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유성숙(1876-1943)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유성숙(柳聖淑)은 1876년 7월 4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가 29세 때인 1905년 2월 25일에 몽골리아 선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 후 그는 자기의 이름을 Sung Sook Lyou로 적었고, Don Harvey Lyou로도 통했다. 

1906년 10월 6일 유성숙이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상항) 지방회 구제위원으로 피선되었는데, 그달 22일에는 상항 인근 오클랜드초등학교 1반에 입학하였다. 박창선은 그와 함께 1반에 입학했고, 방화중은 같은 학교 6반에 입학했다. 이듬해 1907년 5월에 상항 지방공립협회는 총회장 송석준의 부음을 승하고 회원 방화중과 유성숙을 파송하여 호상토록 했는데 유성숙이 방화중과 함께 본 협회에서 크게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성숙(柳聖淑)은 1876년 7월 4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가 29세 때인 1905년 2월 25일에 몽골리아 선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 후 그는 자기의 이름을 Sung Sook Lyou로 적었고, Don Harvey Lyou로도 통했다. 

1906년 10월 6일 유성숙이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상항) 지방회 구제위원으로 피선되었는데, 그달 22일에는 상항 인근 오클랜드초등학교 1반에 입학하였다. 박창선은 그와 함께 1반에 입학했고, 방화중은 같은 학교 6반에 입학했다. 이듬해 1907년 5월에 상항 지방공립협회는 총회장 송석준의 부음을 승하고 회원 방화중과 유성숙을 파송하여 호상토록 했는데 유성숙이 방화중과 함께 본 협회에서 크게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나성

 

유성숙은 1907년 5월 20일, 나성에서 방화중의 여동생 방헬렌과 결혼했다. 그녀는 1890년 4월 4일에 한국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해 9월에 공립협회 나성지방회 평의원 임준기 대신에 그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0월에 방화중, 이순기, 박성운, 조원두, 한기갑의 5명과 함께 나성 한인 유학생 기숙사를 설치하였다. 본국에서 온 한인 자비학생들의 공부를 속성하고 학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본 지방에 학생기숙사를 설립하고 학생숙식비 1년(9달)에 72달러인데 넉 달 반의 36달러만 가지고 와도 기숙을 허락했고, 학생비는 선급하되 만일 학생이 연고 없이 방학 전에 퇴학하고 기숙사에서 나가고자 하면 그 기부금을 환불하지 않았고, 학생들의 영어를 연습하기 위하여 매 주일 한 번 본 기숙사에서 영어연설회를 가졌다. 

그가 나성 지방회 사법원으로 선임된 이듬해인 1909년 3월에 그는 클레몬트 학생양성소의 학생들을 위하여 5달러를 기부했고, 이달에 클레몬트로 유학차 떠나는 강영대에 이어 그가 신한민보 지사원이 되었다. 그해 4월에는 나성지방회 법무원에서 회계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9월에 클레몬트 학생양성소에 그가 5달러를 다시 기부했으니 공부하는 학생을 위하는 마음이 컸음을 알게 된다. 

1910년 1월에 유성숙은 오클랜드초등학교 동문인 방화중과 박창선과 함께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던 ‘신한민보’ 가옥설립을 위한 나성대표원으로 활동했으니 신한민보의 귀중함을 몸소 실천했다 하겠다. 그해 10월에는 그가 본 지방회 재무 겸 서기가 되었고, 11월에는 한국에 농상업의 큰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전답을 구매하기 위하여 설립한 ‘권업주식회사’ 임시회계였는데 임시 사장에는 방화중이었다.

1911년 7월 유성숙은 윤문숙과 함께 나성지방회 국민 의무금 대리위원으로 선정되어 나라사랑을 모으는 일에 힘썼고, 그해 9월에는 박형모, 염봉근, 이영수와 함께 그가 평의원에 피임됐는데, 그해 11월에 국민의무금 수납위원직을 사임했다. 그해 12월에 그는 서기가 되더니,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에 선정되었다.

