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장세운(1895-1985)

-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장세운은 1895년 10월 8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희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도미했다.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하고 1924년 5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본 대학원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카고 한인교회 전도사

 

1919년 시카고에 한인 기도회가 시작됐다가 중단된 가운데 1923년에 시카고 남쪽의 유학생 기도회와 북쪽의 한인 이민자 기도회 등 두 기도회가 있었다. 그해 10월 17일에 북쪽 한인 이민자 기도회가 공동회를 열었다. 이날 장세운을 위시하여 서백원, 강영소, 강정근, 최흥원, 강혜순, 이명우, 김형린, 박리근, 박장순, 김승제, 김 경, 염광섭이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교회 설립을 결의하고 이를 위하여 111달러를 헌금하였다. 

해를 넘겨 1924년 7월 23일 김 경 등 대표들이 미국인 선교 총회 회장이자 게렛 신학교 교장이었던 호겔트 박사를 만나 오는 주일부터 예배를 시작하되 목사의 사례비는 선교부가 책정하기로 하였다. 1924년 7월 27일 오후 2시에 서부 청년회 강당에서 교회 설립 예식이 있었고, 예배 후 행정부와 이사부를 조직했다. 장세운은 염광섭과 더불어 행정부 내의 전도사로 선임되었다. 

장세운의 전도사직은 1928년 말까지였으니 3년 6개월간이었다. 1925년 9월 26일에 북미유학생회가 발행한 ‘우라키’ 제1호 잡지에 장세운이 쓴 ‘과학의 일우에서 찰오한 종교의 일면’에서 그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본 잡지의 편집장이자 자연과학부 기자였다. 

 

시카고 한인교회 목사

 

미국 감리교 시카고 남부 지방 감리사 에드워드 슈츠 목사는 1927년 12월 18일에 한인들과 함께 내지 선교부 산하의 개척교회로서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를 조직했고, 이듬해 웨스트 옥데일 820번지의 2층의 아파트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다. 1928년 말 한승곤 목사가 교회를 떠난 후 전도사였던 장세운이 본 교회 목사로 피선되었다. 그가 유학생 총회 총회장이자 시카고 사회에 다년간 거주한 자였음으로 일반 교우들이 많이 기대하고 환영했고, 시카고 기독 청년회 회장 배동선은 유학생회에서 크게 공헌한 장세운이 목사가 된 기회로 대대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해 12월 말에 독감이 성행한 가운데 한인교회는 신년을 맞았다. 겨울 방학을 맞아 학비를 벌기 위해 위스칸신 대학의 이춘구 등 10여 명이 본 교회의 기숙사에서 기거하였다. 정월 2일에 상항을 떠나 한국으로 귀국한 자 가운데 상업하던 강영대, 서북대학의 황에스더, 수리학을 공부한 김익수가 있었다. 시카고를 떠난 자로는 장태환이 학교 입학을 모색하다가 한국으로 귀국했고, 오천석은 서북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교회 이사인 김 경의 부인이 맹장염으로 웨스트사이드 병원에 응급 수술을 받았다. 

2월에는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을 졸업한 김명선이 서북대학에서 그리고 한성곤 목사의 아들 한세광이 시카고 루이스 학원에서 공부하기 위해 왔으니 교회 빈자리가 채워졌다. 과학연구회 제1회 강연이 본 교회당에서 있었는데 아모리공업학교의 김성호는 대두의 화학적 성분과 그 응용에서 콩의 용도가 광대함을 표시하였고, 센트럴 대학생 박정육은 ‘화학과 문명’이란 제목으로 의미 깊은 강연을 하였다. 3월에는 국민회와 교민당과 동지회 등 세 정치단체가 삼일절 기념식을 가졌고, 그달 31일의 부활절에 캐나다 내한 의료선교사였던 스코필드 박사가 설교하였는데 교인들은 고국의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그의 길이 바빠서 섭섭히 작별하였다.

