회인 윌로즈감리교회에 등록했다. 그들의 등록번호는 443번부터 446번까지였다. 그해 임준기는 마춘봉과 함께 2,200에이커의 벼농사에 실패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희망을 품고 김종림 등과 함께 벼농사를 계속했고, 1923년에도 300에이커의 벼농사를 했다.

임준기와 그의 가족은 1924년 6월에 나성으로 이주하였고, 나성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하였는지 나성 한인장로교회에 출석하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교회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듬해 7월에 셋째 아들이 목에 탄실이 있어 수술하였지만 사망하여 큰 슬픔을 맞았다. 그러나 임준기가 한인 아동교육기관 기성발기에 참여했을 때인 1930년에 딸 임혜실이, 1932년에는 딸 헬렌이 팔리중학교에서 각각 우등으로 졸업하였고, 아들 피터는 자동차 뒤에 다는 트렁크식 물건 배달 스텐을 발명하여 발명가로 이름을 날려 위로를 받았다. 탬플 스트릿에 작은 식물상점을 운영하면서 생활을 유지하던 임준기가 1941년에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였고, 1954년 2월 6일에 향년 71세로 나성에서 소천하여 인근 앤절러스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

06.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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