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김태묵(1908-1994년)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태묵은 1908년 10월 경북 대구에서 선종불가 법옹화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불타는 소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곳은 교회뿐임을 알고 어린 시절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일본의 교육가 신도양 선생에 관한 기사를 읽고 1930년에 그가 세운 일본 동지사 중학에 입학한 이후 대학예과를 거쳐 1936년에 문학부 신학과를 졸업하기까지 10년간 공부했다. 1937년에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그는 대구성경학교 교사와 계성학교 등 기독교 재단 학교에서 교목으로 활동하면서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신사참배 거부로 어려워진 상황에서 그는 1939년에 부인과 함께 도미하여 1941년 오버런 대학 대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당한 후 미국의 국방성 초청으로 상항으로 이주하여 ‘미국의 소리’의 전신인 OWI에서 일어방송을 의뢰받고 2차 대전 중 부전선을 맡아 동남아지역을 향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일본군이 항복할 것을 권유하는 방송을 1948년 7월까지 담당했다. 이에 일본은 궐석재판을 열어 김태묵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는 유학생 단체인 신도회에 참여하였는데, 미국 정부로부터 나성의 3백여 명의 일본인을 심문할 때 통역을 맡았고, 일본어 서신 검열 및 주미 일인단체의 1,200여명에 대한 성분조사에도 협력했다.

오클랜드 한인교회 OWI에서 활동하던 때 박용학 목사의 뒤를 이어 김태묵은 1944년 2월에 해리슨 스트리트 520번지에 위치했던 오클랜드 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 해 8월 그는 재미 한인학생회 상항지회에서 ‘종교정책의 구체안’을 발표했다. 그 해 12월 24일 하오 8시에 동 교회에서 성탄축하식이 있었는데 그의 사회 하에 상항교회 김하태 목사가 ‘빛과 어두움’이란 주제로 설교를 하였고, 김덕순의 독창과 소년 소녀의 노래들로 재미있는 순서를 진행하였다. 김태묵은 1945년 7월 15일에 사임하였다. 그 달 29일 하오 1시에 오클랜드의 광동루에서 그의 전별회 및 그의 뒤를 이은 임두화 목사 환영회에서 김태묵은 ‘임두화 목사의 계임을 기뻐합니다’라고 하였고 임두화는 권설을 진술하였다. 이날 교인들은 김태묵의 사임을 섭섭히 여기면서 그가 1년 동안 오클랜드 교회를 위하여 노력한 성적이 많다고 했다. 연회 보고에 따르면 박용학 목사와 김창수 목사의 연이은 징집에도 불구하고 김태묵은 의자와 성만찬 상을 마련하였고, 분담금이나 목회자 사례비를 지불할 정도로 교인수가 증가했고, 공간이 협소한 가운데도 불구하고 예배와 한글학교를 진행했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고국으로 귀국하려고 했지만 임영신을 통하여 전달받은 가족의 서신에는 일본에 의하여 어려움을 당할 것을 염려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말 것을 권하자 김태묵은 오클랜드 한인교회를 사임한 후 하와이에 건너가 설교를 펴기로 결심한다. 그는 백발이 다된 교포들에게 “일제의 멍에에 신음하는 조국 동포들을 보다 못해 지쳐서 왔다. 더욱이 여러분 모두가 일본말을 사용하고 일본사람이 되어간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고 한 후 “조국에서는 젊은이들이 광복을 위해 지하운동을 하고 있으니 희망을 가져달라”고 호소를 했다. 그가 설교를 끝내고 강단에서 내려서는데 흰머리의 노인이 다가와 손을 덥석 잡고 “나 이승만이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갑자기 눈물이 날만큼 감격스러웠다. 초등학교 1학년인 10살 때 상해 임시정부와 이승만 박사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고 상해로 망명한 친척도 있어 이 박사가 늘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우연히 만나니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려 했으나 미국 정부가 군사수송 때문에 2년간 민간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하여 그가 귀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해 12월 17일 가주 한인유학생과 함께 귀국하여 군정 하에서 경북 도지사였던 미군 아담스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서울에 올라와 입법위원회(국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러치 군정장관에게 보고하는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하와이 고등법원으로부터 한인교회가 2년 동안 분규상태에 있으니 속히 수습하지 않으면 교회 문을 닫도록 하겠다는 통보를 받자 이승만의 권유로 1948년 7월에 이승만이 개척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로 부임했다. 3개월 만에 교회 분규를 해결했지만 얼마 후 그는 6.25동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조국은 망하지 않는다고 설교로 위로하고, 승전을 위한 기도 및 구호금 모집운동을 벌여 고국에 있는 교회에 보냈다.

