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김준성(1900-?)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준성은 1900년 3월 3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했다. 그는 10살에 캐나다장로교 선교부가 개척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서울의 장로교 미션스쿨인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고향인 단천으로 내려와 그곳의 만세운동에 가담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3년 일본 동양대학에 입학한 지 약 1년 후 일본 대학으로 전학해서 1928년에 졸업했다. 일본대학에 재학 중 교사자격증을 얻어 그는 성진 보신여자고등보통학교, 회령 보흥여자고등보통학교,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만주의 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가 주로 활약한 곳은 원산이었다. 원산 YMCA 총무를 역임했을 때 3년제 남자 중학교인 청운학원을 설립하는가 하면, 원산에서 덴마크식의 협동조합을 창설했다. 1929년 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때 그는 YMCA 청년을 규합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1930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동경 한인 YMCA 부총무로 활동하였다. 1년 후 귀국해 영생고등보통학교 교사와 학감을 역임했다. 당시 함흥과 흥남에 조선 공산당 본부가 설립되어 적화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그는 반공교육을 하였고 ‘종교는 아편인가?,’ ‘공산주의와 기독교,’ ‘유물 사상과 유심론,’ ‘천국 운동,’ ‘지상천국 건설 운동,’ ‘기독교 사회주의’ 등의 여러 편의 글로 반박했다. 그런데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일본당국은 사과와 함께 그를 석방하였다고 한다.

 

뉴욕한인교회

 

김준성은 1934년 캐나다 선교사 주선으로 토론토의 임마누엘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신학교를 졸업한 1937년에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고, 1940년에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석사학위를 받은 그가 1941년에 보스턴대학원에 등록했는데 뉴저지의 드류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김준성은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했다. 1941년 11월 23일 저녁 6시 30분에 추수감사절 만찬회가 있었는데 40여 명이 모인 중에 김준성도 있었다. 본 교회 식당에서 일반 교우들이 모여 한국식으로 준비한 만찬이 있은 다음 박리근의 사회로 임창영 목사와 지방감리사 피어슨 박사와 뉴욕감리교 총무부 재무 뉴겔 박사를 표창하는 예식을 거행했다. 

임창영의 주선으로 드류신학대학에 다니던 김준성이 1942년 5월에 뉴욕한인교회 제 5대 목사가 된다. 당시 교회주소는 633 W. 115th Street였다. 그의 영문 이름은 John Starr Kim이었다. 그의 이름 ‘준’을 한글로는 ‘요한’으로 번역되는 ‘John’으로 그리고 ‘성’을 ‘별’이라는 의미의 영어 ‘Star’에 알파벳 ‘r’을 하나 더 붙여 ‘Starr’로 한 것으로 보인다.

김준성의 첫 사역은 조홍식의 장례식 주례였다. 뉴욕 지방회 회원이자 ‘신한민보’의 통신원인 조홍식이 오랫동안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퍼슨 병원에서 신병 치료를 받았는데 의약이 무효하여 1942년 5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작년에 결혼한 부인 임헬련 여사와 6개월 된 어린이를 남겨두었으니 애석한 정경은 인세 상망 중에 가장 비참한 일이었으므로 그 유족과 친구들이 애도했다. 그달 5일 필라델피아 장의사에서 김준성의 주례로 영결식을 행하고 그날 발인하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뉴욕과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인 동포가 많이 참석하여 성대하였고, 뉴욕한인교회와 국민회 뉴욕 지방회는 조화를 보냈다.

그달 24일 하오 6시 30분에 뉴욕 한인교회에서 임창영 목사 송별회와 김준성 목사의 신임환영회가 있었다. 먼저 정식 순서에 들어가기 전에 박리근 부인이 특별히 차린 만찬을 나누고 교회 부인회가 준비한 선물을 목사에게 드렸다. 이후 김영육의 사회로 송별회가 있었다. 정기원 박사의 의

미심장한 송별사와 환영사가 있은 다음 박리근 내외와 류순기 내외와 조홍식 부인이 로스앤젤레스로 떠나므로 송별하는 순서를 겸하였다. 떠나는 임 목사와 박리근에게 기념품을 진정하였고 이들의 답사가 뒤따랐다. 

김준성의 중대 사역은 교인의 통합이었다. 임창영 목사에 대해 불만을 가진 소수의 신학생 그룹이 자기들끼리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김준성이 중재역을 담당하여 통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학생회를 도와 영문회보인 The Free Korea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었다. 매월 3천부를 인쇄하여 3년간 미국정부 관원들과 국회의원과 기타 애국 사회 요인들에게 배부해 독립과 해방운동에 이바지했다. 

뉴욕에 거주하는 최 폴이 1942년에 종군을 하였다. 이에 그의 종군을 축하하기 위하여 그해 12월 10일 하오 6시 30분에 연동루에 축하만찬회를 열었다. 다수 청년이 참여한 가운데 음악구락 지도자 윤성덕이 의식사를 담당하였고, 이어 뉴욕한인교회 목사 김준성과 음악 구락부원의 축사가 있었다. 내빈 중에서 출사를 한 자가 많았다. 이어 최 폴의 답사가 있었는데 최선을 다하여 미국과 한국을 위하여 싸우겠다고 의지를 다짐했다. 모임 후 그의 친구 전창수가 후식을 대접하고 11시에 폐회했다.

