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염달욱(1876-1933)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염달욱은 1876년 9월 15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에 고애나와 결혼하여 아들 윌리와 딸 루스를 두었는데, 혼자서 미국 유학차 호놀룰루(호항)를 거쳐 27세인 1904년 11월 25일에 상항에 도착했고, 이후 그는 왈터(Walter)로 통했다.

 

나성한인감리교회 설교자

 

1898년 2월에 프로렌스 셔먼 선교사는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해리 C. 셔먼 박사와 함께 내한했다. 셔먼 박사는 광혜원에서 의료사역을 담당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1900년 도미하였으나 그해 7월 25일에 향년 31세의 나이로 로스엔젤레스에서 소천하였다. 이후 셔먼 선교사는 두 자녀를 기르며 나성에 거주하던 한인선교에 투신하면서 자신이 출석하던 나성제일감리교회와 나성 인근 포모나제일감리교회의 ‘젊은부인해외선교부’ 등 백인교회로부터 기도 후원과 재정적 후원을 도모했다. 마침내 미국 남감리교 남가주연회는 셔먼 여선교사를 한인선교 책임자로 세웠다. 셔먼 선교사는 1904년 3월에 ‘사우스 힐 스트리트 1519번지’의 건물을 임대하고 한인기숙사와 한인 예배처소를 마련한 후 나성거주 한인들에게 기독교 가정을 만들고 한인이주자에게 직장을 알선하며 한인 유학생들에게 학업을 돕는다는 등의 목적을 세웠다. 곧이어 신흥우는 평신도 한인목사로 임명되었다. 신흥우는 25세가 되던 1903년 도미하여 이듬해 셔먼 여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남가주대학교 별과 학생으로 2년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아 셔먼 여선교사와 교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본 예배처소는 북미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인교회가 된다. 오늘날의 나성한인연합감리교회는 셔먼 여선교사의 한인교회가 세워진 1904년을 창립된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한인들은 주일 아침에는 나성제일감리교회 영어예배에 참석하고 곧이어 셔먼 선교사가 인도하는 주일학교에 참석했다. 주일오후 한인예배처소에서 한국어 주일예배가 있었다. 한국어 주일 예배에 신흥우가 설교했고, 셔먼 선교사가 설교하면 신흥우가 통역했다. 그런데 설교자로 신흥우뿐만 아니라 염달욱 외에도 홍승한, 김인제, 남궁염 등 한인 유학생이 활동했다. 

셔먼 여선교사는 주일예배와 주일학교 외에도 토요일 엡윗 청년회와 금요일 성경공부반을 운영하였다. 셔먼 여선교사에게서 예수를 믿고 한국에 있는 가족을 전도한 자들도 있었다. 한인 노동자들도 몇몇 있었지만, 교인들은 거의 유학생이었는데 모두 미국인 나성제일감리교회에 등록하였다. 

그리고 매일학교를 개설하여 셔먼 여선교사가 교장이 되고 한국인 유학생들이 교사가 되어 한인들을 가르쳤다. 이 매일학교는 여름방학 때 정규 학교제도를 가동하였는데, 남가주대학교, 중고등학교(Academies)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유학생이 이 매일학교에서 공부하면 한, 두 학년을 월반할 수 있었다. 본 매일학교가 학교 내에 ‘고용부’를 두어 학교재정을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한국교회의 삼자운동을 연상케 한다.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한인 유학생들은 노동하면서 생활비를 조달했고 기숙사비도 납부할 수 있었다. 기숙사생은 한인이민자가 나성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구매하여 자취하였다. 셔먼 선교사 가정과 함께 임대한 건물에 여러 한인이 거주하였는데 염달욱도 있었을 것이다.  

신흥우가 1906년 1월에 평신도 목사직을 사임하고 김우제가 그 뒤를 얼마간이었던 것 같고, 곧바로 신흥우가 다시 교회를 섬겼다. 이런 가운데서도 염달욱의 설교자직은 변함없었다. 

