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황사선 목사(1885-1974)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황사선은 1885년 10월 18일 평북 의주군 위화면 위화도의 한 농가에서 8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9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11살 때에 어머니를 잃어 큰 형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세 때쯤부터 천주학쟁이라는 비방을 받았는데 이 무렵 교회에 다닌 것으로 보인다. 큰 누나 황사성의 권유로 17세부터 28세까지 평양까지 걷기도 하고 당나귀도 타면서 숭실학교의 중학과정과 대학과정을 마치면서 교장 윌리암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성경과 신학문을 배웠다. 이 기간 중 22세에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의 교사가 되어 2년간 가르쳤고, 그 후 2년간 평북 강계 영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삭도교회

숭실 학생들이 을사오적 타도를 선언하고 이근택의 집에 불을 지른 사건에 관여했던 황사선은 1907년에 안창호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1911년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인 105인 사건, 일명 신민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신민회에 가입된 상황에서 그의 셋째 형 황사용의 주선으로 상해를 거쳐 여권도 없이 1913년 4월에 황사선과 그의 가족이 상항에 도착한다. 그는 그 해 11월에 삭도 ‘세크라멘토’에서 정인과와 더불어 예배를 인도하였고, 그 해 12월까지 사역하였다. 이 기간 서양교사를 고빙하여 김홍균의 집에서 7-8명이 매일 야학을 공부하였는데 황사선도 야학 학생이었다.

상항한인교회

1914년 1월, 낮에는 성경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서양인의 야학교에서 공부하던 황사선은 그 해 3월 상항교회 권사로 선정되었고, 그 해 4월 청년회 학문국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듬해 태평양 연안 동양인선교지방회의 지방 전도사로 임명받았는데 한인양복 세탁점을 운영하는 자비량전도사였다. 1920년에는 황사선이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아 상항교회 부목사로 사역했을 때에도 자비량 목사였다.

1928년에는 그가 장로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그의 숭실 동문인 이대위 목사가 소천하자 그를 이어 상항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그는 위의 기간 중 태평양신학교에서 3년간 청강생으로 공부하였다. 그가 목회하던 기간 평균 출석교인은 75명이었다. 1930년 초 황사선은 안익태를 위하여 작은 음악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안익태에게는 ‘위대한 감상과 위대한 정신으로써 예술의 극도의 연주는 금후 제 일생으로 다시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러한 감동이 애국가 작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가 상항교회에서 받은 만년필로 애국가 곡조를 5선지에 옮겼다고 한다. 성전 축하예배와 낙성식은 1930년 6월 2일 오후 3시에 상항은 물론 인근 한인교회와 서양 교회와 중국 교회까지 포함한 200여명이 모인가운데 성대하게 하나님께 드렸다. 총회 보조금 25,000달러와 상항뿐 아니라 미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서양 교인들이 헌금한 약 1,200달러가 들었다. 한인들이 애국가를 부를 곳이 교회라며 건축헌금을 드린 자도 있었다. 주일 예배시간은 오전 11시가 되었고 주일학교는 오전 10시였다.

황사선은 주일학교, 국어학교 및 엡워스 청년회 등의 2세 목회에 초점을 맞추었다. 상항 메이슨 스트리트 1321번지의 새 성전에 예배당과 주일학교와 청년회실이 구비된 것은 당연했다. 황사선은 주일학교를 재개하고 주일학교 교장으로서 1928년에는 교감에 양재명, 1929년에는 조응칠이 수고했다. 1934년에는 1학년, 2학년, 3학년 그리고 청년반으로 나누어 운영하였는데 그 해 6월에는 성경의 역사적 사진과 조선 명승지 환등강연회 그리고 아버지날 축하회가 있었다. 그 해 9월에는 어린이 놀이터와 운동장을 조성하였다.

황사선은 1927년 이후 국어학교 교장이었다. 1929년에는 천옥분이 매일 약 두 시간씩 가르치고, 그도 매일 한 시간씩 가르쳤고,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하기강습을 한 달 동안 실시했다. 1930년 7월부터 하기강습이 개강되어 문양목과 이종선이 가르쳤고, 학예회도 있었다. 1931년에는 교장에 양제현이 맡고, 재무에 황목사 첫째 부인 황보석, 서기에 김동우, 교사에 박필연 등으로 조직이 보강된 가운데 등록 학생 20명가량이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에 기념식을 특별히 마련하였다. 1932년에는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학부형들이 학비를 내지 못하여 휴학이 불가피했지만 6월 하기강습만은 상항교회와 국민회상항지방회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1934년에는 황 목사 둘째 부인 황옥석과 김폴린이 학생들을 3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1935년에는 교장에 양제현, 재무에 우병옥 그리고 교사에 김폴린이었다.

