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김순학(1876-1919)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순학은 1876년 1월 15일에 한국 창천에서 태어나 결혼한 후 완산에서 거주했다. 그는 29세 때인 1904년 10월 5일에 일본 고베에서 도릭 선박에 의지해 그달 17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21세 된 그의 아내와 3살 된 아들 김태선 그리고 1살 된 딸과 동행했음을 호놀룰루 입항 명단이 확인해주고 있다.

 

리버사이드 한인장로교회 목사 

 

김순학과 그의 가정은 늦어도 1907년에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하변)로 이주했다. 도산 안창호가 이곳에 처음 방문한 3년 후였고, 이곳에 파차파 한인촌이 세워진 이듬해가 된다. 그는 그렌우드 호텔에 취직하였다가 그렌우드 미션 호텔로 직장을 옮겼다. 1914년의 이곳 전화번호부에 따르면 그는 그렌우드 미션 호텔에 제과사로 활동했다. 빵, 케이크, 쿠키, 파이 등 다양한 빵 및 과자류를 만들던 제과사로서의 그의 이름을 1917년까지 매해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의 호텔은 하변의 6가와 7가 사이의 메인 스트리트에 있었고, 오늘날 미션호텔이 되어 역사와 위용을 자랑한다. 그 외에도 이곳에서 일한 한인으로는 제과사 구 삼(Koo Sam)과 청소용역 노동자 이 H(H. Lee)도 있었다.

하변한인장로교회는 1906년에 이곳 백인교회인 갈보리장로교회가 개척한 한인교회다. 본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처다. 김순학은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전도사로 본 교회를 섬겼다.

1913년 12월 1일부터 1914년 11월 30일까지의 하변한인교회 보고서에 따르면 김순학이 전도사였고, 문영운이 영수였으며, 박충섭은 재무였고, 당회장은 백인교회인 갈보리장로교회의 헌터 목사였다. 세례교인은 20명이었으며 지난 한 해 동안 세례를 받은 자가 김중원, 이 원, 박병은, 김병선, 이학현 그리고 구정섭 등 6명이었고, 학습교인은 3명이었으며, 주일예배에 참석한 평균인원은 22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은 4명이었다. 교인 중 고등학생이 2명, 야학교 학생은 5명이었고, 초등학생은 7명이었다. 교회 경비로 헌금한 액수는 67.40달러였고, 기타 헌금은 40달러로 그해 드린 헌금총액은 107.40달러였다.

1915년 하변 전화번호부에 따르면 김순학이 하변한인장로교회의 전도사(Pastor)였고, 예배당은 파차파 애비뉴 1508번지에 있었다. 그해 3월 30일에 미국 북장로교 내지선교사인 라클린 목사와 한인 순회목사인 민찬호 목사가 본 교회를 방문했다. 이날 본 교회는 그들을 위하여 성대하게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방문한 두 목사는 설교하였고, 중국 선교사를 역임했던 라클린 목사가 중국어로 찬송을 불렀고, 본 교회 여학생 송마티는 영어 찬송으로 화답했다. 

그해 4월 22일자의 신한민보는 ‘하변교회에 신구 직임’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인근 엎랜드로 이주한 하변한인장로교회 영수 문영운을 위하여 전별식이 있었고, 한국에서 다년 교회 일에 종사한 하도원 장로가 문영운의 영수직을 이었으며, 최재덕을 집사로 선정하였다고 보도했다. 

1914년 12월 1일 이후 1915년 11월 30일까지의 하변한인장로교회 보고서에 따르면 세례교인이 26명이었는데, 이중 5명이 감리교회로부터 이명하였으며, 지난 1년간 새신자가 6명이었고, 1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학습교인은 2명이었다. 평균 예배출석수가 25명이었고, 주일학교 학생은 평균 12명이었다. 교인 중에 고등학생이 2명이었고, 초등학생은 11명이었다. 교회 경비를 위해 드린 헌금은 86달러였고, 기타 헌금이 15달러여서 총 헌금액은 101달러였다. 자비량 한인 교역자가 3명이었으니 김순학 외에 하도원이 영수로 최재덕이 집사로 계속 사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백인교회에서 본 교회를 돕는 사역자가 4명이었는데 이들은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야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16년 하변 전화번호부에도 김순학이 하변한인장로교회 전도사로 기재되어 있다. 교회주소도 1915년과 같았다. 

그런데 그해 9월 28일 자의 신한민보에 따르면 김순학은 맹정희, 신광희 그리고 마춘봉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북쪽 지역의 윌로우스에서 140영모를 경작하였고, 1917년 하변 전화번호부에는 하변한인장로교회 목사가 조득린(T.R. Cho)으로 되어 있어 조득린이 1916년에 하변에 온 것이다. 이로써 김순학이 1916년 봄까지 하변한인장로교회 목사로 재직하였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목회사역은 2년3개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김순학은 1918년 1월에 다시 나성으로 이주했다. 그해 

하변한인장로교회(1918년 이후)

4월 6일에 한인 예배당에서 이곳 미국인교인 20여 명과 한인교인 20여 명이 모여 애찬회를 가졌다. 이날 미국인 맨 여사, 피어슨 부인 그리고 스테분스 부인 등 3명을 귀빈으로 초청하였는데 이들이 김순학의 목회기간 사역한 백인사역자로 보인다. 이중 맨 여사는 가난한 집안에서 늘 한인청년에게 영어를 가르침에 감사를 더 많이 표했다. 이 애찬회에 김순학이 참석했을 것이다.

