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박동규(1883-)


박동규(Pak, Dong Kiu)는 1883년경에 한국 풀무골에서 태어났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있던 풀무골인지, 황해도 서흥군 목감면에 있던 풀무골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21세가 되던 1904년 11월 6일에 일본 고베에서 코리아 선박을 타고 그달 18일에 단신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레들랜드 한인감리교회

 

박동규가 남가주 레들랜드에 거주하기는 1906년이었다. 이듬해 11월에 최병찬이 ‘동포 후의를 감사하는 광고’를 아래와 같이 신한민보에 냈다: “본인이 지식이 없는 고로 평일에 남을 의심도 하고 시비도 하여 동포를 사랑할 줄을 모르고 지낸 탓으로 지금에 불행한 병을 2만리 타국에서 얻었으니 내 생각하면 당연한 죄벌로 객지 고혼이 되어도 마땅하거늘 여러분 동포는 진실한 사랑으로 이 같은 죄인을 구제하시는 대의로 땀구멍으로 나온 돈을 다수히 연조하여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여주시니 처음 동포의 은혜 태평양과 같이 깊습나이다. 첨위 동포의 방명을 자에 광고하여 세상에 나와 같이 동포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깨닫게 하옵나이다.” 이 광고에 따르면 공립협회, 업랜드 동포, 핫스프링 동포 외에도 24명이 총 124달러 75센트를 기부하였는데 박동규는 거금 5달러를 후원하였으니 동포 사랑이 남달랐다. 

1909년 1월 레들랜드 한인감리교회는 다년간 교회를 목회하던 이경의가 나성으로 이주하고 전효택이 그의 뒤를 이었다. 본 교회 교인들이 교회를 영구 유지하기 위하여 매년 헌금을 하였는데 박동규는 매년 5달러를 헌금하였는데 교회 사랑이 특별했다. 그 외에도 이경의, 안석중, 김창운, 정도만, 차춘택, 조강석, 이무경, 박창호, 전효택, 윤태영, 김희복, 장원국, 황보우, 류재록, 정규만, 이윤오, 최득규, 이영수, 이원길, 박충섭, 안상학, 이운선, 김용호, 이능백이 헌금을 하였으니 이들이 당시 본 교회 교인 명단으로 보면 된다.

그해 2월에 레들랜드에 거주하던 정두만이 신병으로 치료 중이었다. 이곳에 거주하던  동포가 수시로 위문하고 청년 회원 제씨가 병비를 연조하였다. 이에 정 씨가 감사한 뜻을 기록하여 신한민보에 보냈는데 총 21명의 후원자 명단에 박동규도 있었다.

 

솔렉 한인교회

 

1910년 1월 12일 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이광윤이 중심이 되어 솔렉 한인교회를 창립했다. “우리가 새해를 당하여 동포사회에 새로운 일을 연구할 새 일반 동포의 도덕심을 배양하기 위하여 이곳에 미슌을 설립하기로 당장 연조된 것이 3, 40달러에 달하였사오니 첨 동포는 이일을 힘 미치는 대로 찬조하여 주심을 바라나이다. 구주강생 1910년 1월.” 헌금한 자는 박동규 외에도 이광윤, 정태은, 박호빈, 김병학, 김금식, 강천명, 이상길이었고, 미슌의 이름은 콜레지에트 인스티투트(Collegiate Institute)였다.   

 

나성한인장로교회 전도사

 

박동규는 1913년에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민찬호, 유성숙, 황성택, 김영훈과 함께 교회 지도자였고, 담임목사는 A.B. 프리차드 목사였으니 그는 전도사로 보인다. 전도사로서의 그의 활동을 찾기란 힘들다. 그런데 그가 전도사로 있던 1913년 11월 19일에 보고된 교회 통계에서 당시 교회의 규모를 짐작한다. 그해 세례교인이 18명, 유아세례 받은 아기가 2명, 학습 받은 교인이 15명, 평균 예배참석 교인이 26명, 평균 주일학교 출석수가 10명이었다. 교회 나오는 학생 중 대학생이 4명, 고등학생이 6명, 초등학생이 9명, 야학생이 5명이었다. 그해 교회 일반 경비가 801.09달러였는데 한국에 보낸 내지선교비가 191.77달러였고, 중가주 다뉴바교회에 35달러를 보냈으므로 선교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해 성탄절 경비는 40달러였다. 그해 11월 18일 잔고가 113.26달러였으니 흑자였다. 