화부 한인감리교회 김태묵은 1951년에 워싱턴으로 이주하였다. 한국 외무부에서 파견 나온 박원규와 유학생 고병철과 함께 이승만이 출석했던 워싱턴DC 16가에 소재한 폰드리 감리교회의 소예배실을 빌려 화부 한인감리교회를 개척한다. 당시 모든 회중이 영어로 예배드린다는 원칙하에 미국장로교회가 한인교회 개척에 회의적이었던 반면에 미국감리교회는 적극적이었다. 그 해 10월에 32명이 모인 가운데 김태묵의 인도로 첫 예배를 드렸고 그 날 예배에서 드린 헌금은 17.30달러였다. 그는 귀국 차 1954년 3월에 사임하였고 오창희 목사가 그 뒤를 이었으니 2년 6개월간 본 교회를 섬긴 셈이다.

독립운동과 동포 사랑 도미 후 유학생 시절에 김태묵은 독립금을 기부했고, 1943년 11월 상항 국치기념식에서 기도순서를 맡았으며, 그 해 12월에 미영중 3국의 카이로 회담 후 상항에서 개최한 북가주 대한인 시국 대회 때 기도 순서를 담당했다. 그는 상항에 한인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하와이에 지회를 두고 5천여 명의 교포로부터 매달 1인당 5달러를 모금하여 6할은 중경의 임시정부에, 4할은 워싱턴 외교위원부에 보냈다. 오클랜드 한인교회 목회 중 김태묵은 1944년과 1945년의 오클랜드 지방회 삼일기념식에서 ‘삼일운동사’를 강연했고, 국치기념식에서 기도순서를 맡았으며, 순국선열기념식에서 기념사를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구세와 군사운동금 및 상항대표단 여비 의연금을 냈다. 그리고 전쟁에 출정한 한인 군인을 위한 기독교 자선사업단체인 한족 출정군인친족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도왔으며, 상항의 고 장영신과 고 차정선의 장례식에 부의금을 보냈다. 하와이에서 목회하는 동안 김태묵은 국민회와 동지회의 단합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이들의 독립운동에도 관여하였다.

상항한인연합장로교회 김태묵은 1954년 서울 남대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교장 (1956-1957)과 YMCA 총무(1957년)를 지낸바 있다. 4.19가 나자 그는 도미하여 1960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연구했고, 이듬해 워싱턴 웨슬레 신학원에서 가정상담학을 연구했으며, 미국 워싱턴 성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에 근무하면서 목회상담학을 수련하였고, 뉴욕의 종교와 정신병학연구소에서 다시 수업하였다. 그 후 귀국한 그는 1968년에 한국정신위생원을 창립하고 원장으로 있었으며, ‘생명의 전화’를 시도했다. 이후 김태묵은 도미하여 상항에 거주했는데 상항한인연합장로교회는 1979년에 그를 원로목사로 추대하였다. 이정근 목사가 사임하던 1980년 그는 임시목사로 추대되어 김윤근 목사가 부임하기까지 교회를 섬겼다. 그는 1994년 12월 18일에 향년 86세로 상항에서 소천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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