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노진국(1889-1966)


노진국(盧眞國)은 1889년 9월 15일에 한국 이천 은순동에서 노YK와 한메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이름 메리를 볼 때 당시 감리교회가 여자 교인에게 세례명을 주었으므로 노진국과 그의 부모가 감리교인이었던 것 같다. 고향에서 함께 살던 외삼촌 30세 한치춘과 26세 외숙모 그리고 3세 외사촌 동생 한봉영과 함께 노진국은 1905년 4월 27일에 일본 고베에서 시베리아 선박을 의지해 다음 달 8일에 호놀룰루(호항)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그는 데이빗(David Chin Kook Ro)으로 통했다. 

노진국의 이름은 1913년 10월 17일 자의 신한민보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그 해에  로스앤젤레스(나성)에서 소학교 7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당시 나성에는 여러 한인 학생이 있었다. 나성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민찬호가 대학문학과 3학년, 김관유가 의학과 1학년, 이광윤이 공학과 1학년, 조병진이 중학측량과 4학년, 정윤교가 공업과 3학년, 박진섭이 공업과 3학년, 이건영이 공업과 1학년, 채한홍이 종교학원 중학교 1학년, 김경순이 여자소학교 8학년, 이태봉이 소학교 7학년, 정영도가 소학교 5학년, 이경복이 소학교 3학년, 이태복이 소학교 2학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 안필립이 소학교 2학년, 송메리가 여자소학교 2학년, 송애나가 여자소학교 1학년, 전장손이 소학교 1학년이었다. 

나성한인장로교회를 섬기던 방화중 전도사가 부친의 소천 소식을 듣고 1912년 2월 초에 귀국하자 민찬호 전도사가 본 교회 목회자가 된다. 민찬호 전도사는 하와이에서 교회를 돕다가 신학공부를 할 목적으로 1911년 3월에 나성에 정착했고, 나성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나성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는데 방화중의 귀국으로 나성한인장로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민찬호 전도사가 나성한인장로교회에 부임하면서 나성한인감리교회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고 사실상 교회모임이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노진국뿐만 아니라 이들 대부분이 나성에 한인교회로서는 하나밖에 없었던 나성한인장로교회에 출석했을 것이다. 

노진국은 1916년 2월에 나성에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오늘날로 하면 9학년이다. 신한민보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나성에서 공부하던 한인학생은 총 28명이었다. 대학생이 3명이었고, 중학생은 10명이었으며, 소학생은 10명, 유치원생 2명 그리고 미슌 전문학교, 기독청년회 특별과, 신학교에 각각 1명이었다. 

그해 6월에 노진국이 유년 하기강습소에 50센트를 기부한 것으로 보아 유학생 처지에 돈이 아쉬웠을 텐데 어린이 한국어교육에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1917년 6월에 노진국은 남가주대학 부속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나성에서 공부하는 한인유학생이 총 18명이었지만 남가주대학 부속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자는 노진국 한 사람뿐이었다. 그해 10월에는 노진국이 신한민보사 가옥채 보상금으로 1달러를 기부했다.

1918년 6월에 노진국이 나성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해에 미국 전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한인학생은 정매리앤, 문또라티, 임보비, 김경순, 김누디, 정등엽, 채한홍, 노신호, 조정환 등 9명이었고, 그를 포함하면 10명이 되었다. 그해 대학교 졸업생이 9명, 소학교 졸업생이 7명이었으므로 총 26명이었다. 그달 21일 저녁 8시에 나성에서 졸업한 대학생과 중학생 그리고 소학생 6명을 위하여 나성지방회, 나성한인장로교회, 흥사단, 부인 친애회, 청년회, 학생회 등이 연합으로 나성한인장로교회 예배당에서 식당을 꾸미고 졸업생 축하회를 개최했다. 이날 노진국은 채한홍과 함께 중학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하였다. 