4월에는 평양 숭실의 김인준 선생이 시카고의 무디 성경학원에 입학했다. 박인덕이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돌아가던 길에 한인교회에서 설교하였다. 고물상을 경영하던 양재형의 미국 부인이 별세하는 바람에 막내딸도 불행히 세상을 떠났고, 어린 다섯 자녀는 당분간 고아원으로 갔다. 5월에는 어머니날을 맞아 ‘시카고 부인회’가 한인교회당에서 만찬회를 열고 부인 문제와 소년 문제에 대한 강연을 마련했다. 시카고 고려학우회가 한인 예배당에서 정일형과 이용영 등 신입생을 위한 환영회를 열었다. 이화학당에서 가르치던 메리 R. 힐맨과 와렌 A. 칸들러, 공주 영명여학교 교장 아다 E. 맥키 등 세 여자 선교사가 시카고를 방문하여 27일 저녁 시내 워싱턴 카페테리아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6월 6일 한인 예배당에서 있었던 시카고 고려학생회 주최 웅변대회에 6명이 참석했고, 일반 투표에서 루이스 학원에 재학 중인 김호철이 1등을 했다. 한승곤이 과채상을 개업하였고, 나성에서 최근 이주한 이옥성이 과채상의 마춘봉과 동업하였다. 미조리주 팍 대학의 길진주가 시카고 무디 성경학원으로 전학했다. 13일부터 18일까지 본 교회에서 북미 학생회 중서부 지방회가 시카고 대회를 개최했고, 18개 대학에서 온 50여 명이 모여 경제문제와 농촌 사회문제를 토의하고 학술 강연도 있었다. 

교인이자 서북대학 상과생 한순교가 동 대학의 중국인 왕쌍풍과 동업한 원동무역공사가 문을 열었다. 하희옥과 홍영태가 동업하여 세탁소를 개업했는데 본 세탁소는 시카고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들은 세탁업 조합에 가입한 최초 동양인이 되었으니 시카고 세탁소 사업의 원조가 된다. 서울 중앙기독 청년회 총무 구자옥이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이곳 청년회에서 한국 농촌 구제 사업을 설명하였다.

시카고 건스 음악학교를 졸업한 현재명이 서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던 7월, 시카고대학 부속 중학생 김성봉이 정신 이상증이 생겨 형인 충남 재산가로 저명한 김성준이 시카고를 방문했고, 동생을 데리고 귀국하던 길에 한인교회에 30달러를 기부하면서 “이 교회는 종교사업뿐 아니라 시카고 한인회관의 직무까지 겸행함을 보고 매우 감축하였습니다. 일반 동포가 합력하여 앞으로 더욱 확장시키기를 바랍니다”라고 치하했다. 

10년 전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 양일태가 득남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을 유학 보낸 후 삼일운동에 아들이 일본의 악형에 순직한 후 슬픈 세월을 보내다가 작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한 주일학교 대회에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건너와서 사랑하고 그리던 남편을 다시 만나 득남의 경사를 보았다. 본 교회 이사 이병두도 득남했다. 에반스톤 서북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윤성덕이 이화학교 음악교수로 떠났는데 유학 기간에 그의 언니 윤심덕의 현해탄 투신자살 소식과 부친의 부음에도 잘 견뎌낸 결과였다. 

하와이에서 유학하던 임귀선이 서북대학교로 전학하였던 8월, 링컨 공원에서 교회 피크닉이 있었다. 이제득이 수월 전에 도미하여 유타주 밋벨에서 일하고 가을 개학 시기에 맞춰 시카고로 왔고, 서북대학에서 교육학을 졸업한 고재완은 뉴욕 콜럼비아 대학으로 전학했고, 북가주 오클랜드의 간호부 김수산아가 차를 타고 시카고로 왔고, 상항에 다년 거주하던 황보정걸이 시카고로 와서 사업을 물색하였다.

9월, “미시간 호수를 거쳐 오는 가을바람이 슬슬 불어오며 누른빛을 물들인 나뭇잎은 앞마당을 덮여 놓았는데 시카고로 와서 한여름 동안을 지내던 우리 학우 제군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할 때를 이용하여 고려학우회의 주최로 중서부 각 대학의 웅변회와 돌아가는 학우들의 송별회를 그날 하오 8시 반부터 한인 예배당에서 개최하였다.” 

