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이용직(1894-?)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용직은 1894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1911년 그가 숭실중학을 졸업한 후 1914년까지 평남 순천에서 교사로 재직한 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숭실 교장인 조지 맥쿤 ‘윤산온’ 선교사로부터 그의 모교인 미조리주 팍빌의 팍대학을 추천받아 이용직이 1915년에 도미했다. 그가 1916년 4월에 팍빌에 있는 팍빌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더니 1919년에 이곳의 팍대학에서 공부했다. 기미독립선언 6개월 후인 그해 9월 그는 미조리주 장로교총회에 참석하여 한국 참상을 연설하였고, 이후 본 총회는 일치 가결하여 대한독립을 적극적으로 찬조하기로 했다. 그는 1920년 5월에 신형호에 이어 워싱턴의 구미위원부 통신원이 되어 워싱턴으로 이동하였다. 팍대학 3년 과정을 인정받아 워싱턴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으로 전학하여 1921년 10월에 정치학을 공부하고 졸업했고, 이듬해에는 영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영어 이름은 William Y. Lee로 표기했다.

뉴욕한인교회 전도사

그 후 이용직은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했다. 김영섭 목사가 1925년 11월에 뉴욕한인교회를 떠나 귀국하게 되자 뉴욕한인교회는 전 담임목사 임종순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찾기가 여의치 않자 이용직을 뉴욕한인교회 전도사로 청빙했다. 

1926년 1월에 가옥기본금 모집위원회가 조직되고, 2월에는 11인 위원회를 선정하였는데 모집 위원장에 안정수, 서기에 윤홍섭, 회계에 이진일, 위원에 이용설, 이원준, 이두형, 김도연, 장덕수였다. 이들은 세 가지를 결정하였다. 자체교회 마련을 위한 4천 달러 모금, 창립기념일인 이듬해 1927년 4월 18일까지 목표액 완납 그리고 교회1층 확장 예산액 7만 달러 확보를 위한 미국 선교회와의 교섭이었다. 모집운동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 모집위원장 안정수가 2천 달러를 기부하였고, 60여 명의 교인이 정성을 다하여 모금액을 달성했다. 그러나 7만 달러의 확장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뉴욕 대한인 교민단과 대한인 국민회 뉴욕 지방회가 연합하여 1926년 3월 1일에 삼일절을 경축하였는데 오후 1시에 뉴욕한인교회에서 8, 90명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자리에서 이용직은 기도순서를 맡았다. 그의 순서 이전에는 뉴욕 대한인 교민 부단장 홍득수의 개회사에 이어 국기경례, 애국가 합창이 있었고, 그의 기도순서 이후에는 윤흥섭의 독립선언서 낭독, 국민회 대표 곽림대의 축사, 안윤희의 독창, 서재필 박사의 연설, 이무일과 이기붕과 이양춘의 음악, 워싱턴 구미위원부 고문 돌푸의 연설, 정혜원과 김성실의 2부 합창, 이성식의 독창, 장덕수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한 후 다과회가 있었다.