1943년의 새해를 맞이한 나흘째 날에 이관하가 별세했다. 작년 9월에 입원하여 위장병의 수술을 받고 치료 중 죽음을 맞았는데 그의 딸 아이린이 시카고에서 부음을 받고 뉴욕에 와서 발상하였다. 임성호의 주선으로 장의를 갖추어 그달 8일 뉴욕 한인예배당에서 김준성의 주례로 영결식을 행했다. 고향 친구인 김 경은 고인의 약력을 담당하였다. 롱아일랜드 매장지에 안장하였다. 그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1905년에 유학차로 도미하였고 향년 54세였다.

그달 17일에 뉴욕한인교회 집사이자 국민회 뉴욕 지방회 서기이고 뉴욕한인 음악구락부원인 최창수가 학생 신분으로 태평양전쟁에 종군하여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이에 위의 세 단체의 주최로 연동루 식당에서 종군 축하식이 있었다. 윤성덕 여사의 식사 후 국민회 대표 정기원 박사와 교회대표 김준성 목사 그리고 음악구락부 대표 차진주의 축사가 있었다. 이날 참석한 육군 복무 중인 이성훈을 축하하였다. 최창수는 답사를 통해 미국과 한국의 의로운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고 다짐했다.

그달에 김술근이 뉴욕한인교회를 방문하고 교회 유지금을 기부하였다. 그는 얼마 전에 별세한 부친을 기념하여 본 교회에 피아노 한 대를 기증했었다. 그는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의 수리과 교사로 시무하다가 도미하여 서북대학에서 공부하고 화학사 학위를 받았고, 그 후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하면서 보스턴에 있었는데 5개월 전에 자진하여 세계 제2차 대전에 종군하여 육군하사가 되었다.

1943년 10월 30일에 김현철의 부인이 별세했다. 김현철은 몬태나에서 다년간 농사를 경영하다가 3년 전에 뉴욕 롱아일랜드 그랜코브로 이사했다. 김현철의 부인은 서울 출생으로 향년 52세였는데 기독교에 신실한 부인이었다. 7남매를 이 땅에 두고 돌아가셨으니 김준성의 주례로 열린 11월 3일의 장례식은 눈물바다였다. 다행히 사위 한기만과 친구 스페리 자이로스콥 회사 사장 R.E. 길모어 내외와 뉴욕의 김진억 등이 참석하여 유가족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해 11월 17일 하오 8시에 뉴욕한인교회에서 국민회 주최로 정기원의 사회 하에 순국선열 기념식이 있었다. 이 기념식에서 김준성은 기념사를 담당했다. 그의 기념사는 애국가 합창, 김 경의 기도, 국기 경례식, 정기원의 식사와 선열 사적 보고, 곽정선의 첼로 독주 후에 있었다. 그의 기념사 후에 배민수 목사의 소감과 일동의 묵상 후에 폐회했다.

 

다음 달 2일에 뉴욕에서 경제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카이로 선언으로 연합국의 루즈벨트와 처칠과 장개석 등이 전후 한국 독립을 약속하였으므로 전쟁 후 한국이 독립하고 근대적 산업국이 되어 국제에 견고한 기초를 건설하여 2천6백만 동포의 생활 번영을 보장하려면 장래 한국의 공업, 산업, 농업, 무역 등에 착안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고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고 계획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경제연구회가 조직되었다. 

당일 준비금으로 약 2천불을 모금하였고, 경제연구회 임시조직을 결의하였는데 김준성은 정기원, 류일한, 배민수, 김세선, 김성덕과 함께 장정 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날 임시의장에 류일한, 임시 서기에 김성덕, 임시 재무에 정기원과 김진억, 임시 선거위원에 김 경, 김세선, 전처선, 김진억, 선우천복, 통신 및 선전 위원에 이종숙, 김성덕, 김진억을 선출했다. 그런데 6개월 후 김준성은 배민수, 전처선, 김세선, 선우천복, 김진억, 이종숙과 함께 본 연구회를 탈퇴하였다.

김준성은 교회에 거주하면서 모르긴 하지만 혼자서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봉사를 자원하여 교회당 내부를 전부 수선하여 코퍼 파이프를 새로 개설하여 페인팅과 계단과 피아노와 주방 시설과 지하실 수선 등 건물을 고쳤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완성한 곳이 뉴욕한인교회로 알려져 있다. 1944년에는 김준성이 안익태의 애국가를 영어로 번역해 영문 악보 수백 장을 인쇄해 배포했다. 2절까지 한글 가사의 발음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의역해 멜로디에 맞도록 제작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행사에 초청된 주류 사회 정치인 등에게 가사를 이해시키기 위해 제작됐을 가능성이 있다. 1부에 25센터였고, 10부 이상 주문할 경우 할인해 주었다. 당시 안익태가 사용했던 에머슨 피아노가 본 교회 지하에 보관돼 있다.

박사학위를 위하여 드류대학으로 갈 예정이었던 김준성을 이어 배민수가 본 교회 목사가 되었다. 1944년 12월 28일 배민수의 목사 환영 특별 예배가 있었으므로 김준성의 목회는 약 3년이 된다. 

1956년에 김준성이 뉴욕 자마이카 지역에 롱아일랜드한인교회를 창립했다는 보도 이후 그의 족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damien.sohn@gmail.com

 

02.1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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