1917년 9월 6일 자 신한민보는 ‘버선 한 짝에 정이 들어 청년의 귀한 생명을 미리 끊은 김덕준’이라는 제하의 다음의 글을 실었는데 이 글을 쓴 박동규의 착한 마을을 읽게 된다. “일진광풍에 흔들려 떨어지는 꽃이 기왕 떨어지기는 일반이라. 풀 자리에 떨어지는 것이 어떠하여서 공교롭게 통 시간에 떨어졌나? 옛사람의 낙화를 위하여 탄식함이 실로 김덕준을 경계하여 비유를 베풀어 놓은 것이라. 그러하니 김덕준은 이의 통 시간에 떨어진 꽃이라. 다시 돌아볼 가치가 없거니와 만일 장래에 김덕준을 따르는 자가 있다하면 이 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정든 일해에 횃불을 들어줌이 가할 지라. 김덕준의 죽은 소식은 전보에 간략히 보도하였나니 일반 청년은 김덕준이 무엇을 위하여 죽은 것을 아느뇨? 김덕준은 본시, 아름다운 청년으로 미국에 들어온 지 수년에 자수로 벌어서 소학을 졸업하고 또 그 외모가 반주 그러하게 생겨서 남이 밉지 않게 보던 터이니 총히 말하면 장래가 많은 청년이라. 그 후 차차 벗도 아시는 대로 방탕한 길로 들어가기를 시작하여 몸을 단장함으로 공부를 폐하고 돈 잘 쓰기를 내여 중국인 시가에 잡화상점을 열고 버리고 앉았다가 죽을 임시 한주일 간에는 몸이 바싹 달아서 영업을 폐하고 돌아다녔더라. 8월 25일은 자살하던 날 밤이라. 동포 박동규씨가 김덕준의 점방을 찾아가 본즉 불은 켜놓았는데 사람은 없는지라. 그 이튿날(일요일) 아침에 다시 가본즉 간밤에 켰던 불을 껐으니 사람이 있을 듯한 데 김덕준은 없는지라. 이상히 여겨 김덕준의 처소를 찾아가서 문을 두르리니 그 곁방에 있는 중국인 노파가 슬리퍼를 쓸쓸 끌고 나오며 ‘힘따이’하는 지라. 깜짝 놀라 문틈으로 엿보니 ‘힘따이’가 참 말인 듯한지라. 빨리 돌아와서 박재형, 서학빈, 이영수 등 제씨를 청하여 가지고 가서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본즉 네 활개를 쩍 벌리고 침상에 가로 누었으니 애가 타서 돌아다니는 이 사람이 어찌 이러한 곤한 잠이 있으리오 가히 탄식할 일이로다. 한 주일 동안 뻣석 달았던 몸이 어찌 밤에 벌써 써늘하게 식었더라. 곧 순사를 청하여 앞세우고 방 안에 들어가 자세히 살펴본 즉, 8연발 피스톨이 침상 끝에 떨어져 있고 영서 편지 두 장이 책상위에 놓였으니 이것이 그 죽은 사정을 기록한 유묵이며 깜빡이는 석유 등불은 인간 정애에 취하여 그릇 죽은 원혼을 불쌍히 여겨 밤새도록 그 아득한 길을 밝혀 주고 날이 밝은 이 때에는 태양 정기에 질려 거의 꺼지게 되었더라. 시신을 살펴본즉 단총 1발이 복부를 뚫었으니 이것이 치명상인 듯하고, 영어편지 두 장을 펴본즉 한 장은 선우탄 씨에게 보낸 것인데 그 대지가 점방을 팔아서 신후사를 말키여 달라하였고 또 한 장은 피봉에 ‘미쓰 에이 엔 윌리암쓰, 553 1/2  East Central Avenue’한지라 그 편지를 펴 본즉 하였으되 ‘나의 온갖 애정을 다 너에게 주었는데 오늘날 허지로 돌아간지라. 바라건대 천당에 가서 반가이 만납시다’ 하였더라. 이렇게 죽고 천당에 가기를 바란 것은 최후에 하나님을 의지함이니 그 아득한 정을 위하여 불쌍히 여길만하도다. 이 편지 한 장으로 그 죽은 이유를 밝혀 증거하고 그 유해를 거두어 동 27일 하오 2시에 안장하였는데 목사 민찬호 씨가 예를 주장하고 나성 지방회장과 동포 30여인이 호송하니 그 죽은 뒤가 과히 적막치 아니하더라. 그 선후사는 유족에 의하여 선우탄, 박동규, 이 일 3씨가 맡아 전방과 유물을 경매 하에 부쳐 생전 채무를 전담케 하였는데 들은 즉 김덕준 행장에서 그 여자 윌리암의 버선 한 짝 속옷 한 벌을 발견하였다 하니 냄새나는 버선과 땀에 젖은 속옷을 얻어오기에 숫한 정신과 숫한 돈을 없이하였을지라. 장래가 만리 같은 청년이 살빗 달은 여자에게 속아서 버선 한 짝에 목숨을 끊는 것은 과연 죽은 자를 위하여 부끄러운 일이니 일반 열없는 청년은 이를 보고 맹렬히 깨닫을 만하더라.”