그날 축하회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일동이 애국가 1, 2절을 부른 후 한인복음전도회 목사 한승곤이 기도하고, 지방회장 이영수가 취지를 설명하고, 박리근과 강영각이 ‘표도가’를 부른 후 나성한인장로교회 전도사 민찬호가 축사를 했으며, 강영각이 나팔을 연주하고, 소학졸업생 윤계은과 중학졸업생 노진국과 채한홍이 졸업생 답사를 했으며, 강영각의 풍금에 따라 한장호가 “도덕을 배우고’를 불렀으며, 여학생 김경순과 중학교 졸업생 정등엽과 대학교 졸업생 김관유가 각각 졸업생 답사를 하였으며, 강영각이 나팔을 연주하고, 지방회 학무원 한승곤 목사가 상품을 수여하였으며, 졸업생들이 애국가 3절과 4절을 부른 후 다과회가 있었다.

 

오하이오 아크론한인장로교회

 

나성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노진국은 오하이오주 아크론으로 이주했다. 이듬해 1919년 1월 16일 대한인 국민회 오하이오주 아크론 지방회가 처음 조직될 때 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날 선출된 다른 임원은 부회장에 박독욱, 총무 조월림, 서기 강영문, 재무 황보절걸, 학무 사병순, 법무 최능익, 구제원 하희옥, 대의원 박인택, 실업부원 강영상이었다. 학무 사병순이 한국 장로교회가 최초로 중국 산동에 파송한 해외선교사였으므로 사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을 것으로 본다. 

노진국의 나라사랑은 아크론 지방회 조직에서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중앙총회장의 전보를 통해 그해 3월 1일에 서울에서 대한독립 선고 소식을 듣고 지방회 회원 모두가 크게 기뻐서 뛰며 그가 중심이 되어 우선 아크론 지방회원이 ”앞길을 진행하여 나갈 데 관하여 일심동력하기로 한“ 결심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그는 그해 3월과 4월과 5월에 특별의연금, 국민의무금, 독립의연금, 필라델피아 자유대회의연금을 기쁘게 낼 수 있었다. 

 

나성, 아크론 거쳐 다시 나성에서 한인장로교회 영수로 사역

기독학원 초청으로 하와이로 이주 한인기독교회 전도사 사역

 

나성한인장로교회 영수

 

노진국은 아크론에서 나성으로 돌아왔다. 나성지방회 임원이 총 사면을 하면서 1919년 7월 27일에 새 임원을 선정할 때 그는 총무로 선임되었다. 기타 임원으로는 회장 전 진, 부회장 민찬호 전도사, 학무 박재형, 서기 김학수, 재무 박리근, 실업원 김희복, 법무원 전 진이었다.

1919년에 나성에는 한인동포 100여 명이 있었다. 나성한인장로교회의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장년 교우가 40여 명에 이르렀고 예배당은 이전보다 일층 더 편리하게 설비되었으므로 장차 교회에 소망이 있었다. 민찬호 전도사가 1919년에 하와이로 돌아가면서 홍치범 전도사가 본 교회를 돕게 되었다. 홍 전도사는 중가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감리교회를 돕던 순회 전도사였다. 

이런 가운데 1919년 11월에 노진국은 박일우와 염세우와 더불어 영수로 선임되었다. 영수는 홍치범 순행 전도사가 다른 지역 교회를 순회할 때 나성한인장로교회의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목회전반을 담당했으므로 노진국은 박일우와 염세우와 더불어 교회목회를 담당했다고 본다. 본 교회에 집사와 권찰도 있었다. 집사에는 정인영, 정지영, 염달욱, 조성환, 주영한, 전 진 등 6명이었고, 권찰에 김이선, 박순애, 임화연 등 3명이 있었다.

