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68. 최진하(1889-1967)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진하는 1889년 3월 3일에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남녀 동포 26명과 함께 유학을 목적으로 차이나 선편으로 도미한 때가 1916년 9월 30일이니 27세였다. 

1918년 1월 24일에 게재된 북미 지방총회 학무부 조사에 따르면 최진하는 1918년 1월 상항의 야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으니 도미한 후 어학공부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1918년 8월 29일 신한민보에 “먼저 실력을 양성하면 독립은 우리의 소유”라는 글을 게재한 대로 그의 유학의 목적은 독립에 있었다. 아래에서 그의 글을 소개한다.

 

오호라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 우리 민족이 치욕을 당한 지가 벌써 8개 성상이 되었구나. 볼지어다, 그동안 우리의 당한 형편을 생각하니 저 고국강산에 있는 노부모 형제 유아들은 비옥한 토지와 화려한 강산과 풍부한 금은 동철이 구비하였을지라도 모두 원수에게 내어 맡기고 오늘 충청도 내일 경상도 모레 북간도 이리저리 래왕하며 요행히 발붙일 곳을 찾으려 하며 고국을 이별하고 외양에 표류하는 우리들은 이곳저곳 정처 없이 왔다 갔다 하며 원치 않은 의인의 치소를 종종 받으니 나라 없는 민족이라 어디 간들 대접받고 평안하며 유족한 생활을 맛볼쏘냐. 할 일 없이 세상에 용납지 못할 것 밖게 또다시 없으니 가련하고 불쌍한 것이나마 없는 민족이로다.

옛날 유대국이 멸망한 후에 그 민족이 본국을 떠나 수초 생활로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여러 곳에 표류하여 능욕을 당하며 천대를 주는 밑에서 학살을 당함이 심히 많았고, 근년에 러시아에서 7천인의 학살을 당할 일도 있도다. 그러나 호소할 곳이 없이 호천 망국할 뿐이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나라 망한 원인밖에 또다시 없는 일이로다. 그런즉 나라 없이 동서 사방에 표류하는 우리 동포 제군들이여 저 유태족의 당한 일을 회상할지어다.

오늘날 이 지경을 당한 원인을 연구하게 되면 나, 너를 무론 하고 두말없이 스스로 취한 화라고 단언하리로다. 이 말에 대하여 질문할 이가 있을지 모르거니와 있더라도 이 글 쓰는 자는 단언하노라. 내의 화려한 강산을 원수에게 빼앗기고 이 같은 치욕을 당하는 것도 나의 죄로 인함이요.

나라가 부강하고 문명하여 행복을 누리는 것도 나의 할 일을 마땅히 함으로 되는 것이니 그런고로 크며 적은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 민족이 문명하면 따라 문명한 나이 되고 민족이 야만이면 나라도 따라 야만이 되는 것은 저 삼척동자에게 물을지라도 지체 없이 대답하리로다.

어느 나라 민족을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처지와 같으면 원수를 미워하지 아니함이 어디 있으며 속박 편하기 도무지 아니할 자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지금 우리 대한인의 심리와 학술 기예 등을 관찰하게 되면 나라 독립은 둘째요 내의 한 몸을 처치할 방법이 완전치 못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노라.

시험하여보라. 우리의 원수가 물러가고 자유 독립할 기회를 당하였다 가정하면 정부 대관 조직에 참예할 이 몇 분이며 항해술을 맡을 이 몇 분이며 기차업을 주관할 이 몇 분이뇨. 이에 대하여 한두 분이 있을는지 모르거니와 민족 정도가 이 모양이고 독립이니 무엇이니 하여도 우리의 실업은 말만 되고 효과는 없을 것이 분명한 일이로다.

그런즉 의양에 유리하며 고와 락을 같이하는 우리 중에서 주초 될 이도 있고, 동양 지체될 사람도 있어야 할 터인즉 우리는 각각 형편 따라 재질을 따라 준비하면 자유 독립은 우리의 영구한 소유물이 되겠고 우리의 원수 저 동호(일본을 통칭하는 말)는 태양 빛에 안개같이 소멸하리니 곧 우리 대한의 독립 기념일이 되리로다. 새날을 당하여 자유 종 치는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며 저 일본 같은 섬나라는 섬이 변하여 소양이 되리로다.

대한 혼을 가슴에 품은 우리 동 제군이여, 태극기를 활신 모두 달고 대한제국 만세, 만세, 만만세 하리로다.