가옥기본금 모집위원회가 조직된 1년 만인 1927년 10월에 21가에서 웨스트 115가 633번지로 예배당을 옮겼다. 인천의 내리 교회의 조시 존슨 ‘조원시’ 선교사 부인의 도움이 컸다. 이 두 건물은 4층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흡사하지만 새로 옮긴 곳이 위치상 콜롬비아대학의 정문에서 지척 간이었다. 한인 유학생에 대한 배려와 그들을 중심으로 한 선교가 바람직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건물 매매계약서에 의하면 115가 건물의 총 가격은 3만5천 달러였다. 선교부가 첫 번 담보대출금으로 1만7천 달러를 담당하고, 뉴욕한인교회가 두 번째 대출금 1만2천 달러를 빌리고, 뉴욕한인교회가 나머지 계약금 1천 달러와 계약금 5천 달러 등 총 6천 달러를 자체적으로 지급하였을 것이다. 새 예배당은 지하실을 포함하여 5층 건물이었다. 이곳은 한인들을 위한 종교와 사회 활동이 가능했고, 한인 유학생들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이용직의 목회 중에 1920년대 뉴욕한인교회 교인 중 김계봉이 있었다. 그는 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었고, 뉴저지에 거주하는 의사였다. 이와는 반대되는 생활을 이어간 한문익도 있었다. 그는 뉴욕한인교회 예배당에서 거주하는 가난하고 외로운 교인이었다. 그에게 뉴욕한인교회는 휴식과 위로를 제공하고 민족애를 일으킨 구심점이었다. 그는 1884년 10월 15일에 대구 동문내 수구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문 아전이었는데 그가 19세 때 사망했다. 1905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선을 탄 그는 2년 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노스웨스턴 철도공사장에서 7년간 노동하였다. 그 후 시카고와 세인트 폴, 미시간, 아이오와, 일리노이스에서 그의 20여 년간의 노동이 계속되었다. 그가 뉴욕에 오기는 1926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집일과 식당 웨이터 등 노동이라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과로로 뉴욕에 온 지 불과 2년 만에 신장에 병이 생겨 콜롬비아대학 근처 세인트눅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하는 막다른 처지에 봉착했다. 그는 1945년 4월 8일 시톤 병원에서 임종할 때까지 고달프고 외로운 삶을 견뎌냈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목사

1929년 12월에 이용직은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았고, 그달 22일에 첫 주일설교를 하였다. 이듬해 2월에 평신도회는 본회 회장에 차신호, 서기에 박주범을 선임하였고, 이사로 김현구와 민한옥을 추가 선출했으며, 매월 재정보고를 문서로 보고토록 했다. 그해 4월 이용직의 부인 김애희가 평양에서 왔다. 부인은 1920년 북경 여자의과대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필라델피아, 뉴욕, 시카고에서 2년간 공부한 후 1928년에 평양으로 돌아가 의원 개업을 한 듯하고 평양의 장로교회에서 반주자로 활동하였다.

김 부인이 하와이로 온 1930년 4월 그달의 평신도회는 교회 건축 빚 갚기에 앞장섰다. 교회부지나 목사실 기지 중 하나를 팔고 집세 17달러에 못 미치는 5달러를 내는 사람을 내보내기로 하였는데 교회부지 일부와 예배당 건물을 팔아 빚을 갚고, 예배는 신흥국어학교에서 드렸다.

계속되는 교회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교인의 동의를 얻어 이용직이 성공회 감독 리텔 신부를 만나 한인기독교회가 성공회 교단에 속하는 방안을 타진하였는데 이 타진이 그가 외국인에게 예배당을 팔아먹으려 했다는 비방으로 와전됐다. 이런 가운데 1931년 5월의 평신도회는 이용직을 해임했다. 독립된 교회 원리와 이승만의 역할 등에 관하여 이용직의 제동이 근본적 원인이라고도 한다. 그의 목회는 1년 6개월간이다.

 

1925년 뉴욕한인교회 전도사, 1929년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목사 청빙

1931년 하와이 교회개척, 34년 귀국 사업하던 중 4회 투옥, 6.25때 납북

 

교회 개척

이용직은 1931년 7월 5일 교민총단관 회의실에서 그를 지지하는 156명과 함께 교회를 개척했다. 그런데 교회 이름은 이전의 교회와 같아서 마침내 두 한인기독교회가 있게 되었다. 창가대와 주일학교도 시작했는데 주일학교 학감은 한길수였다. 

하와이 교민단 주최로 국치기념식이 교회개척 다음 달인 8월 29일 저녁 7시 30분에 밀러 길에 있던 교민총단관에서 있었다.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주석 단장 손덕인의 사회 하에 변홍규 목사가 기도하고 홍한식 목사와 서진수 목사와 박종수 목사 그리고 마주흥 목사가 연설을 담당하였으며, 미감리교회 부인 성가대가 창가한 후 이용직이 축사를 담당했다.

