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이인신(1879-?)

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이인신은 1879년 서울 수정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이성준의 이름으로 1904년 6월 1일 콤틱 선박을 이용하여 하와이로 왔다. 이인신이 ‘신한민보’를 통해 동포사회에 소개되기는 이름 고치는 광고에서다. 1910년 3월 9일 자의 “이름 고치는 광고”에서 그는 “경계자는 이성준으로 통용하옵더니 자금 위시하여 이인신 李忍信으로 행세할 터이오니 지구 첨군자는 조량하시옵소서”라고 썼다. 참을 忍에 믿을 信으로 바뀐 새 이름은 그가 참아 하나님께 믿음직스럽게 살아가겠다는 결심으로 보인다. 

1907년에 메리 스트월트 부인이 조직한 남가주 엎랜드 한인장로교회의 1910년경의 교인 명단에 그의 새로운 이름인 이인신이 보인다. 스트월트 부인은 한인 동포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부인으로 업랜드제일장로교회 교인이었고 이 지역의 농장주인이었는데, 위의 33명의 한인 동포가 자신의 농장에서 노동하였다. 1913년에 이인신이 남가주 클래몬트 국민회 총무가 되었으나 사업상 거리가 있어 사임하였지만 아경 동지 구조금, 클레몬트 학생양성소 겸 예배당 건축비 등으로 기부에 인색하지 않은 데서 그의 이름 ‘인신’의 의미를 발견한다.

 

삭도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13년 말에 이인신이 북가주 삭도(새크라멘토)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도 그는 의무금, 서간도 기황 구휼금 등으로 기부를 이어갔다. 그는 삭도한인감리교회에 등록했다. 본 교회는 1907년 양주삼의 전도사업으로 교회가 조직되었다. 

1917년 11월 29일 하오 7시 30분에 남녀 동포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삭도한인감리교회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본 교회로서는 최초로 가지는 추수감사절 예배였고 특별히 대풍작을 얻은 가운데서 뜻있는 예배였다. 이 예배에서 이인신이 사회를 보았다. 이인신이 개회 취지를 말한 후 김홍균이 기도하고, 이남조 부인이 감사가로 독창한 후 최능익이 연설(설교)을 하였다. 이후 양제희와 김요한이 합창을 하였고, 누군가 또 연설(설교)을 맡았으며, 사덕순이 독창을 하고 예배를 마쳤다. 예배를 드린 후 다과를 나누며 여흥과 연극을 꾸며 매우 재미있는 시간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인신이 1915년 7월 인후병으로 3, 4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다가 차도를 보였는데 2달 후인 9월 22일 밤에 결혼식을 거행했다. 신부는 그달 13일에 도미한 김남조였다. 삭도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이대위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한 후 이인신의 주택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이날 결혼식에 참석한 한인 동포 하객은 6, 70명이나 되었다. 이해 8월 20일에 상항에 도착한 김남조는 당시 20세 생일을 지나고 2달이 되었는데 이인신의 부인 김남조가 아닌가 싶다.

1918년 10월 10일 하오 3시에 북가주 한인 남미 이민교회 지방연회가 상항 피췻저럴 예배당에서 소집되었다. 감독 뚜보스 목사의 사회 하에 이대위 목사의 기도로 정식 연회를 개최했다. 임정구 전도사를 서기로 선임한 후 출석을 점명하니 상항교회의 이대위, 황사선, 김정은, 최진하, 김영훈 그리고 삭도의 임정구와 김홍균 등 7인이 출석하였다. 서류를 낭독한 후 각 교회 보고가 있었다. 

이날 이인신은 김홍균과 함께 삭도교회 전도사로 새로 임명을 받았다. 임정구, 황사선, 양주은 그리고 삭도의 최능익은 재임되었고, 그리고 김영훈, 최진하는 상항교회 전도사로, 한치홍은 맨티카 교회 전도사로 새로 임명되었다. 

임정구 전도사가 순회 목사로서 삭도 한인감리교회를 목회했다. 삭도 외에도 그는 옥글랜드, 스탁톤, 맨티카 그리고 윌로우스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를 섬겼다. 편의상 교회라고 적지만 기도처라고 함이 정확하다. 삭도 한인감리교회의 출석 교인은 70명이었고 이 중 63명이 활동 교인이었다. 임정구 전도사가 삭도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지 못할 때 이인신은 김홍균과 최능익과 함께 삭도 한인감리교회의 예배 등 목회를 감당했다. 그런데 약 1달간 사역한 것 같다. 

 

윌로스 한인 감리교회

 

이인신은 가족과 함께 윌로스로 이주한다. 그는 백신구의 주택에서 길 하나 건너 거주했다. 윌로스에 한인감리교회가 있었으므로 이인신이 행정적으로 전도사로 파송을 받지 못했어도 임정구 전도사가 방문하지 않을 때 예배를 인도하고 교인을 심방했을 것 같다. 그의 목회는 길어도 삭도로 이주하던 1919년 4월까지 약 5개월 동안이다. 본 교회는 백인 감리교회에 적을 두고 이인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신한민보를 통하여 비보를 접한다. 이인신의 부인 김남조가 서반아 독감에 걸려 1918년 11월 16일 토요일 새벽 6시에 별세했다. 다음날 주일에 양주은, 백신구, 김찬일, 이무경, 김관유, 서덕순, 강화중, 최능익, 최봉민 등과 김종림의 농원 대표 이영기 등 동포 10여 명과 백인 남녀 내빈 36명이 백인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백인 카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기도하고 찬송한 후 발인하고 3대의 자동차와 무수한 생화와 백인 감리교회 부인 찬미대가 호상하여 산상에 이르고 하오 4시 30분에 개인 묘지에 하관하고 안장했다. 하관할 때 백신구와 위의 한인 동포들이 묘지 땅을 팠다는 기록이 있다. 신한민보는 ‘결혼한 지 4, 5년간(3년간) 가정이 화목한 가운데 어린이들이 있어 한참 재미를 볼만하고 최근 농사를 거두어 마치고 궂은 비 깊은 겨울에 서로 화로를 의지하여 웃으며 명년 경영을 의론할 때에 홀연히 백년 인연을 유명에 끊겼으니 씨는 응당 중년의 불행을 슬퍼할 지로다’라고 한탄했다. 이번 서반아 감기로 별세한 미주 동포는 원창희 등 남녀 다섯 명이나 되었다. 