1906년 이후 유성숙과 함께 했던 방화중이 아버지 방기창의 사망으로 1912년 2월에 한국으로 귀국함으로 그의 모든 미진사항을 유성숙이 맡았는데 가까운 친구의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싶다. 다음 달인 3월에 그가 평의원을 사면했지만 그달에도 2년이나 된 권업주식회사의 회계직은 유지했다. 그런데 이듬해 6월 유성숙은 나성지방회 총무였는데 2달 후인 8월에 사임했다.

 

나성한인장로교회 전도사

 

하와이에서 1911년 3월에 나성으로 유학온 민찬호 전도사는 나성한인감리교회에 부임하여 복음사역을 이어갔다. 1896년 미국북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던 해리 C. 셔만 선교사의 부인 프로렌스 셔만이 1904년 3월 미국남감리교회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기도처를 설립하면서 본 교회가 조직되었다. 민찬호는 신흥우에 이어 두 번째 목회자가 되어 학업과 교회 사역을 병행했다. 그런데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미국 남감리교회의 친일적인 경향에 흩어지려는 본 교회 교인들이 민찬호의 노력으로 1912년 9월 LA 한인장로교회에 병합하면서 본 장로교회 목회자가 되었다. 당시 본 장로교회 교역자였던 방화중 전도사가 부친 방기창 목사의 서거 소식에 1912년 2월에 내한했기 때문에 본 장로교회 교역자가 공석이었고, 미국북장로교회와 미국남감리교회 간의 예양협정에 따라 LA지역은 미국북장로교 선교지역이었기 때문에 교단 간 명분이 성립되었다. 민찬호는 가주에 있던 동양인을 목적한 미국북장로교 내지 선교사 라크린 선교사의 지도아래 LA뿐만 아니라 LA 인근에 흩어진 한인기도처를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그들을 위로했다. 민찬호는 1919년 가을까지 본 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유성숙이 1913년경에 미국북장로교 가주 한인순회 목사였던 민찬호 목사의 지도하에 전도사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유성숙 외에 Dong K. Park, Sung T. Whang, Young H. Kim도 순회전도사 민찬호의 보조자였다. 유성숙이 나성에 거주하였으므로 민찬호가 지방 순회 방문차 본 교회를 비울 때 유성숙이 목회를 담당한 것 같다. 민찬호가 나성한인장로교회를 떠나던 1919년 가을까지 유성숙이 본 교회를 섬겼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1913년 한 해 동안 유성숙이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사역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성숙이 전도사로 사역하던 1913년의 나성한인장로교회는 아직 당회가 구성되지 않았으므로 당회장은 백인 A. B. 프리챠드 목사였고, 담임목회자는 민찬호 전도사였다. 당시 예배당은 올리브 코트 스트리트 2번지에 있었다. 1913년 11월 19일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교인은 총 54명이었고, 새교우는 18명이었고, 유아세례자는 2명이었으며, 학습교인은 15명이었다. 주일예배에 참석한 평균인원은 26명이었고, 주일학교에 참석한 평균인원은 10명이었다. 이해에 대학생이 4명, 고등학생이 6명, 초등학생이 9명, 야학생이 5명 있었다. 1년간 헌금총액은 801달러9센트였고, 지출에 있어 한국 내지선교비로 191달러77센트, 중가주 다뉴바한인장로교회 보조비로 35달러를 사용하였으니 비록 당회가 없는 기도처에 불과하였지만 선교하는 교회였다. 그해 11월 18일 현재 회계연도 잔금이 113달러26센터였으니 흑자 재정이었던점도 눈에 띈다.

유성숙은 디뉴바로 이주했다. 그가 본 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을 때인 1920년 5월에 이원석이 자기 모친과 다투었는데 모친이 죽겠다할 때 이원석이 영어로 상관없다 하며 욕설을 발하였고,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에게 달려들 때 시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구타하므로 동포들이 울분하여 저들이 사회의 풍기와 윤리 법강을 몰라본다고 여겼으므로 죄를 징계할뿐더러 그러한 악습을 없이하고자 하여 이에 출경시키기로 가결하였고 그 집은 1년 유예로 선고하였다.