하와이 역사상 처음으로 한인기독교회와 호황 미감리교회가 그해 8월 30일 오후에 왯기기 공원에서 연합 소창회로 약 300명이 모인 가운데 뜨거운 사랑과 동정이 많았다. 한길수의 사회로 이용직 목사가 기도하고, 미감리교회 목사 변홍규가 간단한 설교를 하였고, 최근에 미주에 다녀온 강영각이 청년운동을 주제로 연설했다.  

강영각이 미주 대륙을 다녀온 후 하와이에서 청년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그해 9월 7일에 10여 명이 김유택의 집에 모여 임시 임원을 선택했다. 이용직 목사가 회장이 되었다. 그 외 임원으로는 서기 강영각, 재무 한길수, 사교위원 김유택, 이사원에 이싸라잉, 김이벌잉, 이동빈, 조광원, 홍한식, 이한식, 박종수 그리고 정의조 등이었다. 그달 19일 저녁에 누아누 청년회관에 150여 명이 모였을 때 100달러를 모금하였고 1년 경비로 3백 달러를 책정했다. 회원 자격은 15세 이상 30세 이하로 하고 그 이상은 찬성회원으로 하였으며, 조국정신고취, 친목으로 청년 단합 경영, 사회적 수양을 실현하여 재미한족의 장래준비 등을 목적했다.

1932년 2월 26일 저녁 7시 30분에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소년동맹단 주최로 한인기독교회, 와일누아감리교회, 와히아와감리교회 그리고 호항감리교회 등 네 교회의 찬양대가 참가하여 찬양 경연대회가 있었다. 이날 이용직 목사가 목회하는 한인기독교회 성가대가 1등을 했다. 2등에는 이동빈의 와일누아감리교회 찬양대였다. 

그해 3월 1일 오전 9시에 제13주년 삼일절 기념식이 민단 주최로 호황 밀러 회관에서 있었을 때 박종수와 함께 이용직이 연설했다. 이날 지방단장 이호진의 사회 하에 조경천의 기도와 홍한식의 독립선언서 낭독, 교민총단장 차신호와 부인 구제회 중앙부장 이점순의 축도문 낭독이 있은 다음에 박종수와 이용직의 연설이 있었고 그 후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부인 구제회 창가대의 병창 다음에 조광원 목사의 축도로 폐회했다. 그날 7시에는 동지회 주최로 선교기념관에서 수백 명이 모여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다. 바로 그날 이용직은 평양에 계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고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1932년 10월 2일 주일에 한인기독교회에 아침 예배와 오후 예배가 있었다. 11시 예배에 남자 203명과 여자 101명이 출석하여 총 204명이 참석했다. 그날 오후 7시 30분 예배는 남자 90명과 여자 50명이 참석하여 총 140명이 참석했다. 

1933년 6월 23일에 이용직의 아내 김 부인이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김 부인은 병원을 개업할 예정이었다. 그해 9월 16일에 강영각 부부의 결혼 1년 기념식에 30명의 남녀 친구가 모였는데 이용직도 참석했으나 혼자였다. 이날 참석한 자로는 박동환 목사, 안창호 목사도 있었다. 하와이국민회 총 임원이 총사직하였을 때인 1934년 5월 27일의 정오에 와이키키 공원에서 야유대회를 열고 사회발전책 연구를 목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를 다시 진흥시키도록 토의하였는데 이용직은 14인의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8월 23일과 24일의 대한민국 16년 국무회의 제56호에 따르면 이용직은 주포 의무 행서 의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용직이 그의 부인이 귀국한 다음 해인 1934년에 귀국하였으니 그가 개척한 한인기독교회 목회는 약 3년간이다.

이용직은 1934년에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는 평양에서 안경원을 열고 해방되던 1945년까지 이 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이 기간 일제에 의해 4차례나 투옥 당했다. 6.25동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7월 12일 서울에서 납북당한 뒤 그 후 소식은 알 길이 없다.

damien.sohn@gmail.com

03.1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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