연사와 연제는 서북대학 김 훈의 ‘수양 시대에 있은 우리의 먼저 할 일,’ 서북대학생 한세관의 ‘자주의 의식에서 출발하자,’ 멕코믹 신학생 강택모의 ‘조선인,’ 루이스 학원의 김은석의 ‘신조선 건설에는 분업적 기능이 필요,’ 미조리 대학생 한숭인의 ‘조선의 공업 발전책,’ 듀북 대학의 백난두의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까’였다. 본 교회 창립발기인의 한 사람이자 300석의 대형 식당인 워싱턴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던 김 경 부부가 도미한 지 26년 만에 사업차 고국을 방문하였고, 미국 북감리교의 요청으로 도미한 신흥우가 본 교회에서 우리 인구의 8할을 점령하는 농민 대중을 위하여 봉사할 지식과 기술과 정신이 어울려 나가도록 노력하라고 권면했다. 듀북 대학생 김태선이 학교를 주선 중이었고, 도미한 차상달이 서북대학에 입학하였고, 본 교회 이사장과 평신도 대표를 역임한 나재원이 캘리포니아에서 온 김수산아와 결혼했다.

10월에는 본 교회에서 시카고 고려학우회가 신입생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강택모의 환영사에 이어 김재성, 김은석 그리고 이제목의 답사가 있은 후 포도와 과자 등으로 다과회가 있었다. 이날 장기영의 이주로 강택모가 서기로 피선되었다. 11월 감사절 저녁에 한인교회는 40여 명의 교우가 만찬회를 열었다. 이날 새 이사부 장정을 통과하고 교회 목사나 담임 교역자를 매해 연말에 일반 투표로 선정키로 했다. 신임 이사 9인 중에 장세운은 빠졌다. 

1929년 12월 15일에 장세운이 본 교회 이사회에서 목사직을 사면하였다. 이로써 그의 목회는 만 1년이 된다. 그의 후임으로 무디 성경학원 유학생 김인준 목사가 내정됐다. 

 

전도부원과 이사

 

1931년 2월 염광섭이 담임 교역자로 선정되면서 교인 중심의 교회를 만들 때 장세운이 전도부원과 이사부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미국 감리교회가 옥데일 애비뉴 건물을 14,000달러로 구매하고 한인교회가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되어 수리비 700달러를 모금하기 위하여 ‘원래 교우가 소수인 중 과반이 학생임으로 재정 능력이 심히 잔핍하여 은혜로운 마을 불가불 청케 되었습니다. 잊지 마실 것은 전무후무할 이것이 한 번이올시다... 다소간 동정해 주시기를 깊이 믿고 바라나이다”라고 신한민보에 게재할 때 그의 이름도 있었다. 그해 7월에 장세운은 이사로 재선되었다. 

시카고 서북대학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신학교에서 연구하던 갈홍기 목사가 1931년 7월 19일에 취임식이 있었다. 장세운은 이 취임식에서 사회를 담당했다. 이듬해 2월에 전경무가 담임 전도사로 취임했을 때 5, 60명이 모인 가운데 이사장 장세운이 “가슴이 터지는” 송별사와 환영사를 하였다. 1934년 2월 조승학이 신임목사로 취임하였고, 그달 11일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교회 이사장 장세운의 사회로 교인대회를 개최하였다. 1935년 조승학 목사의 사임으로 장세운 등으로 4인 전도부를 조직하고 목사 청빙 때까지 교회 사무를 담당했다. 그해 7월에 장세운은 8명과 함께 신임 이사로 선정되었다.

이은택 목사가 시무하던 1942년 정세운은 시카고 린컨 애비뉴 2152번지에서 자영업에 종사했는데 그해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의 서기로 청빙 받아 약 20년간 재류하던 시카고를 떠나 그해 6월에 미국 가주로 이주했다. 1960년경 북가주 몬트레이의 미국 국방언어연수원에서 한국어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한 후 1985년 2월 12일에 향년 90세로 영면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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