1920년에 유성숙은 북가주 윌로즈에서 벼농사를 하였다. 그는 장기신과 함께 160에이커 벼농사를 하였다. 그 외에도 윌로즈에 벼농사를 한 사람으로는 김종림이 1,000에이커를, 임준기와 마춘봉이 2,200에이커를, 강대근이 250에이커를, 이재성이 280에이커를 각각 경작했고, 이외에도 치포, 콜루사, 멕스웰, 텔리벤 등에서 여러 한인이 경작했다. 그러나 그해 크게 모두 실패를 하였는데, 그도 실패하여 이듬해인 1921년에 디뉴바로 돌아왔다. 그해 1월에 그는 국민회 디뉴바 지방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23년 10월에 유성숙은 다시 나성으로 이주했다. 1925년 12월에는 그가 포도를 취급하는 상업에 종사했다. 1928년 4월에 나성에 거주하던 이 인이 자살하였을 때 김찬일과 김배혁 등 두 명이 자기 사업상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비를 수봉하는 일과 기타 모든 범절에 많은 수고를 하여 죽은 자의 장례식을 유감없이 치렀는데, 유성숙은 1달러를 장례비로 기부하였다. 그해 8월에 이대위 목사의 장례식에도 그가 기부하였다. 1931년 5월에 그가 나성에 거주하는 150만 명에게 채소와 실과를 공급하는 엠퍼리얼 밸리에서 이들을 운송하는 운송사업을 하였는데, 이듬해 7월에 그의 트럭에 불이 나서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1939년 7월에는 그가 그의 주택을 빌려주어 나성지방 삼일국어학교가 하기 국어강습소를 그의 주택에서 개학했다.

방화중이 노환으로 나성카운티 팜 병원에 들어가 오랫동안 치료를 받던 중 1940년 12월 11일에 향년 64세로 소천했다. 이에 유성숙이 장례식을 주장하였다.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난 방화중의 가족은 한국에 있었고, 미국에는 그의 여동생 한 명이 있었는데 유성숙이 그의 매부였다.

 

소천

 

5피터9인치의 키에 152파운드의 체중이었던 유성숙은 1938년 12월 6일에 미국시민권을 받았다. 미국시민권을 받은 지 5년이 되던 1943년 2월에 24세였던 그의 첫아들 조셉이 122명의 한인 2세의 종군대열에 함께했다. 신한민보는 ‘청년용사록’를 만들어 종군한 제2세의 방명을 차례로 게재하였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이 기록에 근거하여 ‘종군기’를 만들어 국민총회관 벽에 걸고 용사(스타)를 붙여 광영의 숫자를 표시했는데 그의 아들 조셉도 있었다. 그해 12월 23일에 유성숙이 나성에서 타향살이 38년에 향년 67세에 부인 방헬렌과 베시, 조셉, 매리온, 새라, 죠니, 애나, 매리, 조지 등 8명의 자녀를 두고 총총걸음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damien.sohn@gmail.com

 

유성숙은 1907년 5월 20일, 나성에서 방화중의 여동생 방헬렌과 결혼했다. 그녀는 1890년 4월 4일에 한국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해 9월에 공립협회 나성지방회 평의원 임준기 대신에 그가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0월에 방화중, 이순기, 박성운, 조원두, 한기갑의 5명과 함께 나성 한인 유학생 기숙사를 설치하였다. 본국에서 온 한인 자비학생들의 공부를 속성하고 학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본 지방에 학생기숙사를 설립하고 학생숙식비 1년(9달)에 72달러인데 넉 달 반의 36달러만 가지고 와도 기숙을 허락했고, 학생비는 선급하되 만일 학생이 연고 없이 방학 전에 퇴학하고 기숙사에서 나가고자 하면 그 기부금을 환불하지 않았고, 학생들의 영어를 연습하기 위하여 매 주일 한 번 본 기숙사에서 영어연설회를 가졌다. 

그가 나성 지방회 사법원으로 선임된 이듬해인 1909년 3월에 그는 클레몬트 학생양성소의 학생들을 위하여 5달러를 기부했고, 이달에 클레몬트로 유학차 떠나는 강영대에 이어 그가 신한민보 지사원이 되었다. 그해 4월에는 나성지방회 법무원에서 회계로 자리를 옮겼다. 그해 9월에 클레몬트 학생양성소에 그가 5달러를 다시 기부했으니 공부하는 학생을 위하는 마음이 컸음을 알게 된다. 