그런데 1918년 12월 12일 자의 신한민보에 따르면 그해 11월 10일에 하변지방회 사무실을 종전의 파차파 애비뉴 1532번지에서 바니스트리트 1158번지로 이전하였다. 게재된 하변한인장로교회 사진의 번지가 위의 하변지방회 사무실의 번지인 1158인 점으로 보아 이곳으로 이주한 1918년이 아닌가 싶다. 

 

1904년 가족과 함께 하와이 거쳐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하변) 도착

1913-1916년 하변한인장로교회 전도사...동포사랑 나라사랑 본 보여

 

동포사랑과 나라사랑

 

김순학은 교회를 섬길 뿐만 아니라 동포사랑에도 힘썼다. 1907년 6월에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공립신보에 기부하였고 공립협회 회비를 납부하였으며 이듬해에도 기부하였다. 1910년 5월에 화재 구제에 기부금을 냈고 그달에 클레아몬트 학생양성소에 3달러를 기부했으며 이듬해 11월에 신병으로 고생하는 동포에게 1달러를 후원했다. 

1914년 1월 이인초가 닐시따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25센트를 부조했고 그해 5월에 서간도 기황 구휼금으로 3달러를 기부했으며 1915년에 우렛렌드 동포 조원두의 부인의 참사를 듣고 기부했고 1917년 7월에 위의 학생양성소에 기부했으며 1918년 1월에는 하변공립병원에 입원 중인 전낙원, 이경의 그리고 박제빈을 위문했고 그해 2월 이경의 병비 의연으로 5달러를 후원했다.

김순학의 나라사랑은 국민회에서다. 1911년 11월 11일에 김순학이 국민회 하변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국민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달 18일 특별회로 모여 지방자치제도를 조직하고 응용규칙 17조를 기초하였는데, 거류지 질서를 정돈하며 폐류를 숙청하여 전체 동포의 행복을 증진하였다. 이듬해 12월에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가 1913년 12월에 회장으로 재선임되었고, 1916년에 법무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1917년에 대의원으로 선임된 그해 8월 29일에 제8회 국치 기념식에서 기도와 국치 기념사를 담당했고 1918년 1월 재무로 선임되었고 그해 2월에 모 식당에서 23명이 모인 가운데 하변 지방회 창립기념식에서 ‘우리 하변지방회 역사’를 담당했으며, 그해 11월에 명년 대의원으로 선임되었고, 국어학교 경비모금을 귀하여 구역 안에서 후원을 받기로 하고 수전 위원에 함순학으로 선정하였는데 함순학이 김순학이 아닌가 싶다. 그해 12월에 새 임원을 조직하면서 재무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매년 국민의무금을 납부하였다.

 

소천

 

하변 웨스트12가 1059번지에 살던 김순학이 1918년 6월 19일에 속병으로 병원에서 치료했고, 그해 9월 12일에 아들 태선과 각각 제출한 1차 세계대전 징집서류에 따르면 김순학은 트럭 야채상이었고, 그해 12월에는 이 익(?)과 합자하여 30에이커에 자본금 2,600달러로 감자농사를 하였다. 이듬해 2월 1일에 스페니쉬 독감으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하지 못하고 그달 13일에 하였는데 김순학은 축사를 담당하였다. 

1919년 2월 27일에 발간된 신한민보의 ‘김순학 씨 비명횡사’에 따르면 “지난 23일 하오 4시에 당지에 거류하는 김순학 씨는 박충섭 씨의 가족과 같이 마차를 타고 농장에 나가다가 중로에서 마차에 메인 말이 부지중에 총알같이 달아나는 바람에 마차 위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떨어질 때에 김순학 씨는 두골이 깨어져 곧 정신을 잃어서 병원에 입원시켜 의사의 수술을 받았으나... 그 날 하오 6시 10분에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 오전 10시에 하변 윔암쓰터즈 교당에서 하변거주 동포 13명과 인근 나성과 엎랜드와 클레아몬트에서 방문한 동포 19명과 서양인 14명 등 46명이 모인 가운데 민찬호 목사의 주례로 하변 에버그린 공원묘지에 그를 안장했다. 그렌우드 미션 호텔의 소유주인 프랭크 A. 밀러는 김순학이 여러 해 제과사로 취직했던 본 호텔로 조객을 초청하여 오찬을 대접했다.

김순학의 묘비에는 ‘고애 김순학 군 묘’라고 적혀 있어 그의 호가 ‘고애’가 아닌가 한다. 오른쪽에는 ‘대한인국민회원, 흥사단우’라고 적혀 있어 나라사랑에 앞장섰던 그가 한 달 뒤에 있었던 삼일독립만세 소식을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아 안타깝고, 그가 안장된 묘지에 아들 김태선(Joseph Kim)이 1925년 11월 24일에 향년 26세로 안장되었으니 더욱더 안타깝다.

 

damien.sohn@gmail.com

12.2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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