1907년 남가주연회는 한인 예배처소가 부흥한다고 보고하였다. 그해 대구에서 서상돈과 김광제가 국체보상취지서를 내고 2000만 동포가 매삭 담배값 20전을 모아 2,000여 원을 모금하였음을 보고 염달욱이 박형모, 남궁염, 신봉희와 함께 애국하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국체금 1300만 원을 갚자고 1907년 4월 26일 자의 신한민보에 호소했다고 하니 그의 나라 사랑을 엿보게 된다.

나성 한인사역은 ‘일본사역’하에 있었으나 ‘나성도시선교회’의 별도 사역으로 구별되었다. 1908년에는 '나성도시선교회' 외에 남가주대학교 이사 A.W. 애드킨슨 박사와 남가주연회 감독이 협력하였다. 당시 재적수는 17명이었다. 한 달 건물 대여비가 18달러였고, 셔먼 여선교사의 한 달 사례비가 25달러였던 반면에 신흥우의 한 달 사례비는 20달러였다. 이로써 한인 사역에 필요했던 예산은 한 달에 60달러였고, 1년에 756달러에 이르렀다. 미국 남감리교의 ‘내지선교부’와 ‘교회연장부’ 등 두 기관이 285달러를 보조했고, 그 외는 ‘나성도시선교회’가 후원했다. 그리고 기숙사비는 교회 운영비로 사용했다. 그 해 나성의 헌트 부인은 비록 가난했지만 ‘주머니’를 손수 만들어 판매한 수익금을 한인전도를 위하여 헌금하여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해 12월에 상항한인감리교회가 발간한 대도보에는 “로스앤젤니스 한인 미이미교회(나성한인감리교회)는 미국에서 제일 먼져 셜시된 한인교회라 비록 교우는 만지 못하나 범사에 재미잇게 지낸다더라”고 보도했다.

1909년 1월 16일 주일 밤 교회 재정조사라는 이유로 구타하고 옷을 찢는 등 예배당에서 난투가 일어났다. 그해 봄 미국 남감리교 남가주연회는 재정부족으로 한인사역을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한인 교인들이 의연금을 모아 신흥우 등이 계속 사역하게 되었다. 

나성 한인사역이 1909년에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연회로 이임되어 연회 감독인 존 W. 와드만 목사는 한인사역을 위하여 300달러의 예산을 청구하였다. 이듬해 예배처소가 ‘매그놀리아 애비뉴 1620번지’로 이전했다. 그해 염달욱은 자동차 부속품 상점에서 판매원으로 활동하면서 나성 ‘메이네스 애비뉴 1540번지’에서 13세 된 아들 윌리와 살았다. 그해 3월에 나성에서 농산물경영회사인 권업 동맹단이 조직될 때 단장 오 운과 함께 염달욱은 서기였다. 1914년 7월에는 3만 달러의 자본금을 모았으나 권업 동맹단은 실패했다.

신흥우는 문학사를 받은 이듬해인 1911년 4월에 귀국했다. 민찬호 전도사의 나성 이주가 1911년 3월인데 그의 부임은 아무리 빨라도 그해 4월이다. 염달욱의 설교자직은 나성에 도착한 때가 1904년 12월이면 1911년 3월까지 6년 6개월로 보이고, 그의 이름이 국체보상취지서와 관련하여 처음 공립신보에 나타날 때인 1907년 4월부터라면 4년간이다. 

그런데 설교자였던 염달욱이 전도사로 선임된 것으로 보인다. ‘로벗슨 한인연합감리교회 팔십년사’는 “그 당시 설교자로 수고하던 분들이 바로 신흥우 선생, 김인제 전도사였고, 그들이 귀국한 후엔 염달욱 전도사가 수고했다. 그 후 1911년 3월 3일 민찬호 목사가 하와이에서 공부차 나성으로 오게 되었고 나성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잠시 교회를 맡았었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염달욱의 전도사직은 신흥우가 귀국하던 1911년 3월부터 민찬호 전도사가 부임하던 1911년 4월까지로 1달이다. 그런데 민찬호가 1912년에 나성한인장로교회로 전임하면서 나성한인감리교회는 사실상 문을 닫게 된다. 