상항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최진하는 1917년 10월에 상항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 받아 1922년 10월까지 사역하였다. 1917년 11월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추수감사절 예배에서 그가 연설하였다. 이날 두 번의 연설이 있었는데 김영훈 목사는 중국어로 연설을 하였다. 본 교회 담임목사인 이대위 목사는 개회 이후 기도 순서만 맡았다. 이듬해 8월 상항 한인감리교회가 맨티카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헌금하였는데 그는 3달러를 헌금했다. 

최진하는 1920년에 '한인교회보를 청구하시요'라는 광고를 신한민보에 게재한 것으로 보아 본보에서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본보의 사장 겸 주필은 민찬호 목사였고 내용은 논설, 합중국경제사, 만국주일공과, 성경공부, 천문개요, 문답편, 교회소식, 잡보 등이었다. 

그해 11월 25일 하오 8시에 오(O) 스트릿 예배당에서 추수감사절 특별예배에서 첫 순서로 찬송가 235장을 부른 후 두 번째 순서인 기도순서를 맡았다. 그 후 사회가 취지를 말한 후 상항 국어학교 생도의 찬미, 사회자의 성경봉독, 최피터와 황만도의 감사절의 문답, 최에다와 황엘리사벳과 하소정의 노래, 정인과의 권설, 전봉운의 음악, 이대위 목사의 축사에 폐회하였다. 폐회 후 참석자들이 연단에 올라 일년 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간증이 있었는데 이중 초창기부터 열심과 정력을 다하여 교회를 섬긴 장 씨의 간증이 유별났다.

1921년 2월 16일 하오 6시에 상항 한인감리교회에서 최진하가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휴가를 맡아 도미한 후 내한하려던 사무엘 마펫 선교사 부부를 위한 환영회를 열었는데 뜻밖에 넬리 C. 홀드크로프트 부인 선교사와 랄프 O. 라이너 선교사 그리고 어비슨 박사도 참석했다. 

이날 마펫 선교사는 능란한 한국말로 재작년 독립운동을 본 후 한인이 참으로 강함을 알게 된 것과 재미 한인들이 내지동포를 동정해줄 것과 독립운동 이후 재미있는 일이 더욱 많다는 점과 한인들이 독립 선언할 때에 외국 선교사들에게 알리지 않고 종교 일과 나랏일을 분리하여 지혜롭게 한 점과 아들과 남편을 잃은 한국 여성을 위해 기도해줄 것과 독립운동으로 체포된 목사, 전도사, 장로, 교사 등이 감옥에서 전도한 것과 지식 계급에서 교회를 향하는 마음이 더욱 많은 것과 하나님이 한국을 동양 기독교 나라로 만들어 중국을 전도하여 천하를 전도하도록 한 것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나아가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되리라고 역설했다.

1923년 1월에 개최한 상항한인감리교회 에벗 청년회는 최진하를 학무국장으로 선출했다. 그해 회장은 하명원이었다. 이듬해 6월에는 6년간의 선교를 마치고 귀국하는 O. C. 밍글도르프 선교사를 환영했고 1925년 7월에는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80여 명의 한인이 모여 총회장 최진하의 사회로 16년간의 사역 후 안식년을 맞아 도미한 마위리 선교사를 환영했다. 

최진하는 1등석에서 찾았는데 그는 3등석을 타고 한인 유학생과 함께 입항했다. 그는 독립 운동자를 협조하다가 감옥에 갔었는데 의외로 환영에 감사하였고 조선에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조선에 영광 되는 일을 많이 할 것과 조선의 학교와 교회가 흥왕하여간다는 점을 말할 때는 청중이 많이 감동했다. 다른 순서를 더 진행하지 못하고 찬송가 120장을 부른 후 이대위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상항한인감리교회 평신도 대표

 

최진하는 1926년 1월에 시카고로 이주하여 유한회사에서 재직하다가 1933년에 다시 상항으로 돌아와 1935년에는 양제헌과 함께 그가 상항한인감리교회 평신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그해 12월 2일 주일 하오 7시 반에 있은 추수감사절 경축식 때 황사선 목사 주례하에 특별예배에서 그는 기도를 순서를 맞았다. 이듬해 5월 10일 어머니 주일을 맞아 상항과 오크랜드에 있던 한인감리교회가 연합 야유회에서 상항교회 황사선 목사의 주장으로 예배를 드릴 때 최진하가 연설을 맡아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책임과 자녀의 어머니에 대한 직책’을 논했다. 나성으로 이주한 최진하는 1940년 1월 다시 상항으로 떠난다. 나성한인기독교회와 양로원이 중국인 참수이집 서현루에서 오찬회를 마련했다. 그달에 그는 중가주에 있는 리들리한인장로교회 예배당 건축에 10달러를 헌금했다.

최진하는 1967년에 소천했고, 나성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한국 정부가 1995년에 추서한 건국훈장은 그의 나라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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