1910년 1월에 유성숙은 오클랜드초등학교 동문인 방화중과 박창선과 함께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던 ‘신한민보’ 가옥설립을 위한 나성대표원으로 활동했으니 신한민보의 귀중함을 몸소 실천했다 하겠다. 그해 10월에는 그가 본 지방회 재무 겸 서기가 되었고, 11월에는 한국에 농상업의 큰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전답을 구매하기 위하여 설립한 ‘권업주식회사’ 임시회계였는데 임시 사장에는 방화중이었다.

1911년 7월 유성숙은 윤문숙과 함께 나성지방회 국민 의무금 대리위원으로 선정되어 나라사랑을 모으는 일에 힘썼고, 그해 9월에는 박형모, 염봉근, 이영수와 함께 그가 평의원에 피임됐는데, 그해 11월에 국민의무금 수납위원직을 사임했다. 그해 12월에 그는 서기가 되더니,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에 선정되었다.

1906년 이후 유성숙과 함께 했던 방화중이 아버지 방기창의 사망으로 1912년 2월에 한국으로 귀국함으로 그의 모든 미진사항을 유성숙이 맡았는데 가까운 친구의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싶다. 다음 달인 3월에 그가 평의원을 사면했지만 그달에도 2년이나 된 권업주식회사의 회계직은 유지했다. 그런데 이듬해 6월 유성숙은 나성지방회 총무였는데 2달 후인 8월에 사임했다.

 

나성한인장로교회 전도사

 

하와이에서 1911년 3월에 나성으로 유학온 민찬호 전도사는 나성한인감리교회에 부임하여 복음사역을 이어갔다. 1896년 미국북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던 해리 C. 셔만 선교사의 부인 프로렌스 셔만이 1904년 3월 미국남감리교회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기도처를 설립하면서 본 교회가 조직되었다. 민찬호는 신흥우에 이어 두 번째 목회자가 되어 학업과 교회 사역을 병행했다. 그런데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미국 남감리교회의 친일적인 경향에 흩어지려는 본 교회 교인들이 민찬호의 노력으로 1912년 9월 LA 한인장로교회에 병합하면서 본 장로교회 목회자가 되었다. 당시 본 장로교회 교역자였던 방화중 전도사가 부친 방기창 목사의 서거 소식에 1912년 2월에 내한했기 때문에 본 장로교회 교역자가 공석이었고, 미국북장로교회와 미국남감리교회 간의 예양협정에 따라 LA지역은 미국북장로교 선교지역이었기 때문에 교단 간 명분이 성립되었다. 민찬호는 가주에 있던 동양인을 목적한 미국북장로교 내지 선교사 라크린 선교사의 지도아래 LA뿐만 아니라 LA 인근에 흩어진 한인기도처를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그들을 위로했다. 민찬호는 1919년 가을까지 본 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유성숙이 1913년경에 미국북장로교 가주 한인순회 목사였던 민찬호 목사의 지도하에 전도사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유성숙 외에 Dong K. Park, Sung T. Whang, Young H. Kim도 순회전도사 민찬호의 보조자였다. 유성숙이 나성에 거주하였으므로 민찬호가 지방 순회 방문차 본 교회를 비울 때 유성숙이 목회를 담당한 것 같다. 민찬호가 나성한인장로교회를 떠나던 1919년 가을까지 유성숙이 본 교회를 섬겼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1913년 한 해 동안 유성숙이 나성한인장로교회에서 사역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성숙이 전도사로 사역하던 1913년의 나성한인장로교회는 아직 당회가 구성되지 않았으므로 당회장은 백인 A. B. 프리챠드 목사였고, 담임목회자는 민찬호 전도사였다. 당시 예배당은 올리브 코트 스트리트 2번지에 있었다. 1913년 11월 19일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교인은 총 54명이었고, 새교우는 18명이었고, 유아세례자는 2명이었으며, 학습교인은 15명이었다. 주일예배에 참석한 평균인원은 26명이었고, 주일학교에 참석한 평균인원은 10명이었다. 이해에 대학생이 4명, 고등학생이 6명, 초등학생이 9명, 야학생이 5명 있었다. 1년간 헌금총액은 801달러9센트였고, 지출에 있어 한국 내지선교비로 191달러77센트, 중가주 다뉴바한인장로교회 보조비로 35달러를 사용하였으니 비록 당회가 없는 기도처에 불과하였지만 선교하는 교회였다. 그해 11월 18일 현재 회계연도 잔금이 113달러26센터였으니 흑자 재정이었던점도 눈에 띈다.