 

나성한인감리교회 설교자 전도사로 짧게 사역후 상항이주

나성으로 재이주 집사 재직, 신흥국어학교 교장으로 섬겨 

 

 

상항한인감리교회

 

1911년 6월 28일 밤에 염달욱이 나성 동포를 나성한인감리교회 예배당으로 초청하여 ‘나성 동포의 친목회를 열고 슬픈 회포를 위로하며 친애하는 정을 더욱이 도탑게 하였는데’ 그가 상항으로 이주하기 전에 가진 나성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아닌가 싶다. 

1915년 추수감사절은 그해 11월 25일에 있었다. 그날 저녁 8시 30분에 옥 스트리트에 있던 한인 예배당에서 각 교인이 과일 한 그릇을 가지고 와서 감사절 예배를 드렸는데 염달욱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날 순서에서 본 교회 중직자의 이름과 맡은 순서를 발견할 수 있다. 강천명의 기도에 이어 찬미, 염달욱의 감사의 뜻, 이대위 목사의 성경봉독, 조기호의 설교, 고아원 여학생의 찬미, 부인 하명원의 물질적 감사에 대한 연설, 부인 임애성의 신령적 감사에 관한 연설, 이성식의 창가, 강영소의 연설, 김승현의 음악, 이대위 목사의 폐회축사로 이어졌고 다과회가 있었다. 이듬해 11월에는 상항 청년회가 원산 학생을 후원하는 기부 행사가 있었는데 염달욱은 1달러를 냈다. 

 

나성한인장로교회 집사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장 도산 안창호가 멕시코 여행을 떠나기 직전인 1917년 9월 26일 저녁 8시 30분에 나성 지방회 회관에서 전별회가 있었는데 염달욱이 마지막 순서인 재담을 맡았으므로 그가 1917년 9월 이전에 나성으로 이주한 것이 분명하다. 

민찬호 전도사를 이어 임시 전도사로 홍치범이 나성한인장로교회를 섬겼고, 염달욱은 집사로 선정되었다. 1919년 9월 25일 자의 신한민보는 나성한인장로교회의 부흥을 희망하면서 재류 동포가 100여 명인데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장년 교우가 40여 명에 이르고 예배당은 이전보다 일층 더 편리하게 설비되었음을 보도하면서 교회직원으로 순행전도사 홍치범 외에 영수에 노진국, 박일우, 염세우, 집사에 정인영, 정지영, 염달욱, 조성환, 주영한, 전 진 그리고 권찰원에 김이선, 박순애, 임화연을 소개했다. 1920년 3월 1일 제1회 독립선언기념회가 있었을 때 제1부는 홍치범 전도사의 개회로 시작하여 염세우의 임시 정부 헌법 낭독 후에 염달욱이 축사를 낭독했다. 

나성에서 요리사로 활동하던 염달욱은 1921년 4월 26일에 호항으로 이주했고, 그달에 하와이 한인교민단 서기 겸 재무에 선임되었다. 그는 호항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1923년 7월에 교회 부속 신흥국어학교가 설립되면서 그달에 하와이 감리교 한인부가 한국어 교과서편찬위원회를 조직할 때 현 순 등과 함께 염달욱이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누아누 청년회관에서 각 교회와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할 때 염달욱이 서기에 선임되었다. 릴리하 국어학교 목공이었던 염달욱이 그해 10월에 그의 딸 루스와 함께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염달욱은 1925년에 신흥국어학교 교장이 되었다. 교사 2명에 50명의 학생이 등록하였는데, 오아후섬에 6개의 한글학교 중 신흥국어학교가 가장 컸다. 황사영, 현 순, 홍한식에 이어 드루 신학교에서 공부한 변홍규가 호항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부임했으나 2년 만에 만주 선교를 위해 떠나고 임두화가 부임하던 1930년에 염달욱은 세탁소를 경영했다.

1933년 6월 13일에 염달욱이 운전하던 자동차가 우연히 길가에 쓰러지는 바람에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향년 57세에 소천하여 호항 누아누 기념공원묘지에 안장됐다. 몇 주 전에 결혼한 딸은 부친상을 당하여 신혼의 기쁨을 망각하였다고 한다. 

damien.sohn@gmail.com

05.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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