다음 달인 3월에 대한독립선언 ‘삼일절’ 제2회 축하회로 삭도 여관에서 47명이 모여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일동이 국가를 부른 후 이인신이 기도 순서를 맡았다. 그 후 사병순 목사가 취지 설명을 하였으며 김석은이 축하가를 독창했고, 삭도한인감리교회 김홍균 전도사가 연설하였는데 그 제목은 “대한 국민 된 자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였다. 그의 연설 후에는 김석은과 오복수가 중창했고, 누군가 연설을 하였으며 국가를 일동이 부른 후 김석원과 김지혜가 기도하고 만세를 부른 후 마쳤다. 

부인 별세 후 이듬해인 1919년 4월에 이인신은 삭도 한인여관 겸 양찬관을 열었다. 주소는 더드 스트리트 1119번지였다. 앤콜 호텔이라는 로마자 표기를 가진 한인여관은 ‘서양식 제도로 문방 제구를 상등으로 차려놓았고, 양찬관은 위생적으로 선미하게 하오니 동포는 삭도 지방에 오시면 본관을 찾으시라’는 광고를 냈다.

상항에 수년간 거주하던 중 1927년 1월에 얼굴에 화상으로 중상을 입더니 이인신이 그해 7월에는 설상가상으로 이민국에 체포되었다. 두 달 후인 9월에 석방된 그가 신한민보에 게재한 “절망에도 희망이 있고, 죽을 병에도 살 약이 있어”라는 글을 통해 요나를 빗댄 감사하는 그의 신앙의 면모를 찾을 수 있어 과연 전도사답다고 하겠다.

“박복한 이인신이 일도에 아내와 자식을 잃고 불쌍한 어미 없는 은홍을 데리고 동서에 표류하며 친구의 신세도 많이 지며 상항까지 와서 병에 걸린 때와 잠자던 때를 빼고는 노동을 하나 많지 못한 월급 생활을 하여 구구한 생명을 보전하며 불쌍한 어린 은홍을 공부나 시켜줄 생각으로 백인의 집에 일하다가 법률의 위반이라 하여 이민국에 피착되매 세상에 온 후 처음 당하는 일이더라. 비로소 오늘 법을 알고 보니 본국으로 돌아가는 명령을 받을 것밖에는 다른 계책이 없는 이 때에 이인신의 생각에는 본국으로 가라 하면 수십여 년에 배운 것도 없이 빈손으로 본국으로 갈 생각이 조금도 없고 금지옥엽 같이 기르던 딸을 영 이별할 생각을 하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이때 열기가 머릿속에 점점 가득하매 눈이 캄캄하여지더라.

고로 돌아가라는 영을 받아 배만 태워주면 결코 깊은 태평양 물속에 있는 고기 배 속에 장삼을 하여 세상에 원통한 것과 괴로운 것을 잊고자 하였더니 뜻밖에 여러 친구의 뜨거운 애정과 의로운 성의가 모여 (이)인신을 실어 내 온 여러분도 무한히 기쁘시지마는 (이)인신의 기쁜 마음은 마치 7년 태한에 감우를 맛본 것과 같고 9년 홍수에 햇빛을 다시 본 것같이 기쁜 나의 중심을 기울여 열심 성역으로 도와주신 여러 형제자매께 무한 감사하며 영원히 잊지 못하겠나이다.” 

 

다음 달 그는 스탁톤으로 이주했다. 그는 재만 동포 동정금, 삼일 기념품, 인구세, 고 이대위 목사 장비, 내지 수재 구제금 등으로 그를 감옥에서 석방케 한 동포의 은혜를 갚았다. 1929년 4월에 다시 상항으로 이주한 후에도 전명운 부인 장비, 성탄절 때 고아원에 터키 한 마리 기부, 조선 여자대학 기부 등으로 은혜를 갚는 일은 이어졌다. 

1931년 10월에는 나성(로스앤젤레스)으로 이주하여 나성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한다. 그는 임정수와 전덕문과 함께 이인선이 서양 식당을 개업하였는데 그 사업이 매우 유망하였다. 이런 가운데 딸 은홍이 1936년 7월 5일에 황사용 목사의 주례로 임준기의 차남 피터와 결혼하였으니 이만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없었으리라. 

이듬해인 1937년에 이인신은 중가주의 다뉴바로 이주했다. 이곳에서도 의무금과 인구세, 임시정부 후원금, 중국 항일전쟁 동정금, 삼일 성금 등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은혜 갚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1940년 이후 내지 한재 의연, 광복군 후원금, 의무금, 나성 한인 양로원 기부, 맛단사스 구제금, 독립금, 고 한석근 장례 동정, 군사 운동금, 인구세 등으로 은혜 갚는 일은 끝이 없었다. 1945년 그가 리들리를 거쳐 상항으로 이주하더니 이후 그의 발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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