유성숙은 디뉴바로 이주했다. 그가 본 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을 때인 1920년 5월에 이원석이 자기 모친과 다투었는데 모친이 죽겠다할 때 이원석이 영어로 상관없다 하며 욕설을 발하였고,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에게 달려들 때 시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구타하므로 동포들이 울분하여 저들이 사회의 풍기와 윤리 법강을 몰라본다고 여겼으므로 죄를 징계할뿐더러 그러한 악습을 없이하고자 하여 이에 출경시키기로 가결하였고 그 집은 1년 유예로 선고하였다.

1920년에 유성숙은 북가주 윌로즈에서 벼농사를 하였다. 그는 장기신과 함께 160에이커 벼농사를 하였다. 그 외에도 윌로즈에 벼농사를 한 사람으로는 김종림이 1,000에이커를, 임준기와 마춘봉이 2,200에이커를, 강대근이 250에이커를, 이재성이 280에이커를 각각 경작했고, 이외에도 치포, 콜루사, 멕스웰, 텔리벤 등에서 여러 한인이 경작했다. 그러나 그해 크게 모두 실패를 하였는데, 그도 실패하여 이듬해인 1921년에 디뉴바로 돌아왔다. 그해 1월에 그는 국민회 디뉴바 지방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23년 10월에 유성숙은 다시 나성으로 이주했다. 1925년 12월에는 그가 포도를 취급하는 상업에 종사했다. 1928년 4월에 나성에 거주하던 이 인이 자살하였을 때 김찬일과 김배혁 등 두 명이 자기 사업상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비를 수봉하는 일과 기타 모든 범절에 많은 수고를 하여 죽은 자의 장례식을 유감없이 치렀는데, 유성숙은 1달러를 장례비로 기부하였다. 그해 8월에 이대위 목사의 장례식에도 그가 기부하였다. 1931년 5월에 그가 나성에 거주하는 150만 명에게 채소와 실과를 공급하는 엠퍼리얼 밸리에서 이들을 운송하는 운송사업을 하였는데, 이듬해 7월에 그의 트럭에 불이 나서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1939년 7월에는 그가 그의 주택을 빌려주어 나성지방 삼일국어학교가 하기 국어강습소를 그의 주택에서 개학했다.

방화중이 노환으로 나성카운티 팜 병원에 들어가 오랫동안 치료를 받던 중 1940년 12월 11일에 향년 64세로 소천했다. 이에 유성숙이 장례식을 주장하였다.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난 방화중의 가족은 한국에 있었고, 미국에는 그의 여동생 한 명이 있었는데 유성숙이 그의 매부였다.

 

소천

 

5피터9인치의 키에 152파운드의 체중이었던 유성숙은 1938년 12월 6일에 미국시민권을 받았다. 미국시민권을 받은 지 5년이 되던 1943년 2월에 24세였던 그의 첫아들 조셉이 122명의 한인 2세의 종군대열에 함께했다. 신한민보는 ‘청년용사록’를 만들어 종군한 제2세의 방명을 차례로 게재하였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이 기록에 근거하여 ‘종군기’를 만들어 국민총회관 벽에 걸고 용사(스타)를 붙여 광영의 숫자를 표시했는데 그의 아들 조셉도 있었다. 그해 12월 23일에 유성숙이 나성에서 타향살이 38년에 향년 67세에 부인 방헬렌과 베시, 조셉, 매리온, 새라, 죠니, 애나, 매리, 조지 등 8명의 자녀를 두고 총총걸음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damien.sohn@gmail.com

08.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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