1937년 하기강습에는 교육전문가인 이진묵이 교사로 일했고, 1938년에는 황사선의 둘째 부인인 황옥석이 교사로 수고했고, 양제현은 1931년 이후 교장으로 시무했다. 청년이 많지 않아 장년까지 합하여 엡워스청년회를 재조직했다. 1930년 중반에는 미국에서 출생한 2세들로 조직되었다. 1935년에는 오클랜드교회에서 상항, 오클랜드, 세크라멘토의 한인청년연합회가 열렸는데 약 70여명이 참석하였다. 같은 달에 중국인 청년회와 연합회를 열고 민족 간의 교류와 우의를 돈독케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해 6월에는 한인졸업생 축하회를 개최했다. 그 해 11월에는 상항 교회와 오클랜드 청년회의 100여명이 모여 하와이에서 성장한 한인2세 청년들의 환영회를 열었다. 이듬 해 2월에는 졸업생 축하회가 있었다.

1935년부터 1936년에 걸쳐 매주 1회 모임이 있었는데 강연회를 보면 강사는 주로 청년회원들이 했지만 피스크 박사와 애담스 목사 등 백인 강사도 있었다. 강연의 주제는 광주학생 사건의 경험담과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 등 한국의 현실과 독립문제가 큰 초점을 받았다. 1937년에는 상항학생들이 저녁 한 끼를 단식하여 그 금액을 모아 광주학생사건으로 감옥에서 있는 학우들을 돕기로 했다. 황사선은 조국 독립에 헌신하였다. 흥사단 단장과 국민회 북미총회 부회장을 세 차례 역임하였다. 그는 의무금과 인구세 그리고 독립금을 납부했고, 삼일운동 직후 1919년 신윤국 등 12명의 동지를 모아 청년혈성단을 조직하고 매달 10불씩 임시정부와 의용군을 후원하였고,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될 때 황사선도 관여했다. 1931년 5월에 36년간 조선에서 사역한 어비슨 박사 부부가 상항을 방문했을 때 만찬을 겸한 환영회를 베풀고 한국 소식을 들었고, 1936년 1월에 애담스 목사가 방문하여 한국 소식을 전해 주었다. 1930년 장인환 의사의 서거, 1931년 상해 임시정부의 손정도 목사의 별세, 1933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순국, 1938년 안창호 선생의 순국, 1939년 임정구 목사의 소천으로 이들의 추도식을 드림으로써 조국 독립의 의지가 결연했다. 황사선은 원산학생 연조금, 수재 구제금, 기근구제금, 동래 실수학교 의연금, 재만 동포 동정금, 맛단사스 재류 동포 구제금, 서간도, 멕시코 동포 구제금을 보내는 등 스스로 민족을 사랑했다. 삼남지역에 큰 수해가 났을 때 상항교회 부인전도회의 주선으로 복구 후원금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황사선은 광복군 후원금을 보냈고, 홍 언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여 중국군 제19로 군병에게 보냈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1월에는 황사선의 인도로 신년전승기도를 드렸고, 상항교회 청년 중에서도 6명이 군대에 입대했다.

은퇴와 소천

1942년 당시 상항교회는 황사선을 비롯하여 김창수 부목사와 지방전도사 양주은이 수고했다. 상항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가 적어 교세가 확장될 기회는 희박했으나 그럼에도 교회 건물을 개수하려고 250달러를 모으는 등 열심을 내던 그 해 12월에 57세의 황사선은 은퇴했다. 그런데 목사인 황사선이 은퇴 후에도 교회를 섬겼다. 1943년 6월에 전도사로 본 교회에서 사역하였고, 그 해 11월 교회 수리비로 53원을 헌금했으며, 1944년 12월에는 중경동포 위문금을 냈다. 황사선은 1974년 6월 10일에 향년 89세로 소천했다. 그의 첫 부인인 황보석은 1932년 3월 21일에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 해 3월 그는 평양에서 김옥석과 재혼했다. 그는 반도, 명도, 엘리자베스, 메리 등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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