박동규의 착한 마음은 1918년 3월에 이경의에게 치료비에 쓰라며 낸 기부금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동족을 사랑하면 우리 적십자회에 응모하시오’라는 신한민보 광고에서 그가 2달러 50센트를 기부함에서도 그의 착한 마음이 보인다. 

 

교회에 거대 헌금 많이 하고 나성한인장로교회 전도사로 사역

나라사랑 동포사랑 돋보여...1950년대까지 뉴욕한인교회 출석 

 

 

그 후 박동규는 중가주 스탁톤으로 이주했다. 1920년 3월 23일 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로타이에서 한인과 일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큰 길에서 총질이 나서 백인 한 사람이 사망한 일로 박해수가 스탁톤 지방 배심원에 고소를 당하였으나 그 백인이 일인의 총에 맞은 증거가 확실히 드러나 무사하였다. 그런데 박해수가 그 일인을 죽이려던 살인미수와 평화질서 방해로 고소를 당하였으나 박해수의 정당방위가 입증되어 3월 19일에 풀려났고, 박해수가 위험한 무기를 남몰래 휴대하였다는 지방검사의 기소도 해결되었다. 박해수 씨의 재판사건 후문에 따르면 “특별히 박동규 씨의 민첩한 경위분석”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1920년 4월 25일 하오 2시 30분에 스탁톤에서 부인전도회 제 3회 창립기념 축하식이 있었다. 임애성과 방살로매의 창가로 개회하여 강문선의 개최 취지가 있었고, 전진영의 역사 진술이 있었으며, 방살로매의 독창이 있고 난 뒤에 임애성의 유력한 연설이 있었는데 일반 청중에 대단한 감격을 주었으며 이어 방청석으로부터 부인전도회를 돕자는 뜨거운 말이 나와 여러분이 중지를 기울여 의연을 하였다. 이때 박동규는 5달러를 후원했고, 위에 소개한 박해수는 15달러를 후원했다. 그 외에도 김영훈 등 여러 명이 당일 기념식 실비를 부담했다. 

1921년 6월에 간도 참상 구제금을 거두었는데 총 223달러 50센트였다. 박동규는 이때 3달러를 기부했다. 그해 9월에 중가주에 거류하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특별외교비를 납부하기로 가결하고 수전위원회를 구성하였을 때 박동규는 윤병희와 함께 중가주 리들리 위원으로 선정될 만했다.

1921년 11월에 리들리에서 박동규는 이희천과 함께 풀방과 담배전을 경영했다. 그런데 1924년 5월 18일 일요일 저녁에 예배드리러 간 사이에 박동규가 경영하는 리들리 상점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했다. 손해가 약 1만 달러에 달했으니 손해가 막심했으나 다행히 화재보험으로 6천 달러를 받았다.

본적을 평안남도 강서균 증산면에 두고 다년간 뉴욕에 거류하든 동포 차병학 씨가 불행히 심장병을 얻어 갑자기 1931년 11월 1일 저녁에 별세하였다. 같은 달 7일 오후 2시에 윤병구 목사 집례 하에 동포 20여 명이 모여 엄숙히 장례식을 지냈다. 그달 19일 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박동규가 일면식이 없는 차병학 씨의 장례를 위하여 거금 5달러를 보냈으니 그의 소외된 자에 대한 착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그런데 1933년 7월 27일과 그해 8월 24일 자의 신한민보에 연거푸 권종흡이 “사랑하는 형제께 고함”이라는 제하에서 “같이 늙어가는 터인즉 늙은이의 노동생활이 극난한 것을 잘 아시겠기로 세음조 있는 형제에게 고합니다. 김병규 10원, 이병학 189원, 이성창 100원, 유진익 40원, 박동규 100원, 윤병희 128원, 진영규 10원, 장유문 23원 25전. 이상 여러 형제의 번지를 일일이 알지 못하는 고로 광고합니다. 세음조를 보내주신다면 보조해주신 것같이 감사하겠나이다”라고 광고하였다. 그런데 박동규가 권종흡에게 100달러의 빚을 진 것 같다. 

1942년에 박동규가 독립금으로 5달러를 기부했던 곳이 뉴욕이었으므로 뉴욕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뉴욕한인교회 70년사는 그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뉴욕한인교회 세례교인이었음을 적고 있다. 그 후 그의 행적은 찾기 힘들다.

damien.sohn@gmail.com

05.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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