1920년 3월 1일 오전 10시에 독립선언 기념경축회가 있었다. 홍치범 전도사의 개회에 이어 일동이 일어나 경축가를 합창한 후 노진국이 개회기도를 담당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그 후 홍치범 전도사의 개회사, 주영한의 대통령 교령낭독, 조성환의 독립선언서 낭독, 일동 국기경례, 일동 기립만세 제창, 박순애 부인과 황미네 여사의 병창, 염세우 영수의 임시정부 헌법낭독, 염달욱의 축사, 정혜경 부인의 독창, 홍치범 전도사의 각처 축전과 중앙총회장윤병구 목사의 연설초본낭독, 김래진의 ‘독립운동 연혁의 개요’라는 연설에 이어 일동 애국가 합창으로 오전 12시 10분에 폐회했다. 이후 제2부에서 조성환의 사회로 일동 애국가 합창, 김진형의 ‘부활’이라는 주제의 연설, 정해경 부인의 독창, 최재덕의 ‘독립운동의 제2계급에 나온 우리’라는 제목의 연설, 박순애 부인의 독창, 김재성의 ‘기념’이라는 주제의 연설 후 염세우, 김종혁, 박순애, 차정석의 연설 그리고 염세우 폐회 기도 후 하오 6시에 폐회했다.

그해 7월 2일에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홍치범 전도사의 주례로 31세의 노진국은 24세의 황미니와 결혼했다. 노진국은 남가주 대학 예비과를 졸업하였고, 황미니는 1913년에 호항에서 상항으로 건너와서 감리교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나성으로 이동하여 안레리오 중학교를 졸업하였고, 대한부인애국단 회원이었다. 그해 9월 18일에 노진국은 호항 기독학원의 초빙을 받고 부인과 함께 룰린 선편으로 그해 10월 2일에 상항에서 하와이로 향했다. 

노진국의 나성한인장로교회 영수직은 1919년 7월 27일부터 하와이로 이주하던 1920년 9월 18일까지 1년 2개월간이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전도사

 

노진국은 부인과 함께 1920년 10월 2일에 상항을 떠나 그달 9일에 하와이 호항에 도착했다. 그와 부인은 선박명단에 교사라고 밝혔다. 그달에 그는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교장에 부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3년 7월 하와이 감리교 한인부가 국어교과서 편찬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노진국은 재무에 선임되어 위원장 김이제, 서기 이원순, 위원 이태성, 염달욱, 최창덕, 현 순 등과 동역했다. 그해 10월 25일 저녁에 호항 밀러 스트리트에서 한인 500명이 대회를 열고 일본 지진 때에 학살당한 동포조사위원회를 선임할 때 노진국은 박 존, 양유찬, 이태성, 김영기와 함께 선출되어 재일동포를 위하여 팔을 걷어붙였고, 1924년 1월에 하와이 대한인 교민단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노진국은 1924년 1월에 한인기독교회 연환회에서 전도사로 임명을 받았고 곧 지역 교회로 파송될 예정이었는데 자세한 내용을 찾기란 쉽지 않다. 

노진국은 장 붕, 최창덕 그리고 임영우와 함께 1925년 10월에 이듬해 하와이 교민단 단장 물망자 명단에 오를 만큼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공인이 되었고, 여느 재미한인과 같이 1930년에 와히아와에서 세탁소 지배인으로 활동했고, 1940년에는 같은 곳에서 양복점을 운영했다.

1942년 4월 26일에 제출한 세계 제2차 대전 징병 서류에 따르면 노진국이 은퇴하여 와히아와의 마쿠웨오 애비뉴 64번지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인상착의에 따르면 5피트 5인치의 키에 120파운드의 체중으로 갈색 눈에 검정 머리 그리고 연갈색 얼굴이었다. 아내를 사별한 지 14년이 되고, 아들 리차드가 별세한 지 3년이 되던 1966년 5월 23일에 그는 향년 76세로 하와이 호놀룰루 와히아와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내와 아들이 누운 이곳 누아누 기념 공원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

05.0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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